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참으로 나약해지고, 명분과 집단의 광기를 등에 업으면 살인에 조차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믿는 존재인 모양이다. 이 책에서 한 울타리에 살던 이웃-'나'의 가족은 제외하고-을 어느 순간 적으로 돌려버릴 수 있게 만든 것은 그동안 자기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존재해 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독일 경제의 파탄으로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고 싶은 심리를 간파한 국가가 이를 이용한 것이다. 이 점은 집주인인 레쉬씨가 재판정에서 말하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책과 비교의 대상이 되는 '안네의 일기'에서는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비참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이 책에서는 독일인 남자 아이-유대인 박해의 가해자 쪽에 속하는-가 한 유대인 이웃의 수난과 친구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하기까지의 과정을 일인칭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프리드리히와 '나'는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이다. 비록 유대인과 독일인이라는 차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 예전처럼 드러내 놓고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어버리긴 했어도 '나'의 가족들은 프리드리히네 가족을 돕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주인공인 '나'는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유대인 기숙사를 파괴하러 가는 행렬에 휩쓸려 따라 들어가 교실에서 이런 저런 물건들을 부수는 행위를 한다. 이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삼아 하는 일종의 장난일 뿐이지만 그것이 유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아이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슈나이더 씨 집이 폭도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그 와중에 프리드리히의 엄마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한 사람이 죽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그 폭도들을 살인자라고 벌주는 이가 없다니...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의 죽음 앞에서 절규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그저 숨죽여 울 수밖에 없다니... 폭도들, 독일인들, 그들에게는 단지 "당신은 유대인이니까"라는 말이 그들에게 행하는 모든 악행의 면죄부로 여겨졌던 것일까? 마치 이 말은 "너희는 인간이 아니니까"라는 말처럼 여겨졌다. 예수를 메시아라 생각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 유대인... 노이도르프 선생님은 유대인의 고난에 찬 항거의 역사를 들려주시는데, 적어도 그 선생님만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심어주려 애쓴다. "하나의 국가가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긴 했어도 그들도 인간이다." 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남는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의 사정을 헤아려 놀이동산에 가서도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배려하던 호탕하고 당당했던 슈나이더씨가 특별한 이유 없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집이 폭도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는 일들을 겪으면서 점차 약해지고 불안에 떠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에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공포에 질려 대비소로 뛰어 들어왔을 때나 그의 마지막 모습을 앞에 두고 나약함을 보일 수 밖에 없는 아빠와 엄마를 비난할 수가 없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불의를 눈앞에 보고서도 내 목숨, 내 가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 사람의 모습이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이성을 뒤틀리게 하고 마비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과 함께 나는 과연 그 앞에서 당당하고 이성적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고민해 보게 된다. - 뒤쪽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던 1933년부터 독일 제국이 붕괴되는 1945년까지의 기간동안에 유대인 박해에 관한 <연보>가 실려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 제약을 받고 박해를 당했는지 도식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유대인의 종교나 생활과 관련된 것에 대해 따로 주석을 달아 놓고 있는데 뒷쪽에 모아서 실어놓았는지라 책을 읽는 중간 중간에 일일이 찾아보는 것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졌다. 처음부터 주석까지 찾아가며 읽는 것보다는 본문 내용을 다 읽은 다음에 따로 찾아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