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당신에게 - 내 몫이 아닌 비합리적 죄책감과 이별하기
일자 샌드 지음, 정지현 옮김 / 타인의사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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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당신에게

일자 샌드 (지음) | 정지현 (옮김) | 타인의사유 (펴냄)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당신에게 필요한 심리학 수업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당신에게> 표지글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도를 넘는 반성이 자기 비하로 이어지는 사람도 있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자해로 이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비난을 겸손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죄책감은 자신이 행했거나 행하지 않은 행동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우리"라는 공동 연대의식의 문화가 깊은 우리에게는 타인의 잘못도 함께 죄책감을 느끼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위로와 응원이면 충분한 문제에도 내 몫이 아닌 죄책감까지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본인의 책임이 분명한데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남탓을 하거나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되려 더 큰소리를 치고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도 있다. 분노라는 감정은 분명히 표출되어야 하는 인간의 정상적인 감정이지만 잘못된 방법과 방향은 분노조절장애와 자기 비판이 되기 쉽다.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나는 내 잘못이 아니었거나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조차도 내 탓으로 돌려 죄책감과 자기 비난을 해왔다. 그러면서 자존감은 낮아지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벗어나기 힘든 악순환을 해왔던 것 같다. 이런 나의 감정, 죄책감을 이용한 가스라이팅은 기대서는 안될 사람에게 기대고 의지하게 되는 또 하나의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자칫 혼동하기 쉽지만 전혀 다르다. 죄책감은 행동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고 수치심은 부끄럽거나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유대인 학살과 세계대전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사죄하는 독일이 죄책감의 문화라면, 그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들키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일본의 문화는 수치심의 문화라 할 수 있다. 죄책감은 잘못이 있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있는 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필요이상의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 자신은 책임과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이루어지는 가스라이팅은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을 상대로 하면 생각만해도 끔찍만 뫼비우스의 띠가 되고 만다. 아마도 가장 흔한 케이스가 부모자식간에 이루어지는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는데..." 은근 슬쩍 피해자, 약자로 자신을 둔갑시키고 상대에게 죄책감을 씌우고 마는.

느껴야할 내 몫의 죄책감마저 내려놓으란 얘기가 아니다. 내 몫이 아닌 죄책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비합리적 죄책감으로 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말이다. 긍정적인 삶의 원칙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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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는 거, 습관이시죠? - 제멋대로 선을 넘나드는 사람들과 안전거리 지키는 법
서제학 지음, 봄쏙 그림 / 필름(Feelm)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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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는 거, 습관이시죠?

 

봄쏙 서제학 (글 그림) | 필름 (펴냄)

 

 

 

 

 

 

 

주위에 프로 불편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조금은 손해보는 듯 살고,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가자 마음 먹지만 자로 잰듯이 선을 그어대는 사람도 있고 자기쪽으로 넘어오는 선은 철저하게 지키면서 남의 선은 시도때도 없이 정을 호소하며 넘나드는 사람도 있다. 보통 이런 이들을 얌체라고 뭉뜽그려 얘기한다.

 

어른이 되고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만남과 또 그만큼 많은 헤어짐을 하며 인연을 더하고 빼왔다. 사람을 골라가며 관계를 맺을 수는 없지만 "진상과 관종만큼은 절대로 피하자"가 나름의 원칙으로 굳어졌다. 그렇지만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물처럼 얽히는 관계 중에는 피할 수 없는 관계도 있다. 그런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동네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려 노력하지만 아주 가끔은 목줄을 끊고 뛰쳐나와 물기까지 하는 경우도 더러 있어 한 번씩 무너지는 멘탈을 추스리기 힘들 때도 있다.

 

 

 

자존감이나 관계에 대한 많은 자기계발서와 처세술에 관한 도서들을 읽어봤지만 이렇게 내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은 없었다. 철학자나 전문가, 심리학자들이 읊어대는 뻔하고 비슷비슷한 처방들은 책 속에 활자로만 자리할 뿐 내게 직접적으로 와닿기에는 너무 멀고 입에 발린 소리들 뿐이었다. 책과 일상 사이의 괴리감이 손에서 책을 놓는 순간 점점 더 커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선 넘는 거 습관이시죠?"는 실제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는 저자의 경험에 나의 경험이 겹치면서 공감 백퍼센트를 느끼게 되고 학술적인 용어나 어렵게 돌려 말해 멋있어 보이려는 노력없이 더 가깝게 더 나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정말 힘들때 다시 꺼내보고 싶은 책이다. 유머스럽게 쓰여졌지만 우습지 않고 무겁게 쓰여지지 않았지만 결코 가볍진 않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는 상저와 고통을 교통사고와 비교하고 빗대어 고통사고라고 표현하고 그에 따른 대처법을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해 놓으니 그 기발함이 재미도 있으면서 이해도 쉬웠다.

 

멋있고 깊이가 있어야만 명언인가? 내 삶에 녹아 나를 변화시키는 문장이라면 그게 명언이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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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사진에세이 3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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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박노해 사진 에세이

박노해 (글 사진) | 느린걸음 (펴냄)

볼만한 프로그램이 있나하고 가끔 케이블 채널을 무심코 돌리다보면 자주 보이는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다.

자연인이라 불리는 매 회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산 속으로 무인도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살아간다.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은 인생의 길을 잃은걸까? 속세의 사람들 눈에는 초라하기만 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빛은 그 누구보다 맑고 밝다.

약초를 캐러 산등성이를 오르는 그들은 길이 아닌 비탈을 날다람쥐보다 재빠르게 오르내리고 길이 익숙한 재작진들은 힘들어 한다. 각자가 정의하는 길의 모습이 다른 것이다. 내 길만이 옳고 유일한 길은 아닌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길. 박노해 사진 에세이 중에서

도심 한복판에서 길을 잃으면 당황하고 놀라서 허둥댄다. 하물며 인생에서 길을 잃는다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꼭 하나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처음 걷는 자가 될 수도 있다. 그 길에서 보고 듣는 것이 무엇이 될진 알 수 없지만 조금 더디 가게 되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겠지.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도태되고 낙오되는 것만 같은 불안감에 같은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노력은 필요없는 경쟁을 불러오기도 한다.

백명의 사람이 백개의 방향으로 뛰면 모두가 일등. 그러나 우리는 한 길만을 고집하며 양 쪽의 낭떠러지 길에서 서로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빨리 가는 것만이 최고라고 여겨 굽은 길을 펴고 좁은 길을 넓히는 와중에 가꾸고 지켜야할 작은 것들을 파괴하지는 않았나. 출세와 성공을 향하는 길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없었을까? 빨리빨리에 지쳐버린 요즘은 길 자체에 집중하며 천천히 걷는 올레길이 인기다. 혼자 뛰는 전력질주보다 함께 걷는데 더 의미가 깊어지는 요즘이다.

혼자서는 갈 수 없다. 웃으며 가는 길이라도.

함께라면 갈 수 있다. 눈물로 가는 길이라도.

박노해 사진 에세이. 길 120페이지

세상의 많은 길 중에서 좋은 길은 어떤 길일까?

그 길의 끝에 안식을 취할 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길이 험난하고 고달프더라도 과정에서 겪는 고생은 축복이 될 것이고, 뒤에서 나를 응원하는 이들과 사랑이 있다면 짊어지고 있는 것은 짐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길을 만든다. 모두를 위한 길, 나만을 위한 길, 미지의 곳으로 향하는 길, 돌아갈 곳으로 향하는 길. 그러나 이러한 길을 단절하고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키는 것도 사람이다.

삶이라는 길 위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자신을 체험한다. 이런 경험과 체험에서 깨달음을 얻고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같은 경험을 하고서도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이라던데, 나는 그 길의 어디쯤 와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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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박노해 사진에세이 1
박노해 지음, 안선재(안토니 수사) 옮김 / 느린걸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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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박노해 사진 에세이

박노해 (글 사진) | 느린걸음 (펴냄)

하루하루를 제때제때 다 살아야 삶이 아닌가요.

박노해 사진 에세이 <하루> 본문 중에서

희안하다.

하루라는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단어는 유독 짠하고 울림이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루라는 시간은 살아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자와 일을 하기 위해 먹는 자, 마음가짐에 따라 주어진 조건은 때론 행복이 되고 때로는 고난이 된다. 오늘 대충 살아도 내일 다시 반복될 하루라고 여기고 성의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하루는 매일매일 새 날인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의 하루와는 다를수 밖에 없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내가 해 온 선택들의 결과라고 한다. 그 선택들의 도화지가 되었던 수많은 하루들. 지구의 반대편 혹은 바로 나의 옆, 다른 이들의 하루와 나의 하루를 비교하며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독서였다.

가진 것이 없고 가난하면 행복할 수 없다는 편견. 그래서 사람들은 더 벌기 위해 더 갖기 위해 오늘이라는 하루를 인내하고 희생하고 포기한다. 하루를 살아가는 주체인 '나'를 소외시키면서.

하지만 박노해 님의 카메라에 담긴 다른 이들의 하루는 다르다. 평범과 일상이라는 소박함을 담고 있지만 현대인들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만족과 행복, 평안이 느껴졌다.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삶은 많지만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삶은 많지 않다. 흔히들 최선을 다하는 삶은 참고 버티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마음가짐이 뒤따른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내 것을 너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함께 나누면서 함께 누리고 함께 행복하면 되는 것을, 보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은 포기하면서 작은 것들에서 오는 행복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삶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루를 포기하는 삶에 미래의 하루하루는 과연 내 뜻대로내 꿈대로 되어줄까?

누군가에게는 지루함으로 가득찬 하루, 누군가에게는 24시간으로는 짧기만 한 하루.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인 오늘을 살아가며 '의미'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욕심과 만족이 꼭 물질적인 것에만 있지는 않다.

오늘 나는 나의 하루를 의미있게 살아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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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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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펴냄)

한 해 한 해가 더해져 나이가 들어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이제 오십대의 문턱에 가까이 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때로는 본 만큼 알기도 한다. 세상사 이치도 그러하지만 고전문학을 읽을때 그러함을 종종 느끼곤 한다. 같은 책을 읽고서도 이십대의 나와 삼십대의 나, 사십대의 내가 느끼는 감상은 포인트도 깊이도 다르다. 아마도 켜켜이 쌓인 경험의 두께와 무게만큼 책 속 등장인물들의 삶에 이입되는 크기도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리고 부끄럽게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서야 처음 만났다. 어려울거란 선입견과 주제의 무거움에 쉽게 다가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시작으로 가난한 사람들, 백야, 여러 단편들을 정독하며 도스토옙스키의 정신세계와 철학, 그의 인생까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좋은 작품을 읽게 되면 그 책을 인생책으로 마음에 담기도 하지만 그 작가에 대해서까지 알아보고자 하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를 '도끼옹'이라 친근하게 부르며 존경심을 담아 지금까지 사랑해오고 있다. 이런 애정이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도스토옙스키 명장면 200>과 같은 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도스토옙스키. 그의 작품 속에서 빛나는 명문장, 명장면이 내가 꼽은 것과 다른 사람들이 꼽은 것은 과연 다를까, 같을까?

저자인 석영중 님이 머리말에 밝혀두신대로 맥락에서 뚝 떼어 낸 대사와 장면을 설명하거나 해설하면 소설을 읽을 때의 감동은 잘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 인생에 대입해서 읽어보면 그 깊이만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줄거리에 집중하며 읽었던 소설 읽기와는 달리 문장 하나하나에 돋보기를 대고 보는 것처럼 말이다. 무심하게 읽고 넘겼던 문장들에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독서였다. '아! 이래서 읽고 토론하는 거구나'하는 또 한 번의 깨달음. 코로나19로 오프라인 토론이 여의치 않기에 이런 독서가 더 의미있게 다가왔다.

불안, 고립, 권태, 권력, 고통, 모순, 읽고 쓰기, 아름다움, 삶, 사랑, 용서, 기쁨 12개의 주제로 나누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삶이라는 큰 틀안에서 그의 철학과 내면을 얘기해주고 있다. 가장 공감이 많이 되는 부분은 불안에 관한 파트였다. 공감되거나 깨달음을 주는 부분에 인덱스를 붙이다가 웃음이 났다. 매 페이지마다 붙여야할 지경이니!

솔직히 말하자면 인덱스를 붙인 부분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 인용된 문장들보다 저자인 석영중 님의 해석과 해설, 생각들이 더 많았다. 덕분에 어려웠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한 작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연구가 철학자를 연상시킬만큼의 성장으로 이어지신 듯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어렵다고 호소 아닌 호소를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분들이 읽으면 좋을 <도스토옙스키 명장면 200>. 이제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더이상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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