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정원사
앙리 퀴에코 지음, 양녕자 옮김 / 강 / 2002년 7월
절판


"그림이나 그리면서 영원히 여기 머물 생각입니다. 이렇게 조용히."
"영원히라, 그건 좀 길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 자네 모습이 좋아 보이는 건 확실해......멋진 생각이야."-10~11쪽

"그림 그리는 것도 노동이야. 그림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어야겠어......누구나 잘하는 게 하나는 있는 법이지. 난 곡괭이질이라면 자신 있어...... 그림을 그리자면 여자처럼 섬세한 손이 필요해. 순대같이 무지막지한 손 말고. 연장들이 나한테는 연필인 셈이지. 자네가 연필을 잡고 풀을 그린다면, 난 낫을 들고 풀을 베지......비싸고 아름다운 것으로야 자네겠지만 빠르기는 내가 더 빠를 걸. 그림 그리는 것도 취미가 있어야 돼. 참을성도 많아야 하고. 난 절대 못할 거야......"-20쪽

"차 안에서 바깥 풍경도 감상하고 좋잖아요?"
"집, 나무, 젖소 같은 걸 감상하라고? 사람 사는 세상이란 어디나 똑같아. 그래서 난 주로 잠으로 때우지."-21~22쪽

"어제는 내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지? 생각한다는 게 과연 뭘까 하는 생각을 너무 하다보니 머리가 멍해지더군. 그래서 그 머리 위에다 헬멧을 뒤집어쓰고......"
"생각한다고 생각하면 잠이 들죠. 꿈속에서 꿈을 꾸면 잠이 깨고."
"자네가 그런 얘길하면 난 말야, 머리 속이 흐물흐물해져. 하지만 정원 일을 생각할 떈 안 그래. 그때는 정원을 보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정말 정원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어떤 사람들은 말로 정원을 가꾸기도 해요. 말을 심고 생각을 수확하는 거죠. 그 반대로 하지고 하고, 이따금은 평범한 말이 빛나는 생각의 열매를 맺을 때도 있어요."-103쪽

"뭐랄까, 기억이 새록새록 새삼스러워져. 여행 동안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사소한 것들이 조금씩 떠올라. 집사람이 즐거워하던 모습, 대수롭지 않은 생각들, 교통편 걱정, 다른 일행과 눈이 마주친 일, 바다와 갈매기, 종려나무를 바라보던 일 등등. 검푸른 그림자들과 노란 햇살이 어른거리는 듯해. 아직도 눈에 얼룰처럼 남아 있어. 처음 봤을 땐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 보인다고 할까? 틀림없이 봤을테지만 이제야 더 선명히 보이는 거야. 그리고 그때 내가 그것을 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127쪽

"속이 상한 게 아니라 나니을 먹으니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 그리고 욕구도 예전 같지 않아. 젊었을 때는 아침이면 세상을 삼킬 수도 있을 것 같았찌. 힘이 남아돌았어. 남아도는 기운을 터뜨리려고, 주체할 수 없는 힘을 억제하려고 허공에다 주먹질을 해대곤 했지. 하지만 이젠 힘이 많지 않아. 필요한 만큼은 있지만 공 만한 돌을 들어도 금방 떨어뜨려 발을 찧을 것만 같아."-202쪽

"가끔 안경이 깨끗할 떄 이렇게 엎드려 있으면 서 있을 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 벌레들이랑 곤충들이 사는 자그마한 것들의 세상이. 가까이서 보면 갈색 반죽 같은 흙이 사실은 자잘한 바위들이란 걸 알 수 있지. 돌, 곤충, 나뭇잎 조각, 온갖 부스러기들,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로 만들어진 그런 세상. 야채들은 이 작은 세상의 것들을 먹고 자라지. 정말 다행스런 것은 사람이 죽으면 흙에 묻힌다는 사실이야...... 인간 비료인 셈이지."-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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