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여행자 도쿄 김영하 여행자 2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7월
절판


도쿄에선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고 주의 깊게 조절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모든 사물이 마치 행성들이 제 궤도를 따라 공전하듯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219쪽

인간과 인간의 거리만 튜닝된 것이 아니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카페나 식당에서는 가구와 손님 사이의 거리가 절묘하다. 차와 골목의 관계는 또 어떤가? 도쿄의 골목들은 대부분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넓이로 되어 있고 불법 주차가 거의 없다. 길은 좁아도 주차된 차가 없어 보행자가 걷기에 쾌적하다. 도시 전체가 마치 잘 정리된 강박증 환자의 서랍 같다.
이 튜닝은 너무 완벽해서 처음에는 그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냥 뭔가 편안하다고만 느끼게 된다. 거리를 걸을 때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 생각보다 신경이 덜 곤두서고 때로는 내가 여행자라는 사실마저 간혹 잊어버리게 된다. 도쿄에서는 소리와 인간의 관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223쪽

시부야를 보기 전까지의 도쿄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 예전의 나는 국립미술관이 있는 우에노와 전자상가가 있는 아키하바라, 술집과 호텔, 백화점 들이 즐비한 신주쿠 같은 곳을 도쿄라고 생각했다. 시부야를 발견하기 전까지 내가 참고한 가이드북은 [론리 플래닛]이었는데, 이 책은 기본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배낭여행자를 위한 책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도쿄에서 가장 도쿄다운 장소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시부야의 하치코 광장을 들 것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시부야는 여러 개의 지하철 노선이 통과하는 거대한 환승역이며 교통의 중심지이다. -226쪽

많은 도쿄의 여성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시부야에 얼쩡거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시부야는 다이칸야마나 에비스나 시모키타자와 같은 곳으로 가기 위해 잠깐 스쳐지나가는 곳, 소란스런 환승역일 뿐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시부야에는 정말 근사한 서점이 많이 있어요. 좋은 음반 가게와 가장 전위적인 영화를 틀어주는 작은 영화관들이 있지요. 그녀는 '그럴 리가'라는 얼굴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시부야는 분명 소란스런 유흥가이지만 골목골목마다 상당히 근사한 서점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서점들은 도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철저히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기호에 맞는 책과 잡지 들을 보유하고 있다. 츠타야나 리브로, 아오야마북센터 같은 서점들에선 세계적인 잡지와 일본의 수준 높은 사진 집 같은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밖에도 시부야 지역에는 할리데이비슨 전문점이나 특색 있는 청바지 가게,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클럽 같은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234쪽

시부야는 말하자면 유행이 잠깐 머물다 가는 정거장 같은 곳이다. 가장 새로운 것이 덜 새로운 것을 밀어내고 잠깐 불안한 영화를 누린 뒤, 뒤에 도착한 새로운 것에 제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는 곳이다. 그러니까 누구도 시부야를 잘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시부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그리고 깊게 시부야라는 세계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시에 대한 무지, 그것이야말로 여행자가 가진 특권이다.-236쪽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앎에 갇혀 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무지하다.-233쪽

한 번의 여행에서 모든 것을 다 보아버리면 다음 여행이 가난해진다. 언젠가 그 도시에 다시 오고 싶다면 분수에 동전을 던질 게 아니라 볼 것을 남겨놓아야 한다.-237쪽

삿포로와 에비스 브랜드로 생산되고 있는 각종 맥주를 마치 와인이나 코냑처럼 근사한 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시음할 수 있다. 간단한 안주가 무료로 제공된다.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부터 금발의 서양인까지 다양한 인종과 연령의 맥주 숭배자들이 모여 여러 색깔의 맥주를 시음하며 즐거워한다.-241쪽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이 되고자 했던 일본의 정신이 담긴 술, 그것이 바로 생맥주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일들은 독일과 영국의 전통 양조법을 철저하게 연구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담아 내놓아야 할까를 꾸준하게 고민했다. 그런 결과 이제 일본의 생맥주는 독일의 생맥주와 견주어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경지에 올랐다.-244쪽

1934년 일본의 대일본맥주 주식회사는 군수품으로 맥주를 공급하기 위해 한국에 조선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기린맥주 주식회사 역시 소화기린맥주 주식회사를 세웠다. 조선맥주 주식회사가 바로 하이트맥주의 전신이고 소화기린맥주 주식회사는 동양맥주를 거쳐 OB맥주로 지금까지 이어진다.-248쪽

도쿄에서는 많은 것이 대를 이어 살아남지만 또 많은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252쪽

증권거래소 한가운데의 거대한 컴퓨터와 전광판을 보고 있노라면 나처럼 전통적인 인간은 신뢰보다 공포를 더 느낀다. 기업들이 소유한 저 거대한 토지와 건물과 자동차와 사람이 고작 맥주 양조장의 발효통만 한 컴퓨터를 통해 거래된다는 것인가? 그래서 증권거래소가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 견학이라는 제도이다. 옛날 사진들을 복도에 걸어놓고 자신들의 본질이 변치 않았음을 애써 강변하고 있는 형상이다.
현대의 어떤 행위들은 그것의 궁극적 물질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유사한 곤란에 처해 있다. 웹아트를 하는 미술가가 자신이 실은 미켈란젤로나 로댕과 같은 예술가임을 입증해야 하는 문제, 휴대폰 소설을 쓰는 작가가 하이쿠 시인 바쇼와 자신이 같은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256쪽

여행자는 여간해서는 자신이 선택한 책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다시 한번, 이상한 방식으로 떠올리게 된다.-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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