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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활이란 명작을 읽으면서, 오늘날 종교인이 갖고 있는 회개라는 것과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보여주는 회개가 얼마나 간극이 큰 것인가를 생각케 됩니다.
몇년전 상영했던 '밀양'이란 영화 속에서 순애는 신자가 된 이후에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자기 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하고자 그를 면회하러 찾아갑니다.
그런데 면회하면서 그 살인범은 감옥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발언을 하면서 순애의 용서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대합니다. 이에 충격을 먹은 그녀는
자신도 그를 아직 용서안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무슨 권한으로 용서를 했느냐면서
하나님께 불만과 함께 대항을 하는 영화였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가진 회개와 용서에 대한 얄팍한 신앙에 기반한 개념이 얼마나 한 영혼을 실족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입술의 고백과 회개 만으로도 신자가 되며, 입술의 용서만으로 용서가 처리되는 것을 이슈화 시킨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젊은 장교시절,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었던 카츄사를 동물적 욕정으로 강간한 이후, 임신케 하고 그 이후 나몰라라 하는 사이에 아이는 죽고 그녀는 창녀가 되서 살아가다가 한 사건에 연류되어 상인을 살해하는데까지 이르른 그녀를 법정에서 피고인 대 배심원으로 만나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 대한 책임감에 어떻게든 구명하려고 애쓰기도 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 그녀와 결혼을 하려고도 하고, 그녀와 함께 시베리아 유형지까지 가기도 합니다.
죄에 대한 회개는 이렇게 뒤따르는 삶으로 그 열매가 보여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만일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을 성경이 말한대로 4배를 변상하면서 갚는다면, 오늘날 기독교가 개독교로 지탄받을 수 있을지...
종교적인 티를 내는 것을 하나님이 이뻐하시는 것이 아닌 것을 선지자들의 외침 속에서 누누이 듣습니다. 소설 부활을 읽으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때로는 억울하게 당하면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눈물과 한숨, 그리고 가진 자들의 거드름과 외식, 그리고 폭압들 앞에 숙연함을 느끼게 됩니다.
대문호 명칭은 아무나 붙여주는 게 아니죠. 인생의 면면을 들여다 보는 것에서 넘어서서 부조리와 모순을 집어내고, 길을 찾아 설득하는데 무조건 이거라 하지 않고, 이게 어때하고 부드럽게 예를 들면서 제시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부활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입니다.
시베리아 유형지를 따라가는 네흘류도프 옆에서 관료들이 가진 냉정함과 밑바닥 인생들이지만 고귀한 성품을 가진 이들의 대조를 보기도 합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5/0707/pimg_751396173123581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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