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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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동이 아닌 고정된 삶이었다. 주어진 환경을 벗어난 적이 없다.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다.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로만 존재했다. 소년이나 남자가 아닌 아버지로만.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버지의 집이자 내가 태어난 곳으로 나의 마음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집은 이미 사라졌다. 부모도 떠나버렸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한 과정이다. 그러나 사랑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건 인정하기 어렵다. 사랑에 대해 인색했다면 더욱 그렇다. 가족은, 그런 존재다. 서로를 사랑하면서 사랑에 대해 인색하다. 형제보다 부모에게 특히. 그들의 생 일부가 불꽃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열다섯 살, 아버지와의 이별을 슬픔보다 낯선 느낌일 것이다. 전쟁을 겪고, 아주 작고 작은 집에서 10남매를 낳고 키우며 삶을 지탱해 온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와의 다툼이 속상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아버지가 없다는 삶이 가져올 상실의 슬픔을 예측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가 있어 든든했고 영원히 곁에 머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말하지 못했다. 서툴게라도 말해야 했는데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녀들이 그렇다.

 

 ‘칼을 산 것은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물어물 서투르게 속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 속에서, 부모님들 사이에서 난파한 사랑, 죽은 사랑에 대해서는 서로 간에 절대로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삼 형제처럼. 그리하여 각기 저 혼자서 침묵을 지켰던, 침묵 속에서 괴로워했던 삼 형제, 멀어져가는, 자신들 스스로도 물리치고 있는 그 아버지에 대해서 감히 말하지 못했던 삼 형제처럼.’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87쪽)

 

 ‘삶은, 진짜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다. 그런 삶이 아닌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아버지 없이 혼자 사는 것 말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120쪽)

 

 무뚝뚝한 아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의 삶, 그를 향한 사랑은 뒤늦게 찾아왔다. 원망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랭 레몽의 자전적 이야기라서 더욱 슬픔이 크게 밀려온다. 사라지지 않는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를 통해 부모, 형제, 고향에 대한 애틋한 애정을 만났다면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알랭 레몽의 청년기,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신부가 되기 위해 캐나다와 로마에서 공부를 했던 그가 다른 삶을 살게 된 과정, 아름다운 방황, 운명적인 사랑을 들려준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나는 아버지를 놓쳐버렸다. 나는 아버지를 그들처럼 알고 지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을 거야. 그렇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모든 사람들 속에서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301쪽)

 

 상상할 수 없었던 소년이며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생경하다. 우리의 지난날이 그러했듯이 아버지의 삶도 그러했는 걸 뒤늦게 마주한다. 삶이 진행될수록 작별의 날들이 다가온다. 우리 삶은 작별과 동시에 전진한다. 어쩔 수 없다. 뒤늦은 이해, 뒤늦은 평안. 아름답고 찬연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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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6-16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리즘 같은 제목도 와닿지만, 어릴 적 느꼈던 아버지의 존재감을 되짚어볼 수 있는 스토리라니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목련 2016-06-16 16:27   좋아요 0 | URL
소설 속 아버지를 통해 저마다의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을 선물하는 소설이 아닐까 싶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6-06-1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너무나 마음 닿는 리뷰! 고맙습니다. 몸은 많이 회복되셨나요? 알랭 레몽의 두 작품 모두 읽어봐야겠어요.

자목련 2016-06-16 16:26   좋아요 0 | URL
마음에 닿았다니, 참 좋습니다!!
몸은 많이 회복되었어요. 고맙습니다^^

blanca 2016-06-1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울 것 같아요. 장바구니에 담아요.

자목련 2016-06-16 16:25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그리움이라고 할까요. blanca 님의 글은 더 아름답지요. 기다려져요, 어떻게 담아내실까.

에이바 2016-06-17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죠. 리뷰도 좋아요, 자목련님. 서재가 산뜻해졌어요. 애비 코니쉬! 저도 브라이트 스타 좋아해요..

자목련 2016-06-20 17:19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좋은 소설이었어요. 에이바 님의 리뷰 때문에 이 책이 더욱 궁금해졌으니까요. 저는 영화를 보지는 못했어요. 기회에 되면 꼭 보고 싶네요^^
 
탐독 - 10인의 예술가와 학자가 이야기하는, 운명을 바꾼 책
어수웅 지음 / 민음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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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라서, 누군가 권해준 소설이라서, 언론의 호평에 관심이 생겨서 읽는다. 읽는다는 건 듣는다는 것이고 듣는다는 건 집중한다는 것이고 집중한다는 건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책에 대한 책은 많다. 책을 읽는 것에 대해 말하는 책, 책을 읽고 쓰는 데 중점을 두는 책, 책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책, 책과 삶을 말하는 책. 어수웅의 『탐독』은 어떤 책일까. 인생 최고의 책에 대한 이야기, 책의 힘을 말하는 책, 책을 통해 변화하는 삶에 대한 책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 잘 알려진 책이 등장하는 건 당연하다. 중요한 건 그 책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기억에 남은 책이, 여러 번 읽은 책이, 다른 누군가에게 권하는 책이 모두 좋은 책은 아니다. 특정 부분이 재미있어 기억이 남을 수도 있고 필요에 의해 여러 번 읽어야 할 책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자꾸 생각이 나는 책, 책 속의 인물이 현실의 누군가와 겹쳐 보여서 힘든 책, 읽을 때마다 다른 목소리를 듣는 책이라면 진정 인생의 책이라 꼬집어 말할 수 있겠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책이 나에게도 같은 의미로 다가올 수는 없지만 그 책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특별한 책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어수웅이 만난 열 명의 예술가는 저마다의 책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어떻게 그 책을 읽었는지, 책을 읽을 당시 자신의 상황, 책을 읽은 후 달라진 내면에 대해서 말이다. 한 권의 책과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놀라운 경험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 책들은 내게 새로운 책이 된다. 그 책을 읽든 읽지 않았든. 아쉽게도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았다. 더 안타까운 건 읽어야 할 책으로 오래전부터 책장에 안착한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읽어야 할 일만 남은 것.

 

 이제 책이 아닌 그들의 말에 집중해보려 한다. ‘나를 바꾼 책, 내가 바꾼 삶’이라는 주제의 인터뷰는 신선한 주제는 아니다. 열 명의 인터뷰이 가운데 일부는 이미 다른 책에서 다룬 적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끌리는 이유는 책과 인간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애정 때문이다. 기억하고 싶은 건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을 읽고 가족이 다시 보였다는 소설가 조너선 프랜즌과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 우리의 대작가 움베르트 에코의 말이다. 알파고와 대결하며 살아남기 위해 고분분투해야 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할까. 조너선 프랜즌의 진짜 사람들이라는 말에 거대한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했다.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올바른 정보를 선택할 수 있도록 비교하고 회의하라는 에코의 말은 인터넷 세대에게 필요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스마트폰과 페이스북이 어떻게 인간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겠어요? 소설가의 임무가 더 중요해진 시점입니다. 진짜 사람들을 찾아내야 하니까요.” (46쪽, 조너선 프랜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정보를 여과하고 걸러 내는 법을 가르치는 것. 분별력을 가르쳐야 해요.” (101쪽, 움베르트 에코)

 

 그뿐인가. 김영하, 정유정, 김중혁, 은희경은 어디서 만나든 반갑고 유쾌하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과 그들을 지탱해주는 한 권의 책과 소설 쓰기에 대한 이야기. 특히 하나의 소설이 탄생하는 집필실의 소개는 놀라웠다. 직접 그린 지도가 가득한 스케치북, 거기에 세밀화와 확대도, 주인공의 동선과 사건의 동선을 미리 그린다는 것이다. 다른 소설가 역시 몇 권의 집필 노트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고 고친 후에 내게 온 소설이라니, 새삼 그 소설을 읽을 수 있어 감사하다.

 

  “‘책을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 이렇게는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몰라도, 생각을 조금씩 바뀌게 해 줘요. 한꺼번에 바뀌는 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136쪽, 은희경)

 

 은희경의 말처럼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인생이 통째로 바뀔 수는 없다. 더불어 세상의 모든 책이 인생의 책이 될 수도 없다. 어떤 책은 쉼을 위한 책이고 어떤 책은 위로를 전하는 책이고 어떤 책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책이고 어떤 책은 여전히 읽지 않은 책이 된다. 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이 되기도 하고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은 책이 될 수도 있고 언젠가 당신에게 주고 싶은 책이 되기도 한다. 책이라는 미지의 세계, 읽어야만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 책은 정말 대단하고 신비로운 존재다. 한 권의 책이 인도하는 그곳에서 펼쳐질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당신의 삶은 조금씩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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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문의 기적 일공일삼 67
강정연 지음, 김정은 그림 / 비룡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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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 믿었다.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건 할머니 할아버지뿐이라고 말이다. 돌아가신 엄마는 손녀가 있었으니 할머니가 맞지만 너무 젊은 나이였기에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언제 어떤 형태로든 이별이 찾아온다는 걸 경험했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갑자기 엄마를 잃은 아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다. 행복만이 가득했던 예쁜 ‘분홍 문’ 집의 김지나 씨는 맛있는 찌개를 해주려고 두부를 사러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별을 준비할 짧은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내를 잃은 박진정 씨와 엄마를 잃은 박향기의 일상은 엉망진창의 연속이었다.

 

 사랑하기에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었던 엄마 김지나 씨는 남편과 아들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남겨진 박진정 씨와 박향기 군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분홍 문’은 더이상 예쁜 문이 아니고 깨끗하지도 않다. ‘행복한 우리 집’은 ‘안 행복한 우리 집’이 되고 말았다. 향기와 아빠가 발로 차서 더러운 발자국만 가득하다. 아내와 엄마를 잃은 상실로 대충 살아간다. 아빠는 술에 취하고 아들은 게임에 취해 하루하루를 보낸다. 챙겨주는 이가 없으니 향기는 학교에도 지각하고 친구들과 사이도 좋지 않다. 모자 디자이너였던 아내와 연 박지성 씨의 모자 가게는 파리만 날린다.

 

 엄마가 있다면, 아내가 있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아내가 그립고 엄마가 보고 싶은 부자에게 엄마 김지나 씨가 나타났다. 꿈이 아니라 진짜로 말이다. 아빠와 아들에게만 보이는 엄지공주. 엄마 김지나 씨에게 주어진 시간은 72시간. 아빠와 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엄마 옆에만 붙어 있고 싶다. 엄지공주가 된 엄마는 달라졌다. 모든 걸 다 해주던 엄마가 아니라 무서운 여장부로 변했다. 쓰레기장 같은 집을 정리하고 향기는 학교로 진성 씨는 가게로 보낸다. 그리고 말한다. 예전처럼 이웃과 교류하고 시장에도 가고 주말에는 공원에도 나가라고. 엄마가 있을 때처럼, 기쁘고 즐겁게 사랑해야 한다고. 엄마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점점 줄어드는 시간 때문에 씩씩한 엄마 김지나 씨는 힘들다. 그런 엄마에게 몽 천사는 주어진 시간을 온 맘 다해 사랑하라고 말해준다. 아빠 박진성 씨도 힘들지만 괜찮다. 그래도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떠났을 때보다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 엄마와 다시 이별을 해야 하는 향기도 천사가 된 엄마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 엄마가 없어도 사랑하는 아빠와 함께 엄마를 기억하고 살아가면 된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현재 곁에 있는 이들과 오늘을 사랑하라는 동화. 모두가 알지만 잊고 사는 이야기. 저마다의 문에 사는 모두에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선물로 주어진 이 시간엔 그저 온 마음 다해 사랑하고, 그다음에 벌어질 일은 그냥 기다리는 거야.” (164~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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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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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진 시대를 살고 있지만 혈연에 대한 애정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가까운 친구나 주변에 입양을 했거나 재혼을 한 경우가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족 구성원의 조건이 있다면 최우선은 무엇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한 공간에서 함께 살고 가족이란 제도에 속한 구성원을 모을 수 있다면 말이다. 배우자가 아닌 가족에 대해서다.  고종석의 『해피 패밀리』는 그런 걸 묻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들도 성장하면서 가족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생활한다. 당연한 일이다. 직업을 갖거나 결혼을 하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고 본가를 찾는다. 그러나 소설 속 한민형처럼 부모를 가족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분명한 건 그럴만한 계기가 있다는 것이다. 한 씨 집안에서도 금기가 된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부모와 아들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그 사건이 무엇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다. 저마다의 시선으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소설은 그것을 수수께끼처럼 던져놓는다.

 

 출판사를 하는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 4남매가 있다. 첫 번째 화자는 집안의 아들인 한민형이다. 낙하산으로 아버지의 출판사에 다닌다. 성실한 사람은 아니지만 직원들에게 나쁜 소리를 듣지는 않는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사장과 직원일 뿐이다.  자신이 부모에게 되돌릴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걸 알지만 그에게 부모는 가식덩어리로 존재한다. 특히 막내 여동생 영미를 입양한 어머니는 참을 수 없다. 가장 친한 친구의 딸을 입양했지만 결코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어머니의 지독한 위선에 한민형을 치를 떤다. 한민형은 가족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소설 곳곳에서 죽은 한민희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려주면서도 정작 그 이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글을 쓰든 안 쓰든 나는 위선자다. 나는 그걸 안다. 내 가족에 대해서도, 내 술친구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나는 위선자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위선자다.’ (한민형, 26쪽)

 

 부모는 부모의 입장으로 자식은 자식의 입장으로 상대에게 서운함을 토로한다. 아들의 생일에도 함께 밥 한 끼 먹지 못하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서현주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을 털어놓는 부분은 묘한 감정을 발생시킨다. 한 씨 가족은 서현주에게로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한민희의 친구였던 서현주가 며느리로 들어오면서 그나마 한 씨 가족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장모를 부모 그 이상으로 여기며 살고 있어서 서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민형에게 가족은 아내와 장모, 그리고 딸이 전부다. 남편과 시댁 사이를 조율하는 서현주, 그의 위선은 정녕 옳다.

 

 ‘내 위선은 지혜로운 위선이다. 가족들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위선. 가족들 사이에 사랑을 만들어내는 위선. 비록 그 평화가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위태한 것이고, 그 사랑이 보기에만 아름다운 치장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서현주, 82쪽)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가족 구성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들려주는 건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공통된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가족. 비밀이라는 독을 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서로를 해피 패밀리라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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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천 개의 유혹 - 욕망이 만든 뜻밖의 세계사
에이자 레이든 지음, 이가영 옮김 / 다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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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떠오르는 생각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남들이 지닌 물건에 대한 욕심, 나는 왜 갖지 못했을까,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갖고 싶은 마음. 그것을 소유하지 않았을 때 불행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뇌. 『보석 천 개의 유혹 』을 읽으면서 나는 잠깐 가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서랍에서 잠자는 다이아 반지, 목에 걸린 평범한 목걸이, 나중에 하나쯤 갖고 싶은 우아한 진주 반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고대사와 물리학을 전공하고 보석 디자이너이자 제작자인 저자 에이자 레이든은 독자가 이런 생각을 하기를 바라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랬다.

 

 책의 본문에 등장하는 보석은(사진, 그림) 정말 매혹적이다.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누군가는 사람을 속이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분쟁이 생겼다. 아름다운 보석에 숨겨진 역사라니,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렇다면 왜 보석일까. 인간의 욕망과 가장 많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욕망도 누군가의 마케팅이라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그렇다. 다이아몬드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건 바로 드비어스였다.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영화 속 여배우에게 다이아몬드를 제공했다. 그저 광고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뇌는 약혼, 결혼반지는 반드시 드비어스로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보석의 가치는 결국 인간의 욕망이 만든 것이다.

 

 책은 이처럼 보석을 소재로 인간의 욕망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보석 전체를 다루는 게 아니라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진주, 황금달걀과 역사 속 에피소드를 접목해 들려줄 뿐이다. 프랑스 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진주,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파베르제의 황금 달걀을 통해 보석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거기다 양식진주 개발이 불러온 일본의 성장과 손목시계의 가치 변천사까지 들려준다. 저자는 보석이 정치적 수단이었고 권력의 상징임을 설명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러 면에서 마케팅의 귀재라 할 만했다. 여왕이 판 물건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진주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대표하게 된 것은 단지 여왕이 진주를 무척 많이 가지고 있었고 항상 몸에 둘렀기 때문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진주와 진주가 연상시키는 모든 덕목을 자신과 결부시켰고, 진주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가장 핵심적인 통치 도구였던 거대한 상징화 작업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258~259쪽)

 

 저자는 보석을 통해 세계사를 들려준다. 색다른 시선이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단순하게 보석과 세계사에 얽힌 에피소드가 아니라 보석을 통한 인간의 욕망과 경제학, 심리학을 두루 다룬다고 봐도 좋다. 그러니까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역사서이고 누군가에는 물건의 가치, 광고, 가격을 매기는 경제학처럼 다가올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보석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읽든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욕망이다.

 

 ‘진짜 ‘보석’은 땅속이나 실험실이 아닌 인간의 마음속에서 태어난다. 보석은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보석의 힘으로 세상이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보석은 그저 물건일 뿐이다. 보석은 우리를 살릴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으며 무언가를 만들지도 상상해내지도 못한다. 보석이 지닌 단 한 가지 본질이자 목적은 상을 맺고 다시 반사하는 것이다. 보석의 반짝이는 표면과 마찬가지로 보석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우리의 욕망을 반사해 다시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 (4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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