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8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미의 이름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펴냄)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려보면 <장미의 이름>은 처음 출판되었을때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꽤 인기가 있었던 책으로 기억된다.

표지의 그림은 같은 컨셉을 유지하며 매번 개정되면서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장미의 이름>. 첫 개역판이 1992년에 나왔으니 내가 장미의 이름을 처음 읽었던 때도 그 무렵 이었을거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책을 읽는 것에만 의미를 두고 따로 기록을 남기거나 메모하지 않아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연쇄 살인의 범인과 살인의 이유 그 두가지 뿐이었다. 추리소설로만 <장미의 이름>을 읽는다면 재독을 의미없게 만드는 맥빠지는 기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미의 이름>은 추리소설로만 읽기에는 그 안에 담긴 종교적인 철학과 세계관이 남다르다. 아마도 움베르토 에코만이 그려내는 분위기 때문이지 아닐까.

영화든 소설이든 결말을 알고 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역시 이번 재독에서도 "누가 그랬을까?" 보다 "왜 그랬을까?"를 더 꼼꼼하게 보게 되었다. 무심한 듯 건네는 대사 한 줄과 상황설명은 결말부분에 이르러서야 감탄하게 만드는 용의주도한 복선들이다.

그 어느 곳보다 신성해야하고 경건해야할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적인 죽음. 셜록홈즈와 왓슨을 연상하게 만드는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의 케미가 양념처럼 버무려져 살인 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큰 줄기를 가지고 있지만 수도원 안에서 벌어지는 힘겨루기와 부정들을 통해 종교와 신앙, 종교인의 자질에 대한 비판을 움베르토 에코만의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연이은 불가사의한 죽음을 요한의 묵시록과 연결지어 종교적인 예언으로 흐르는 듯 싶다가 여러 가설들을 세워 결국 사건 해결에 한 걸음씩 다가선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수도사와 수도원의 비리와 부패는 종교가 가지는 순기능과 종교의 의미에 대해 되짚어보게 한다. 지금의 종교는 어떠한지, 종교인들은 어떠한지.

이유를 알 수 없던 수도사들의 죽음은 어떤 물건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의 산물이었다. 결국 장서관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모두 죽게되는 결말을 맞는다.

장서관의 비밀. 한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을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지만 형제라 부르던 사람들의 목숨을 앗을만큼 꼭 지켜야만 하는 중요한 비밀이었나. 충동적, 우발적 살인이 아닌 오랜시간 계획해 온 살의에 더 소름이 끼친다.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일에는 살인마저 정당화 될 수 있는 일인지, 잘못된 신념과 믿음은 그 자체로도 흉기가 될 수 있음을 보았다. 그것이 꼭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나만이 옳다고 여기는 자만은 어디서 오는걸까? 대선을 하루 앞둔 오늘, <장미의 이름>과 티비로 보는 선거 운동에서 묘하게 비슷한 공통점이 보여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다 인류 - 인류의 위대한 여정, 글로벌 해양사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다 인류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세상에는 넘치고도 또 넘칠만큼 많은 책이 있다.

그 중에서 좋은 책, 읽고 싶은 책을 고르고 선택하는 재미 또한 놓치고 싶지 않은 즐거움 중 하나다. 그냥 단순히 읽고 싶은 책인 경우도 있고, 소장하고 싶은 책인 경우도 있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지만.

제목만 보고 반해버린 <바다 인류>가 딱 그런 케이스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오~!! 결코 다 안다는 얘기는 아니다. 좋아할 뿐이다. )는 소설 읽듯이 역사 읽기를 즐기는 편이다. 지식으로 접근해 무조건 외우려고만 들면 또 한없이 어렵고 지루해지는게 역사 아닌가.

알고 있었던 사실은 읽음으로써 잊지 않고 기억 저장소에 유효기간을 늘리고, 몰랐던 사실은 새로운 앎을 더 늘렸다는 재미를 느끼면서 그저 즐긴다. 땅 위의 역사를 저술한 역사서는 많은데 비해서 바다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역사는 어떤 이야기를 주로 들려줄지 기대라는 말로는 부족하게 흥분된 마음으로 시작했다. 시각의 다양화, 여러 관점에서의 해석은 통합과 융합, 글로벌화를 강조하는 요즘의 트렌드와도 딱이지 않은가.

한뼘의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피흘리는 전쟁의 역사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어 오지 않았을까?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고대 인류의 이동. 지구 표면은 대륙보다 바다가 더 넓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왜 이동의 경로를 대륙에 한정해서 상상하고 추론해왔을까? 빙하기시대를 전후로 하는 해수면의 높낮이는 그 이동에 분명히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겠지만, (물 위를 걷는 초능력자들이 아닌게 분명한) 고대 인류들이 그 먼 거리를 바다로 이동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들의 지능과 기술은 원시인이라고 낮춰 볼 것만은 아니다. 근현대사 산업의 발달도 강이나 바다의 운송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독 고대사에 있어서는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땅 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바다 위에서의 역사도 만만치 않은 치열함과 아픔의 역사가 있어왔다. 정복을 위한 뱃길로 많은 무기와 군사, 노예들을 실어왔다.

정복 전쟁을 통해 생겨난 제국과 식민지. 그 역사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더 가슴아프게 읽혔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바다의 역사에 정복과 약탈만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상업의 발달이 가져온 무역도 바다가 있기에 더 활발했다. 바다를 통한 무역은 지금 현재도 진행형이다. 세계적 팬더믹인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하늘길과 육로를 통한 무역보다 해로를 이용한 무역이 훨씬 더 방대하다. 이런 무역의 발달에 종교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참 흥미로웠다. 상업이 발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살생을 금하는 종교의 이유가 크다고 하니 이런 것을 두고 나비효과라 하지 않을까?

살생금지의 교리는 목축업과 농업에 종사할 수 없게 만들어 상업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고 이어지는 연속된 결과가 해로의 발전이라니, 역사는 알면 알수록 신비하고 재미있는 도미노다.

육지의 자원이 고갈되어 갈수록 해양자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독도를 노리는 저들의 시커먼 속내가 단순히 돌섬인 독도를 노리는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안다. 바다 위 국경을 시시때때로 침범하는 북서쪽의 저들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미래와 희망이 바다에 있다는 사실은 한 뼘의 땅만큼이나 한 뼘의 바다에도 치열함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1 : 여성과 공포 - 전5권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도러시 매카들 지음, 이나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1

내노라하는 각 출판사마다 세계문학전집이 있다.

유아용, 학습용, 청소년용, 그리고 성인을 위한 완역판까지 그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세계문학 중에서도 고전문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더라도 재독, 삼독 거듭해서 읽으며 소장의 기쁨까지 누리기도 한다. 책 덕후들에게 소장의 기쁨은 결코 작지 않다. 나도 이미 여러 버전의 세계문학전집을 모으고 있다.

이번에 휴머니스트에서 세계문학전집을 출판한다는 얘기에 참 반갑고 기뻤다.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시즌1의 주제는 "여성과 공포"다.

이미 여러번 읽었던 프랑켄슈타인이 포함되어 있다. 번역을 달리해서 읽는 재미는 아는 사람만 알테지만 그 즐거움을 또 한번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 초역의 작품도 있어서 누구보다 빨리 먼저 읽는다는 기쁨을 더할 수 있었다. 시즌1의 다섯 권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고 강렬했던 도서는 <회색여인>이다. 안 읽었으면 어쩔뻔? 이 책은 무조건 엄지 척, 별 다섯개다.

4개월마다 출시된다는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다음 시즌이 벌써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켄슈타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
메리 셸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 (옮김) | 휴머니스트 (펴냄)

어려서부터 공포 덕후였다면 아니 굳이 공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대다수 많은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을 영화나 뮤지컬, 하다못해 어린 시절 동화책으로라도 몇번씩은 접해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너무나도 유명하고 유명한 <프랑켄슈타인>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영화인들에 의해 재해석되며 여러 버전으로 영화화 되었던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가 열 여덟살에 썼다는 과학과 공포가 콜라보 된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성인이 되어 완역의 소설로 다시 읽으니 단순 공포소설이 아닌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200년 전의 열 여덟살 소녀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모두들 꿈을 꾸지만 메리 셸리는 꿈을 글로 옮겨 문학으로 탄생시켰고, 그 소설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창조의 꿈을, 괴물로 불렸던 한 생명은 사랑받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우리는 새 생명을 잉태하면 태명을 지어 부른다.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소중한 존재로 축복받는 생명들과는 달리, 흉측한 외모때문에 사람들에게 괴물로 불리며 거부당하는 그에게는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름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는 괴물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내면마저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펠릭스의 헛간에 숨어 살며 그 가족들을 몰래 지켜보고 남몰래 도움의 손길도 뻗칠줄 아는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삶을 살고 싶었던 그가 사람들에게 보낸 선행과 친절은 언제나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원했던 건 작은 친절과 사랑, 공감일 뿐이었는데, 흉측한 외모때문에 괴물로 정의된 그는 진짜 괴물이 되어갔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탄생이었음에도 창조자에게서조차 거부당한 그의 심경은 부모에게 버림받고 거부당한 아이의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

자신을 만든 창조자로부터 버림받은 괴물과 그 괴물에게 사랑하는 이를 모두 잃은 프랑켄슈타인, 이 불행은 누구의 잘못인가. 외모만을 보고 그를 괴물로 정의내린 인간들과 외로움이 뒤틀려 살인자가 되어버린 이름조차 없는 그 중에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과학과 지식에 대한 열망으로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결과는 '프랑켄슈타인' 주변사람들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뤘다. 자신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태어남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죽음은 자신의 의지로, 방법 또한 본인의 선택으로 그는 끝내 이름없이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마지막까지도 괴물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후회만이 있을 뿐, 그를 버린 것에 대한 후회나 반성, 연민은 끝까지 볼 수 없다. 그런 감정들 마저도 동류의 인간들에게만 느껴야 하는 것일까?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그토록 철저한 버림을 받지 않았더라면 무명의 그가 내면마저 괴물로 변하는 일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단 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온정을 보였더라면 내면마저 괴물로 변하는 그런 삶이 되었을까? 과연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과거의 소설 속이 아닌 지금의 현실에서 누군가를 행동보다 외모, 피부색, 국적, 배경 등을 이유로 '우리'라는 울타리에서 밀어낸 적이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누가 진짜 괴물인지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대받지 못한 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5
도러시 매카들 지음, 이나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대받지 못한 자

도러시 매카들 (지음) | 이나경 (옮김) | 휴머니스트 (펴냄)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공포의 존재는 솔직히 우리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다. 우리에게 공포는 '한'이라는 민족적 정서와 연결되며 그 한에 이르는 사연에 공감하면서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하기도 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어쩌면 "사람은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과 연장선 어디쯤에선가 만나지 않을까. 저마다 자기 입장에서 유리한대로만 보고 판단하고선 나중에서야 "속았다, 그럴 줄 몰랐다" 하는 일이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 똑같은 모습을 보고도 누군가는 성녀를 보았고 누군가는 냉기 서린 악의를 느끼기도 하니 말이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자>의 메리를 보고 동네 사람들과 패멀라가 느끼는 것이 달랐듯이.

 

유령 출몰 자체로 이유없는 공포심을 조장하며 죽음을 만들어내는 보통의 공포소설이나 심령소설과는 달리 <초대받지 못한 자>에서는 유령의 존재와 사연에 관심을 갖는다. 유령도 과거에는 사람이었기에, 누군가의 딸이나 아들이었고 엄마이거나 아버지였을 것이기에.

 

 

 

동생 패멀라의 요양차 전원 생활을 하고 싶어 집들을 둘러보던 로더릭과 패멀라는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2층 석조 주택 '클리프 엔드'(집에 이름이 있다는 건 언제들어도 낭만과 멋이 느껴진다)를 상상조차 하지 못할 파격적인 가격에 매입하고 정착한다. 집주인 브룩 중령의 의미심장한 경고가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꿈에 들뜬 젊은이들에게 연장자의 충고는 잘 들리지 않는가보다.

 

클리프 엔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는 지루하게 늘어지지 않고 460여 페이지를 몰입하도록 이끄는 긴장감이 있다. <초대받지 못한 자>는 클리프 엔드에 출몰하는 유령의 존재를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소문을 만들고 부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 틈에서 피츠제랄드 남매가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유령이라는 존재에 무조건적인 공포심과 적대감을 느끼기보다는 그 유령의 존재가 누구인지 왜 나타나는지 이유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러브라인은 자칫 우울하고 어둡게만 흐르기 쉬운 분위기에 환기가 되어 준다. 피츠제랄드 남매와 함께 살며 살림을 거드는 리지의 존재는 공포소설에서 잘 볼 수 없는 유머도 지닌다. 겁은 나지만 무용담을 만들고는 싶고, 의리는 지키고 싶지만 입은 가벼운 리지의 캐릭터는 미워할 수 없는 감초의 역할같다고나 할까.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강압적인 할아버지 브룩 중령의 보호아래 자란 비운의 상속녀 스텔라는 점차 정신적인 독립을 하게 된다. 계속되는 의문은 지금껏 진실이라고 알아왔던 것들과 부딪히고 새롭게 드러난 진실은 인간의 추악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타인의 불행을 즐기기 위해 자신의 행복마저 포기하면서 필요하다면 진실도 위조하고 자신들이 만든 위조한 진실을 진짜라고 믿으며 사는 사람들.

 

유령보다 더 무서운 건 어쩌면 사람일런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