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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ㅣ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알게 모르게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이나 성추행에 노출되어 있다. 만원 버스나 지하철안에서 고의로 더듬는 사람, 으슥한 골목길을 따라와 덮치는 사람, 직장 상사나 동료, 이웃 사람, 친척, 의붓아버지 등등……. 그런데 유아든 어른이든 성추행(폭행)을 당한 피해 당사자나 그 가족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을 한 것 마냥 쉬쉬~ 하는 것이 현실이다.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주위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알 수 없는 냉담함, 아이의 미래에 드리워질 어두운 그림자가 무서워서이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죄를 지은 것 마냥 숨기고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암울하다. 그리고 비록 그 피해 사실을 주위에 숨긴다 하더라도 사고를 당한 당사자의 가슴에서 그 사실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는 힘들 것이며,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그 일을 어떻게 여기는지, 당사자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도 큰 영향을 미친다.
<유진과 유진>은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여학생이 어릴 때 유치원 원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각기 다른 기억을 지니게 되기까지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사건이 있었던 무렵의 일을 큰 유진은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던 때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작은 유진에게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은 목욕수건에 아프다고 울다가 엄마에게 뺨을 맞고, 사람들에게 측은한듯하면서도 알 수 없는 눈길을 받은 기억만 있다.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 왜 때려야 했던 것일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몰랐던,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책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내가 제대로 보호를 하지 못해서 자식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런 심정이 아니겠는가 싶다. 속상한 마음에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를 다그치고 화를 전가시키는 것이 오히려 그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그런데 한 사람, 큰 유진은 가족들의 사랑으로 큰 고통 없이 극복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아예 그 사건을 기억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큰 유진과의 만남을 통해 작은 유진도 점차 기억 속에 묻어버렸던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작은 유진이 그 일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기를 강요한 것은 엄마였다. 때리면서, 살갗이 벗겨지도록 아프게 때밀이 수건으로 씻기면서, 잊지 않으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고 협박하면서 작은 유진에게 잊을 것을 강요한 것은 엄마였고, 냉대의 시전으로 대한 것은 주위 가족들이었다. 작은 유진 곁에는 사랑으로 감싸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티에리 르냉이라는 작가가 쓴 <운하의 소녀>라는 작품에서 '사라'라는 여자아이가 지닌 인형에 대해 나온다. 벌거벗겨져 있고, 배에 라이터로 지진 흉터가 있으면 머리카락이 흉하게 잘려져 있는 인형의 모습이야 말로 바로 감추어져 있던 사라의 진정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작은 유진이 인형 목을 자르고 다리를 찢은 것도, 유진이 인터넷으로 찾아 낸 사례에서 나오는 아이가 인형에게 한 행동도 인형을 통해 상처 입은 자신을 나타내고, 자신에게 벌을 주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는지도 모르겠다. 이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인 것을 사람들은 왜 알지 못하고 무조건 덮어서 가리려고만 하는 것일까.
비록 부모가 사랑으로 아이를 다독거려 주었더라도 주위에는 ‘그런 일을 겪은 아이는 문제가 있다’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자신이 나서서 성추행 문제를 해결했으면서 큰 유진을 자신의 아들과 거리를 두게 하려는 견우의 엄마를 탓할 수만은 없지만 이로 인해 큰 유진은 또 한번의 커다란 상처를 입었지 않은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 아이에게는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인데...
요즘도 간간히 유아들을 성추행 또는 성폭행한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곤 한다. 딸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기사를 접할 때면 분노하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늘 불안해한다. 기사나 보도를 접하는 날에는 특히나 더 아이들에게 누가 몸에 손을 대게 하지 말라는 당부를 곱절로 하게 되는 것이다. 제발 아이들을 상대로 한 범죄는 그만 일어났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아닌 주위 여러 사람들의 가슴에 평생을 지고 갈 커다란 상처와 그림자를 안겨주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