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단어 정리할 새 노트를 찾다가 우연히 남편의 옛날 일기를 훔쳐봤다.
글이라곤 결혼전 편지가 끝인줄 알았던 남편이 일기라는 걸 썼던 시절은 군대에 있을 때. 아무 생각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인간이 일기란걸 쓴 걸 보면 군대란 곳은 정말 모두에게 힘든 곳인가보다.

사생활 존중차원에서 남의 일기 읽으면 안되는 줄 알지만, 그래도 궁금한건 어쩔 수 없어 모두 읽지는 않고 몇 편만 읽어보았다. 그런데.... 군생활의 어려움과 더불어 남편을 괴롭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바로 나였다.
전화 안했다고 성질내고, 약속시간에 늦었다고 집에 그냥 가 버리고.... 못된 짓을 한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늘 여유만만이라고 생각했던 남편도 군에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몹시 힘들어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그 미래를 위협하는 중심에는 바로 내가 있었으니. 한참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는 커녕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니 미안한 맘이 너무 크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일로 뒤늦게 후회를 하다니. 

근데 생각해보면 나도 그 때 꽤 힘들었던 것 같다. 동갑내기 남자를 사귀어 나는 취직을 했는데,  남자친구는 아직 뭘 할지도 결정을 못했고,  빨리 결혼하고 싶었는데 남자친구는 결혼은 부담스러워 하고. 게다가 연애시절에 흔히 겪는 소모적인 감정의 줄다리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왜 그 지럴을 했나 싶은데 그게 지나고 나야 보이는 거지 그 감정의 한복판에선 깨닫기 어려운 일 아닌가.

솔직히 나더러 다시 그 때로 돌아가 연애를 하라면 손을 내저을 거 같다. 그 줄다리기에 소모한 에너지며 시간을 다른 공부하는데 투자했더라면 내가 지금 요모양 요꼴은 아닐텐데 싶을 정도이니. 그것도 다 한때 겪는 소중한 과거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난 차라리 서른이 지난 지금 연애를 해도 하고 싶다. 유치하지 않고 쿨하게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 대 성인으로 말이다.

그래서 결론이 이상한데로 빠지고 있지만, 가끔은 결혼이란 걸 좀 늦게 할 걸 그랬나 싶을 때가 있다. 서른에는 서른의 사랑을, 마흔에는 마흔의 사랑을 가져보고 싶다.  사랑이란 걸 다시 하고 싶다니 난 참 지치지도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도 사랑이란 건 갑자기 무의미한 일상을 신비롭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 말이다. 재정적 여유에 부모로부터 간섭받을 일도 없는 서른, 마흔의 사랑은 스무살 어릴 적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있는 남편을 도루 물릴 수도 없는 일이니, 스무살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숙된 감정의 지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살 수 밖에. 이젠 나도 남편의 골칫거리가 아니라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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