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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지나친 것들은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지나친 사랑, 지나친 관심도 그러하다. 문제는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기준이라는 점이다. 사랑을 절제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자식에 대한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다. 부모에게 자식은 소유물은 아니지만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지나친 사랑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이해할 수 없다.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은 이처럼 지나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인공 앨릭스에게 어머니의 애정은 집착처럼 여겨졌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감시와 다르지 않았다. 사춘기 소년에게 성은 무한대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기 충분한 주제였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고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은 화장실로 제한되었다. 화장실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아들의 건강을 위해 화장실을 지키는 어머니, 아들의 자유로운 설사가 부러운 변비로 고통받는 아버지라니. 정말 필립 로스답다.
“다들 나 좀 가만 내버려두면 안 돼요?” 34쪽
앨릭스의 주장은 옳았다. 그냥 내버려둬야 했다. 아들은 사춘기였으니까, 머릿속 음란과 쾌락이 꽃을 피워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아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 채 화장실에 오래 있다는 건 건강과 직결된 문제였다. 어디 그뿐인가. 앨릭스는 유대인의 삶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부모와 종교로 대립하는 일도 어느 집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이다. 앨릭스에게는 평범 그 이상의 문제였던 것이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의 성에 대한 이야기(그러니까 아주 대놓고 직설적인 묘사를 통해)를 들려준다. 부모를 비롯한 친척, 연인과의 마찰도 함께 말이다. 서른 중반이 된 엘리트 변호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불평으로 가득하다. 앨릭스 스스로 유대인의 전통과 규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그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가 자신의 고통을 정신과 의사 슈필포겔에게 쏟아놓는 게 안쓰러운 정도다.
“아, 내가 왜 계속 이렇게 늘어놓는 거죠? 왜 내가 사춘기 때의 졸린 듯한 높은 목소리로 계속 이렇게 늘어놓는 겁니까? 맙소사, 부모가 살아 있는 유대인 남자는 열다섯 살 난 애예요. 부모가 죽기 전에는 계속 열다섯 살 난 애라고요!” 162쪽
왜 앨릭스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일까. 무엇이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일까. 반복하듯 등장하는 통제 불가능한 성에 대한 욕구와 여성편력으로 여겨지는 행동, 그 뒷면에 가려진 앨릭스의 냉소적인 내면이 궁금할 뿐이다. 출판 당시인 1969년을 생각하면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을 게 맞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적나라하게 표현한 분노 표출은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읽기 불편한 정도는 인정한다. 필립 로스의 유머와 풍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어느 누구도 앨릭스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슈필포겔 선생님, 이게 내 인생입니다. 내 하나뿐인 인생이라고요. 나는 유대인의 우스갯소리 한가운데서 인생을 살고 있단 말입니다! 나는 유대인의 우스갯소리에 나오는 아들이에요. 문제는 이게 전혀 웃을 일이 아니라는 거죠! 정말이지, 누가 우리를 이렇게 불구로 만든 거죠? 누가 우리를 이렇게 병적으로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약한 사람들로 만들었느냐고요? 왜, 왜 그 사람들은 지금도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 (58쪽)
고백하자면,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꼬마 앨릭스를 만나는 동안은 정말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는 ‘앨릭스’보다 『울분』의 ‘마커스’에게 애정을 표한다. 그렇다고 필립 로스에 대한 무한 애정이 식은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