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시부모님이 올라오시고 아가씨네 식구들도 와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술도 한잔씩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올 한해를 어떻게 보낼까 막막했던 연초에 비해 이제는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다.
작년 10월,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시부모님과 합가하게 되었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오른발 하나를 잃을 뻔 했었기에 효심이 지극한 남편은 늘 걱정을 했었고, 뇌경색으로 몸이 불편했던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의 사고로 상심이 컸었던 시기였다. 난 둘째를 낳은지 얼마되지 않았었고, 그때까지만해도 식구들끼리 별 문제없이 살았었다.
시아버지의 사고로 거의 매일 병원을 들르는 남편은 늘 피곤했고 아이를 낳은지 얼마 안된 나는 아이 둘을 보느라 지쳐 있었다. 물론 둘째를 낳기 전에 친정 근처로 이사를 해서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았지만 친정엄마도 아빠와 할머니를 돌보시느라 늘 바쁘셨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사한지 6개월만에 이사를 하고 지금의 집에 살게 되었는데 처음엔 시아버지는 병원에 입원중이라 시어머니만 함께 사셨었고 가끔 아이들과 놀아주시니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편안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큰애가 할머니를 믿고 너무 버릇없게 행동하게 되었고 엄마 말을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었다. 늦은 밤 자기 전에 사탕을 물려주는 할머니 방에 가서 자겠다는 큰애, 처음엔 할머니랑 자는 게 좋은가보다했는데 매일 밤 물려주는 사탕에 그 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고, 장롱 안에 숨겨둔 사탕을 이 집에서 나가시게 되었을 때에 알게 되었었다. 그때의 그 배신감이란......
그러던 어느날 시아버지는 집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 입원을 하셨고 절뚝거리시면서도 활동하게 되시면서 집을 오가기 시작했었다. 집을 오가면서 돈이 필요했던 건지 퇴원을 하고나서 받아도 되는 보험에 열을 내시며 보험가입증서를 달라고 하셨었고 나나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그 보험은 내가 결혼하고 만약을 위해 들어두었던 운전자 보험) 보험료 내준거 때문에 우리가 그 보험금을 안 줄 생각이라며 큰소리가 오고 갔었다. 너무 놀랄 일이었었다. 자연히 시아버지 이름으로 된 보험이니까 퇴원을 하시면 시아버지 통장으로 입금될 거였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아무리 집안의 어른이지만 막말을 서슴지 않고 아이들한테까지 소리를 지르는데 참 많이 난감했었다. 그러면서 이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으시고 늘 어머니를 불러내서 작은 집으로 가셨었다. 아침을 드시고나면 늘 시아버지는 어머니와 평소 앙숙이시던 작은 집으로 가시는 거였다.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고 남편도 화가 많이 나 있었고 중간에서 화해를 시키기도 쉽지가 않았었다. 그때부터 나는 일가친척들에게 나쁜 며느리가 되었다. 시부모 사고난 보험금 가로채고 시부모 시중도 제대로 들지 않아 시부모가 마음 편히 이 집에 있을 수 없어 남의 집을 전전하게 되었다고 크고 작은 행사때 모이는 어른들은 나를 입방아에 올렸었다.
참,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던 걸까? 싶었다. 눈물도 나고 화도 나고 그랬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싸웠는데 그 중간에 내가 나쁜 사람이 되어서 좀 억울하기도 했었다. 그무렵 시부모님들은 애들 고모네 집에도 자주 갔었고 그때부터 고모네도 많은 오해를 했었다. 남편이 먼저 전화를 해야만 연락이 되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행동했었지만 애들 고모는 자기 부모만 생각했었다. 마음 한편으로 서운하긴했지만 당연히 자기 부모가 먼저지 생각하면 이해도 되고 그랬었다.
우리가 합쳐서 산지 8개월만에 시부모님은 시아버지 고향에 내려가서 사시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다들 우리 부부가 시부모님을 모시겠다고 한 이유가 시아버님의 보험금 때문이라고 입방아를 찧었었다. 솔직히 그까짓 돈 얼마나 된다고 그걸 넘 본다는지......얼마되지도 않는 보험금을 생각할만큼 남편이나 내가 파렴치한 인간이 아닌데 친척들은 우리를 아니 나를 그렇게 보았다. 이 모든 건 남편이 아니라 내가 그런 인간이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난 며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시부모님이 너무 원하셔서 낙향을 고집하셨다. 두분이 자유롭게 살고 싶고, 몸도 불편하니 시골에서 평온하게 살고 싶으시다고, 자기가 어릴적부터 살았던 고향에 내려가 사는게 지금의 소원이시라고 하셨었다. 우리 부부는 시골 생활의 불편함을 잘 견디실지 걱정을 했었고 시아버지보다 몸이 더 불편한 시어머니를 생각해서도 다시한번 생각하시길 바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낙향하셔서 잘 사신다. 공기도 좋고 두분이 함께 뭐든 마음대로 하시는게 가장 좋으시단다. 시아버지의 어릴적 친구들도 함께 계시고 마을 분들이 모두 반겨주셔서 잘 살고 계신다고 늘 안심할 수 있는 말을 하신다. 그걸로 연초에 가졌었던 불편했던 마음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예전처럼 돌아왔고 아가씨네와도 다시 좋아졌다.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가 마음으로 서로를 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그건 전적으로 내맘일뿐이다.
올 한해 마음 고생이 심했던 나는, 한가지 분명하게 깨달았던 건, 사람만큼 무서운 동물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런저런 입방아에도 굴하지 않은 나는 분명 얼굴에 철판을 깐 아줌마라는 것이다.
욕을 먹기 전과 욕을 먹던 그때와 욕을 하지 않는 지금도 나는 늘 한결같이 행동한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는 소신껏 행동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