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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ㅣ 동화 보물창고 4
구드룬 파우제방 지음, 함미라 옮김, 최혜란 그림 / 보물창고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다섯째날,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빨간 단추를 눌렀다.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고 느낀 것이다.
불길이 지구를 휩싸고 산들이 불타고
바다에서는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와 증발하였다.
-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요르크 친크) 중에서-
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핵탄두를 준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연을 조절하려다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다는 내용의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요르크 친크)'라는 시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갑작스러운 핵 폭발의 위력에 노출된 일가족과 피해지역의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통해 핵 폭발이 우리에게 끼칠 참상과 암울한 미래에 대해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저자가 열세 살 생일을 앞 둔 사내 아이, 롤란트가 화자가 되어 들려 주는 이야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화상 자국을 남기는 핵 폭발후의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강렬하게 가슴을 강타하였으며,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버섯구름에 뒤덮인 것 같았다. 어린이 동화책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도처에 죽음이 만연해 있으나 마지막 희망으로 살아남을 최후의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동서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고는 하나 핵 폭발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들이 닥치고 사람들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채 그 상황에 휘말리고 만다. 강렬한 섬광, 버섯구름, 뜨거운 열기, 강렬한 폭풍, 초토화된 도시, 죽음! 그리고 뒤이어 사람들을 찾아오는 것은 혼란, 생존 본능, 원자병, 전염병 등, 몇 주 동안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도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살 곳을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 간에 벌어지는 냉대, 약탈, 이기주의, 절망…….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절망뿐이었다. 롤란트는 부상자들이 있는 병원에 찾아가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후, 갈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물을 먹여주는 일을 한다. 핵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아기를 임신한 것을 알고 기뻐하는 엄마와 가족들을 보면서 그래도 희망은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건만 그 기대마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죽은 사람을 묻는 것, 계속해서 죽은 사람을 묻는 것이 살아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 날 아침, 나는 내가 살아 남은 사람들에 속하지 않기를 빌었다. 나는 옌스가 누리고 있는 고요함이 부러웠다. (p. 187)
가끔 재난 영화에서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들을 보면 감탄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남을 짓밟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살신성인의 정신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리라. 그렇더라도 이토록 무기력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이나, 죽음보다 차갑고 살벌한 세상이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군인들이 아니라 민간인들, 특히 아이들일 것이다. 아이들은 아무런 잘못도, 선택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부모를 잃고, 굶주림과 추위와 병마에 시달리다 결국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누가 그들에게 이런 삶이 올 것이라고 경고를 해주었던가?
- "비열한 놈! 폭탄이 떨어진 건 당신들 책임이야. 당신들은 아이들이 무슨 일을 겪든지 상관 없었던 거야. 중요한 건 당신들이 편하게 사는 거였지. 지금 당신들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고, 그건 당신들이 벌인 일이야. 하지만 우리까지 불행에 빠뜨렸어! 뒈져버려라!" (p. 144)
음식을 훔친 아이들에게 시내에 나타나기만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펄펄 뛰는 리핀스키씨를 향해 소리치던 안드레아스가 지하실 벽에 쓴 "천벌 받을 부모들!"란 글귀는 바로 우리 어른들을 향한 절규이다.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던 아빠에게 "당신은 살인자!"라고 소리를 지른 남자 아이를 탓할 수만은 없으리라. 그러나 추위에 떨며 삼 일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안드레아스의 유모차를 온 힘을 다해 밀어 줄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롤란트를 과연 살인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롤란트가 최후에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들은 오래전부터 우리 어른들이 가슴 깊이 새겼어야 할 것들이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는 변명으로는 우리 아이들을 폐허더미로 내몬 살인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면할 수 없다. 이것이 어린이 동화책이긴 하나 읽어보아야 할 대상에 어른을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