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기상, 샤워.

8시 아침식사. 역시 호텔 뷔페를 즐김. 어제 본 한국인 남자교사 무리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나타나 전세놓은 듯 큰 목소리로 떠든다. 아 정말 싫다... 한국인도 싫고, 남자도 싫고, 교사도 싫다....가서 입을 틀어먹아 주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넘겼다. 도대체 왜 그렇게 떠드냔 말이다!!!

9시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 마지막 날에는 투어 일정이 없어 온전히 자유로운 날이라 호텔 수영장에 갔다. 5층에 있는 야외 수영장은 수영장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크기였으나 햇빛도 직접 내리 쬐지 않고 사람도 없어서 너무 좋았다. 둘이서 수영장 하나를 전세내고 신나게 놀았다. 남편에게 턴을 가르쳐 주었더니 금새 익혀 나보다 턴을 더 잘하게 되었다. 턴하는 것만 보면 수영선수 같이 멋있다. 햇빛아래 그렇게 여유롭게 수영을 즐긴건 머리털 나서 처음인거 같다. 한국에서라면 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이렇게 여유롭게 즐기진 못할텐데. 싱가폴 여행에서 가장 잊지 못할 추억으로 꼽을 만큼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체크 아웃 시간이 다가와서 1시간 정도밖에 수영을 즐길 수 없었다.

11시 호텔 체크 아웃. 짐가방을 호텔에 맡겨 두고 본격적인 쇼핑에 나서다. 먼저 시청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쇼핑센터를 둘러보았다. 에스쁘리에서 분홍색 민소매 티셔츠를 사고 막스앤 스펜서에서 초코 쿠키와 과일차를 샀다. 싱가폴에서 막스 앤 스펜서라니 좀 엉뚱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싱가폴은 작은 나라라 그런지 자국 제조업이 거의 없는 듯 했다. 거의 외국 유명브랜드로 채워진 상점들. 한국의 백화점과 다를 바가 없어 조금 실망스러웠다. 여기까지 와서도 샤넬이며 리바이스를 봐야 하다니. 게다가 냉방시설 때문인지 상점이 모두 아케이드에 입점해 있어서 상점구경하는 재미도 덜했다. 다만 그렇게 아케이드 식으로 되어 있으니 냉방이 효율적이고 무엇보다도 실외기가 하나도 없어서 거리가 보기에도 좋고, 쾌적했다.

시청역 쇼핑을 끝낸 후 그 유명한 오차드 로드에 갔다. 하지만, 오차드 로드는 더욱 현대적인 쇼핑몰로 이루어져 더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명품 쇼핑할 거 아니면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거리. 그래도 유명한 곳이니 여기 저기 돌아다니려는데 인도언니에게 딱 걸려 무슨 엉터리 같은 설문하나 하고, 경품을 줬는데 그게 사기였다!!! 7일간 외국 어디서나 묵을 수 있는 숙박권에 당첨되었는데 알고 보니 사무실로 따라가서 무얼 해달라는 거였다. 우리가 얼마나 멍청해보이면 여기까지 와서 이런 사기를 당하나.... 됐다고 거절하고 돌아서는데 영 기분 별로였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역시 번화가에는 사기꾼들이 있다.

싱가폴 젋은 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는 퓨전 음식점에서 국수를 먹었는데, 우리나라 베트남 음식점에서 먹는 음식이랑 거의 비슷했다. 퓨전이라 그런지 향료 냄새도 강하지 않아 먹을만 하긴 했지만 그다지 특이한 음식은 아니었다. 싱가폴에 오면 맛있는 음식 잔뜩 먹을 줄 알았는데, 베트남식 국수 아니면 서양음식 뿐이다. 여기까지 와서 스파게티 먹을 일 있는가.... 시간도 짧고 잘 찾아다니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음식은 실망이었다.

쇼핑센터 이층에서 비싸고 맛없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싱가폴 항공사에서 운영하는 홉온 버스를 타고 부기스 정션으로 이동하다. 부기스 정션에는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재래시장이 있는데 한국의 보통 재래시장과 거의 비슷하다. 거기서 남편은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불량음료수를 마셨다. 텔레비젼에서 본적이있는 지라 재미있었다. 시장 출구쪽에는 과일가게가 있었다. 거의 관광객을 상대하는 곳으로 두리안, 망고 등 열대과일을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도 빠질 수 없어 두리안을 맛봤는데..... 누가 두리안을 보고 과일의 왕이라 했는지. 그 역겨운 냄새, 역겨운 맛. 돈주고 샀으니 억지로 먹긴 했는데, 아주 죽는 줄 알았다. 그렇게 역겹고 찝찔한 과일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영양가가 많다고 하기 하는데, 난 두번 다시 먹고 싶지 않았다. 늙어서 그런지 과일도 우리게 최고야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두리안을 먹고 커다란 망고 한개와 배 두개를 샀다. 나중에 저녁 먹고 디저트로 먹기 위해서.

부기스 정션까지 돌아다녀도 적당히 사고 싶은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다. 힘은 힘대로 빼고 물건도 못사고 나니 슬슬 짜증이 나는데, 저녁 먹으로 싱가폴 강으로 가는 길에 택시를 잡지 못해 남편과 말다툼까지 벌였다. 내가 왜 이러나.... 우리 남편은 알아서 척척하는 스타일이 아닌거 뻔히 알면서도 남편에게서 한기주 같은 모습을 자꾸 기대하려 하다니. 남편이 한기주가 아니면 내가 한기주처럼 하면 되는데, 그러지도 못하면서 짜증내는 내 모습이 참 싫었다. 여하튼 택시 타고 Boat Quay로 가서 안내책자에 나온 핫스톤을 찾아갔다. 강가에 앉아 뜨거운 돌위의 스테이크와 해산물을 먹으며 싱가폴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즐겼다. 솔직히 특별히 맛있는건 아니었으나 그 정취를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없어서 과일도 못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8시 30분. 10분에 오기로 되어있었던 망할놈의 버스가 30분이 넘어서 왔다. 싱가폴 타임이라고 웃기시네. 운전기사는 변명 한 마디 없다. 마지막 가는 길에 이렇게 인상을 구기다니.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싱가폴의 모습을 눈속에 열심히 담았다. 이제 이렇게 가는구나. 공항에 도착해 서둘러 아까 산 과일을 먹어치웠다. 농산물이라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못먹으면 버리고 가야 한다. 가지고 갔던 맥가이버 칼로 공항 의자에 앉아 과일을 먹었는데, 큰 망고는 우리가 한국에서 먹던 작은 망과와는 맛이 많이 달랐고, 결정적으로 맛이 없었다. 우리나라 배처럼 생긴 과일도 돌배수준이었고. 그냥 작은 망고나 먹을 것을. 그래도 맛봤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과일먹고 짐 정리하고, 씻고 티켓 체크인을 한 후 다시 쇼핑에 돌입. 세상에 태어나서 아침부터 밤까지 쇼핑하러 돌아다닌 것두 처음인거 같다. 공항에서 급한대로 초컬릿을 사고, 면세점에 가서 아빠 술 사고. 그 넓디 넓은 면세점을 돌아다니다 보니 또 시간이 금새다. 그 와중에 공짜 인터넷을 발견하여 모닝스페셜에 글도 남기고. 그러나 결국 동전남은 것을 어찌 처리할까 문제로 남편과 언쟁을 벌였다. 남편은 뭔가 재미있는걸 사자고 하고 난 그냥 초컬릿이나 사자고 하고. 서로 무자게 짜증내다가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비행기 시간에도 늦어 비행기 이륙15분을 남겨두고 탑승 게이트로 뛰어가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였다.  그러고 보니 나와 남편의 첫 해외여행 아닌가. 그런 의견 충돌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무거운 동전과 더할나위없이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해 편안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버스타고 돌아다니는 어설픈 투어관광에 쇼핑도 제대로 못하고 다리만 아픈 여행이었지만, 이번이 처음 아닌가. 앞으로 우리에게는 무궁무진한 시간이 있고. 아쉬움이 많지만 다음 여행은 이보다 더 행복하고 재미있으리라. 또 내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한비야 말대로 여행은 돌아갈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서울로 향하면서 내가 서울로 돌아가고 있단 사실이, 우리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단 사실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한국시각 6시 50분.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정겨운 풍경들. 한국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맘이 따뜻하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짧은 첫 해외여행이 끝이 났다. 되돌아보니 그저 그리운 시간들이다. 겨울방학을 기약하며, 나의 여행기도 여기서 줄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스마일hk 2004-08-26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재미있다.
잘 읽었어요~

앞으로는 자네가 한기주처럼 잘 하세요. 남편한테 잔소리 하지 말고... ^ ^

여행의 마지막에는 역시나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에요. 정말 그렇지요.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낯익은 풍경들을 바라보는 그 뿌듯함도 역시요... ^ ^

아. 왜 갑자기 내 마음이 이리 따뜻해지는 걸까요...
나도 작은 곳에서 감사할 만한 많은 것들을 찾아가며 살아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