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은 인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알지 못한다. 까마귀는 다른 까마귀의 눈을 파내지 안는다. 어쩌면 까마귀가 사람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10쪽
말테는 손톱을 심하게 물어뜯어 손가락 끝에서 자주 피가 난다. 그럴 때면 얇은 면장갑을 끼고 손목을 끈으로 꽉 묶어 둔다. 대개는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있다.(중략) 나는 사람이 어떻게 피가 날 정도로 손가락을 물어뜯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략) 지금 갑자기 든 생각인데, 어쩌면 그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말테가 왜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14쪽
"세상 어디서든 군대는 제멋대로 행동하지."-40쪽
에를렌호프 김나지움 학생들은 왠지 공모자 집단 같은 인상을 풍겼다. 자기들끼리도 충분히 즐거워서 타인이 끼어들 틈을 전해 내주지 않는.......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공기처럼 보이지 안는 존재였다. 나는 그 아이들이 몹시 부러웠다. 그때부터 간절히 그들 중 한 명이 되고 싶었다.-43쪽
이렇게 많은 이방인을 한꺼번에 가까이에서 보다니, 기분이 무척 묘했다. 아이들은 밀고 당기며 서로 나에게 바짝 다가서려 애썼다. 나는 마치 동물원에서 막 태어난 북극곰 새끼가 된 것 같았다. 아주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모두 나에게 진지하게 관심을 보인 거니까.-58쪽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서로 잔혹한 경쟁을 벌이고 잇었던 것 같다. 나는 왜 그때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내게는 아주 사소한 일이 그 아이들에게는 아주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 아이들에게는 립스틱이나 마스카라 따위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73쪽
나는 온몸이 촉수로 변한 듯 신경이 곤두섰다. 펠리키타스가 또 내 옷을 가지고서 모욕을 주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발걸음을 늦추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몸에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93쪽
나는 여기 소속이 아니라는 생각. 이 아이들에게는 내가 침입자로 보일 거라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면 편하게 놀려도 되는 대상으로 보이든가......-100쪽
어쩌면 나는 이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나는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너무 조바심을 냈던 게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당한 온갖 수모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내가 지금 이 병원에 있어야 할 만큼 그 아이들에게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던가. -104쪽
나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했다. 아무런 해답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와 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너무나 조리에 맞지 않고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137쪽
그때는 그게 '불안' 증세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다시 경멸을 당하고, 날카로운 칼날로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겪을 거라는 불안에 늘 휩싸여 있었는데도......-139쪽
우리 먼지털이....... 속이 메슥거렸다. 그 아이는 쓰레기를 치워 주는 사람을 존중하라는 가정 교육을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149쪽
'나는 이제 끝났어.' 이 생각이 머릿속에 갑자기 떠올랐던 일이 지그도 기억난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그다음에는 별로 끔찍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상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끝이 없는 날들, 몇 주와 몇 달과 몇 해를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상상....... 이대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 고통이 없다. 불안도 없다. 배가 눌리는 느낌도 없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무것도 없다. 끝이다.-273~274쪽
비데만 선생님이 인생이란 '앞으로'만 살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더러 뒤로 살라고 요구하지 않았던가?-305~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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