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동이 아닌 고정된 삶이었다. 주어진 환경을 벗어난 적이 없다.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다.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로만 존재했다. 소년이나 남자가 아닌 아버지로만.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버지의 집이자 내가 태어난 곳으로 나의 마음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집은 이미 사라졌다. 부모도 떠나버렸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한 과정이다. 그러나 사랑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건 인정하기 어렵다. 사랑에 대해 인색했다면 더욱 그렇다. 가족은, 그런 존재다. 서로를 사랑하면서 사랑에 대해 인색하다. 형제보다 부모에게 특히. 그들의 생 일부가 불꽃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열다섯 살, 아버지와의 이별을 슬픔보다 낯선 느낌일 것이다. 전쟁을 겪고, 아주 작고 작은 집에서 10남매를 낳고 키우며 삶을 지탱해 온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와의 다툼이 속상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아버지가 없다는 삶이 가져올 상실의 슬픔을 예측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가 있어 든든했고 영원히 곁에 머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말하지 못했다. 서툴게라도 말해야 했는데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녀들이 그렇다.
‘칼을 산 것은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물어물 서투르게 속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 속에서, 부모님들 사이에서 난파한 사랑, 죽은 사랑에 대해서는 서로 간에 절대로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삼 형제처럼. 그리하여 각기 저 혼자서 침묵을 지켰던, 침묵 속에서 괴로워했던 삼 형제, 멀어져가는, 자신들 스스로도 물리치고 있는 그 아버지에 대해서 감히 말하지 못했던 삼 형제처럼.’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87쪽)
‘삶은, 진짜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다. 그런 삶이 아닌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아버지 없이 혼자 사는 것 말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120쪽)
무뚝뚝한 아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의 삶, 그를 향한 사랑은 뒤늦게 찾아왔다. 원망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랭 레몽의 자전적 이야기라서 더욱 슬픔이 크게 밀려온다. 사라지지 않는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를 통해 부모, 형제, 고향에 대한 애틋한 애정을 만났다면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알랭 레몽의 청년기,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신부가 되기 위해 캐나다와 로마에서 공부를 했던 그가 다른 삶을 살게 된 과정, 아름다운 방황, 운명적인 사랑을 들려준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나는 아버지를 놓쳐버렸다. 나는 아버지를 그들처럼 알고 지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을 거야. 그렇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모든 사람들 속에서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301쪽)
상상할 수 없었던 소년이며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생경하다. 우리의 지난날이 그러했듯이 아버지의 삶도 그러했는 걸 뒤늦게 마주한다. 삶이 진행될수록 작별의 날들이 다가온다. 우리 삶은 작별과 동시에 전진한다. 어쩔 수 없다. 뒤늦은 이해, 뒤늦은 평안. 아름답고 찬연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