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 연산군일기, 절대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누가 미치지 않고서 이 난세를 살 수 있겠습니까?"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의 말, 영화 간신에서)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모습으로 만화에선 표현된 연산군 이융(1476-1506). 그는 성종이 죽고 난 이후, 세자에서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자시절 아버지는 그에게 덜 빡빡하게 느슨하게 임금수업을 임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었다. 8살에 입학해야 하지만 12살에 입학했고, 수업도 적당히 제꼈다.

 

그는 초반 막대해진 권력세력인 언관들의 권력화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는 칼을 갈고 있었다. 사십구제와 소대상을 절에서 지내는 수륙재에 대한 반대에도 밀어붙이기식으로 이를 허락했다. 신하들의 직언은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라고 여겼다. 즉위한 이래로 4년간 대간들과 매번 부딪힘이 있었는데, 연산은 정치적 수완과 뚝심으로 왕권을 세워갔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을 일으켜 연산군은 많은 신하들을 도륙한다. 무오사화는 사관 김일손이 기록한 사초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 기록은 세조를 비난하고 김종직의 죽음을 애도한 조의제문을 기록한 내용이었다. 유자광의 고소로 발촉이 되어 결국 김일손은 죽임당하고 김종직의 시체는 부관참시(관에서 시체를 꺼내어 사지를 자르는 형벌)을 당하게 된다. 또 이세좌는 잔치때 연산에게 술을 받았는데, 마시는 도중 술을 흘렸다는 죄로 유배되고, 나중엔 자결케 한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그것이나 사실은 연산의 어미였던 폐비 민씨에게 사약을 갖다 주었던 수비대장역을 했다는 죄목이었다.

 

폐비 민씨를 내치게 만든 주동자였던 엄숙의와 정소용은 연산군과 자기 아들들에게 구타당한 후 죽임 당했고, 계모인 정현왕후는 죽음의 위협을 당해야 했다. 또 할머니 인수대비도 연산의 어머니를 죽인 일로 추궁받게 되었고, 한달만에 충격으로 죽는다. 또 왕은 이세좌, 윤필상 등을 목매달려 죽게 했고, 정창손, 심희, 한명회, 정인지도 부관참시하였다.

 

어미의 일뿐 아니라, 자신에게 곧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보복성 형벌을 신하들에게 가했다. 검소하고 절약해야 한다고 왕에게 직언했던 한치형도 죽임당하였고, 이극균은 유배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세자시절의 스승이었던 조지서가 교육을 잘못했다는 탄식을 했다고 해서 그를 효수하였고, 그를 비롯한 정성근, 이승건, 홍한 등도 머리가 장대에 매달아 장안밖에 걸려지게 하였다. 심지어는 중국의 수박을 먹고 싶어한 연산을 말렸던 김천령도 효수하였다. 어처구니 없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덜 귀하게 여겨졌다.

 

연산은 막강해진 왕권으로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베풀어 술과 향락에 빠졌고, 여색을 탐하여 전국에 천여명의 미녀들을 잡아오게 하여 흥청, 운평 등의 직함을 주며 자기의 여자들로 삼았다. 그래서 백성들은 흥청이 망청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궁중에 동물원을 설치하여 사냥터를 만들었고 식물원 처럼 꾸며대었고, 흔하지 않은 음식을 찾았다. 사슴의 혀, 소의 태를 즐겼단다. 신하의 아내를 잔치에 불러내서 끌고 들어가 강간을 서슴치 않았다. 장녹수의 치마폭에 싸여서 어린아이처럼 굴기도 했다.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왕이 아무리 노했다가도 녹수만 보면 기뻐서 웃었으므로, 상 주고 벌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라고 실록은 기록한다.

 

이런 임금의 추태와 끝도 없는 망나니 노릇에 그의 곁에 있던 내시 김처선은 목숨이 달아나면서도 간언했다고 한다. 임사홍, 임숭재와 같은 간신들만 주변에 창궐하고, 아무도 바른 소리를 못내었다.

이러면서도 자기 목숨이 달아날 걸 두려워하여, 수풀에서 황새가 튀어나오는 것에 놀라 전국에 황새전멸령을 내리기도 했다나 뭐했다나.

 

결국 연산 12년 8월, 병마절도사 박원종이 성희안, 신유무 등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평소 왕의 곁에서 알랑방구 끼던 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쿠데타 세력에 끼게 되고, 순조롭게 연산은 쫓겨나고, 그 자리에 중종이 앉게 된다.

 

연산은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2달도 못되어 29살의 나이에 역질로 죽었는데, 죽기전 아내 신씨를 찾았다고 한다. 천하의 연산의 매우 씁쓸한 결말이다. 맘 좋은 신씨는 그의 묘를 방학동으로 이전케 하였고, 나중에 같이 묻혔다고 하니, 죽어서나 금슬을 찾은 것인가.

미치지 않고선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던 시절. 한 사람의 권력만을 위해 모두가 숨죽이고 고통하면서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최고 권력을 손아귀에 움켜쥐게 된 이후, 그 권력을 자기의 뱃속을 위해 사용한 악한 왕이었다. 피바람만이 자기를 그 자리에 유지시켜줄 것으로 여긴 연산의 딜레마는 그 피바람을 멈추어도 위기가 오고 계속해도 올 것이라 여긴 데 있다. 자기의 사냥가는 행차 주변으로 민가를 다 비우게 할 뿐더러, 궁성 주변 로열벨트를 치고 민간인이 살지 못하게 했다. 연산군의 탈선은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고 빡 돌아서 그랬다고도 할 수 있고, 장녹수를 비롯한 온갖 간신들의 부추김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얼마전 상영된 간신이란 영화에서 연산시대의 광기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가를 보여주었다. 왕의 남자에서는 광대들의 연극으로 자기 어머니가 죽는 걸 연기하게 하고, 이로써 보복하는 연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산의 트라우마인 상처가 결국은 낭떠러지까지 가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특별난 재주를 가진 왕이었다. 역사속 독재자들의 전철이 이러한 길을 똑같이 걸어갔다. 그럼에도 그 독재자가 건재히 하늘아래 평온히 지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참 아이러니한 땅이 아닐 수 없다.

 

영화 간신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정진영)과 장녹수(강성연)

 

방학동에 위치한 연산군과 신씨의 묘

 

1476년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출생

1482년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음

1483년 세자로 책봉됨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름

1498년 무오사화 발생

1504년 갑자사화 발생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강화도 교동도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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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향기 2015-09-1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성들의 고통은 또 얼마나 심했을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