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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른 우면산 소망탑에서 내려다 본 서울시>

이 도시가 만들어져 온 과정을 기록한 손정목교수님의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1, 2˝를 읽으면서 근현대사속의 서울의 발자취를 알게 된다.

이 책에서는 특별시라 부르게 된 경위, 공창이 폐지된 과정, 625때의 서울, 419와 516, 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에 있던 국회의사당 얘기, 우남회관 건립 시비, 시장의 차량번호에서 발단이 된 서울시 법적 지위 승격 얘기,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등장하여 만든 도로들, 121무장공비 침투로 개발된 서울의 북쪽지역 얘기들, 박정희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신화, 강남 개발 등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시 공무원으로 재직했었고, 서울시립대 교수로 1977년부터 1994년 정년까지 근무했기에 서울을 빠삭하게 잘 아셔서 서울의 도시공간의 구조변화 및 사회변화에 대해 자세히 밝혀준다.
정독을 하고 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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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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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종은 아수라백작과 유사할 만큼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우유부단하면서도 냉혹하고 독선적인 면을 보였다. 이유는 자신의 왕권유지를 위해서였다. 연산군이라는 강력한 왕을 몰아낸 신하들에게서 자신이 몰려나지 않고 왕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믿고 의지할만한 신하 한명을 발굴하여 그에게 모든 힘을 몰아주고, 그를 방패삼아 왕으로 버티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39년간이라는 짧지않은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개혁다운 개혁을 못한 것은 이러한 중종의 제자리 뛰기의 삶 때문이다.

중종은 연산을 뒤엎고 나라를 뒤바꾼 인물들인 박원종, 유순종, 성희안을 정승으로 세우고, 어중이 떠중이를 포함하여 수많은 신하들을 공신으로 삼은 후, 그 그늘안에 숨었다. 그러나 세정승도 세월엔 장사가 아니었다. 정승에 올랐으나 얼마 못가 세상을 달리한다.

이어 그가 의지한 인물은 조광조였다.

 

중종의 첫부인 신씨는 연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란 이유로 폐비가 되었다. 조강지처를 생이별하게 된 이 사건은 중종에게 있어서 신하들의 권력에 대한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를 맞아들인다. 하지만 그녀는 원자를 낳아주고는 25살의 나이에 일찍 눈을 감는다. 이에 박상, 김정은 폐비 신씨를 다시 불러들일 것을 상소로 올린다. 이로 인해 그들은 죄를 받게 된다. 이때 새롭게 급부상한 조광조는 이 일에 대해서 언로를 막히게 한 것이라 하며 사간원, 사헌부 대간들을 질타하게 되고, 왕은 그의 말을 듣고 대간 전원을 교체함으로써 스승 조광조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짧은 기간에 독무대에 서버린 조광조를 중종은 의지하였고, 조광조는 개혁의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 그런데 조광조가 왕의 맘을 몰라준다. 너무 개혁 드라이브를 세게 밀어붙이기로 나왔다.

소격서라는 일월성신에게 제사하는 도교식 제례 폐지라는 걸 얻어냈지만, 자신에 대한 왕의 총애를 잃었다. 특히 가짜공신을 가려내는 것에서 도를 지나쳤다. 결국 중종은 4년만에 조광조라는 패를 버린다.

 

중종은 조광조를 대신하여 남곤, 심정에게 권력을 쥐어준다. 그리고 조광조의 동지들을 차례차례 죽이게 한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김식, 김정, 기준, 안당 등이 세상을 달리한다. 민심은 흉흉해지고, 탐관오리는 날뛰고, 재정은 빈약해지고, 국방력은 약화되고, 대간들도 적당주의에 처했다.

남곤이 나이늙어 죽은 후, 유배에서 돌아온 김안로에게 권력을 쥐어준다. 이때 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작서의 변'이라는 것으로 꼬리잘린 죽은 쥐가 동궁에 달려있는 것이었고, 이는 동궁을 저주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일로 경빈 박씨가 누명을 쓰고 폐서인되었고, 복성군도 쫓겨난다. 이항, 심정이 사약을 받으며, 그간 권력을 쥐었던 인물들이 추풍낙엽처럼 떨구어졌다. 김안로가 보복정치를 한 것이다. 한때 한명회나 조광조보다도 더한 권력의 힘을 쥔다.

 

하지만 김안로도 중종의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가 들어서자, 유배되고 사사된다. 중종은 때마다 적절한 대타를 기용하며 이전의 타자를 몰아낸다. 그리고 자신의 보디가드 역할을 할 인물에게 기댄다. 정치란 이런 비혈하고 비겁하고 싸가지가 없는 것인가. 아무튼 중종은 많은 보디가드들을 기용했었으나, 외로운 군주였던 것은 틀림없다. 피바람이 그치지 않는 궁중. 보복정치 속에서 바른 말을 하는 신하보다는 권력을 쥔 자의 같은 편에 서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던 때이다.

 

이상정치 실현을 해보고자 했던 유학자인 조광조가 뜻을 다 못이루고 토사구팽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한류열풍에 한 축이 된 '대장금'도 중종 시대의 의녀였다고 하는데, 실록엔 고작 10여차례의 짤막한 내용만 나온다고 하는데, 이로써 드라마를 만들어 냈으니, 창작하는 분들이 가진 능력은 참 대단한 실력들이다.

 

 

<대장금에서의 중종 역할한 임호씨>

 

<중종, 인종, 명종시대를 다룬 드라마인 여인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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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 연산군일기, 절대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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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가 미치지 않고서 이 난세를 살 수 있겠습니까?"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의 말, 영화 간신에서)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모습으로 만화에선 표현된 연산군 이융(1476-1506). 그는 성종이 죽고 난 이후, 세자에서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자시절 아버지는 그에게 덜 빡빡하게 느슨하게 임금수업을 임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었다. 8살에 입학해야 하지만 12살에 입학했고, 수업도 적당히 제꼈다.

 

그는 초반 막대해진 권력세력인 언관들의 권력화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는 칼을 갈고 있었다. 사십구제와 소대상을 절에서 지내는 수륙재에 대한 반대에도 밀어붙이기식으로 이를 허락했다. 신하들의 직언은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라고 여겼다. 즉위한 이래로 4년간 대간들과 매번 부딪힘이 있었는데, 연산은 정치적 수완과 뚝심으로 왕권을 세워갔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을 일으켜 연산군은 많은 신하들을 도륙한다. 무오사화는 사관 김일손이 기록한 사초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 기록은 세조를 비난하고 김종직의 죽음을 애도한 조의제문을 기록한 내용이었다. 유자광의 고소로 발촉이 되어 결국 김일손은 죽임당하고 김종직의 시체는 부관참시(관에서 시체를 꺼내어 사지를 자르는 형벌)을 당하게 된다. 또 이세좌는 잔치때 연산에게 술을 받았는데, 마시는 도중 술을 흘렸다는 죄로 유배되고, 나중엔 자결케 한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그것이나 사실은 연산의 어미였던 폐비 민씨에게 사약을 갖다 주었던 수비대장역을 했다는 죄목이었다.

 

폐비 민씨를 내치게 만든 주동자였던 엄숙의와 정소용은 연산군과 자기 아들들에게 구타당한 후 죽임 당했고, 계모인 정현왕후는 죽음의 위협을 당해야 했다. 또 할머니 인수대비도 연산의 어머니를 죽인 일로 추궁받게 되었고, 한달만에 충격으로 죽는다. 또 왕은 이세좌, 윤필상 등을 목매달려 죽게 했고, 정창손, 심희, 한명회, 정인지도 부관참시하였다.

 

어미의 일뿐 아니라, 자신에게 곧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보복성 형벌을 신하들에게 가했다. 검소하고 절약해야 한다고 왕에게 직언했던 한치형도 죽임당하였고, 이극균은 유배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세자시절의 스승이었던 조지서가 교육을 잘못했다는 탄식을 했다고 해서 그를 효수하였고, 그를 비롯한 정성근, 이승건, 홍한 등도 머리가 장대에 매달아 장안밖에 걸려지게 하였다. 심지어는 중국의 수박을 먹고 싶어한 연산을 말렸던 김천령도 효수하였다. 어처구니 없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덜 귀하게 여겨졌다.

 

연산은 막강해진 왕권으로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베풀어 술과 향락에 빠졌고, 여색을 탐하여 전국에 천여명의 미녀들을 잡아오게 하여 흥청, 운평 등의 직함을 주며 자기의 여자들로 삼았다. 그래서 백성들은 흥청이 망청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궁중에 동물원을 설치하여 사냥터를 만들었고 식물원 처럼 꾸며대었고, 흔하지 않은 음식을 찾았다. 사슴의 혀, 소의 태를 즐겼단다. 신하의 아내를 잔치에 불러내서 끌고 들어가 강간을 서슴치 않았다. 장녹수의 치마폭에 싸여서 어린아이처럼 굴기도 했다.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왕이 아무리 노했다가도 녹수만 보면 기뻐서 웃었으므로, 상 주고 벌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라고 실록은 기록한다.

 

이런 임금의 추태와 끝도 없는 망나니 노릇에 그의 곁에 있던 내시 김처선은 목숨이 달아나면서도 간언했다고 한다. 임사홍, 임숭재와 같은 간신들만 주변에 창궐하고, 아무도 바른 소리를 못내었다.

이러면서도 자기 목숨이 달아날 걸 두려워하여, 수풀에서 황새가 튀어나오는 것에 놀라 전국에 황새전멸령을 내리기도 했다나 뭐했다나.

 

결국 연산 12년 8월, 병마절도사 박원종이 성희안, 신유무 등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평소 왕의 곁에서 알랑방구 끼던 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쿠데타 세력에 끼게 되고, 순조롭게 연산은 쫓겨나고, 그 자리에 중종이 앉게 된다.

 

연산은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2달도 못되어 29살의 나이에 역질로 죽었는데, 죽기전 아내 신씨를 찾았다고 한다. 천하의 연산의 매우 씁쓸한 결말이다. 맘 좋은 신씨는 그의 묘를 방학동으로 이전케 하였고, 나중에 같이 묻혔다고 하니, 죽어서나 금슬을 찾은 것인가.

미치지 않고선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던 시절. 한 사람의 권력만을 위해 모두가 숨죽이고 고통하면서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최고 권력을 손아귀에 움켜쥐게 된 이후, 그 권력을 자기의 뱃속을 위해 사용한 악한 왕이었다. 피바람만이 자기를 그 자리에 유지시켜줄 것으로 여긴 연산의 딜레마는 그 피바람을 멈추어도 위기가 오고 계속해도 올 것이라 여긴 데 있다. 자기의 사냥가는 행차 주변으로 민가를 다 비우게 할 뿐더러, 궁성 주변 로열벨트를 치고 민간인이 살지 못하게 했다. 연산군의 탈선은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고 빡 돌아서 그랬다고도 할 수 있고, 장녹수를 비롯한 온갖 간신들의 부추김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얼마전 상영된 간신이란 영화에서 연산시대의 광기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가를 보여주었다. 왕의 남자에서는 광대들의 연극으로 자기 어머니가 죽는 걸 연기하게 하고, 이로써 보복하는 연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산의 트라우마인 상처가 결국은 낭떠러지까지 가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특별난 재주를 가진 왕이었다. 역사속 독재자들의 전철이 이러한 길을 똑같이 걸어갔다. 그럼에도 그 독재자가 건재히 하늘아래 평온히 지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참 아이러니한 땅이 아닐 수 없다.

 

영화 간신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정진영)과 장녹수(강성연)

 

방학동에 위치한 연산군과 신씨의 묘

 

1476년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출생

1482년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음

1483년 세자로 책봉됨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름

1498년 무오사화 발생

1504년 갑자사화 발생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강화도 교동도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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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향기 2015-09-1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성들의 고통은 또 얼마나 심했을까..ㅠ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 예종.성종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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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세조에 이어서 왕이 된 예종.

그도 병으로 죽지 않고 즉위기간이 길었다면, 이러한 군주의 강한 권력을 이어갔으리라.

그러나 발병으로 즉위한지 14개월여만에 아버지를 따라 숨을 거둔다. 그의 능은 고양시 서오릉이 있단다.

 

이 시대의 유명인물이 '남이'장군이다. 26살의 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역임한 그였지만, 구공신들의 견재에 밀리고, 자신이 추천한 인물인 유자광에 의해 되려 역모로 밀고당한다. 세조시절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용맹을 발휘했던 장군의 최후가 빨랐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앤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 하는 기개찬 시를 지어댄 대장부이지만, 시대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남이는 구공신 중 강순을 물귀신작전으로 끌고 간다. 진흙탕같은 정치판의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춘천 근처에 있는 남이섬엔 그의 가묘와 추모비가 있다. 용산구 전자상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남이장군사당'에서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고 있다.  이곳에 사당을 세운 이유는 남이 장군이 용산에서 병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화()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 용산구에서 매년 벌이는 남이장군 사당제>

 

권력이 훈구대신들인 구공신들의 손에 들어간 이후, 이들을 비난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글은 쓰기 어려워진다. 이로 인해 사관들도 정직한 역사기록을 꺼린다. 민수란 사관이 처음엔 정직히 썼다가 고치려고 사초를 빼내서 수정한 게 발각되어 된통당한다. 언로가 막히면 역사는 왜곡된다. 오늘날의 언론은 권력자들에게 굽실대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신숙주와 정희왕후(세조의 비), 한명회, 구치관등이 의논하여 자을산군(성종)을 왕으로 세운다. 그가 낙점된 이유는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란다. 성종은 할머니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에게 효자였다. 특히 할머니의 수렴청정을 받게되는데, 할머니는 손주의 정치권력 안정을 위해 어떤 일이건 마다하지 않는다. 지극한 손주사랑이다. 구성군 이준도 걸리적 거릴 것을 염려하 유배지로 보낸다. 수렴청정 속에서 착실한 군주수업을 받은 성종은 20세에 친정을 시작한다. 대신권력의 손에서 좌지우지 되었던 성종이었지만, 유자광의 상소를 받아서 한명회를 조용히 물리친다. 대신들의 의논에 의해 국정을 결정했던 원상제도 폐지한다. 그리고 사관원, 사헌부,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권력의 중심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왕의 모든 일에 꼬투리를 잡으며 지나친 비판을 하여서 성종은 불만이 쌓여가기도 했다.

 

도학군주로서 유교원리에 충실했던 성종은 토론과 자문을 거쳐서 정책결정을 하였고, 무신이라도 문신으로 기용하는 등 능력에 따라서 인재를 등용했으며, 길재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김종직을 등용한다. 그리고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이로써 사림파가 중앙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인사권이 어떻게 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연줄이 아니라 실력에 따라 사람을 뽑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공신이요 외척이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쥔 한명회는 물러가고 김종직의 시대가 열렸다. 계유정란으로 수양대군을 세조로 세우고 보필하면서 두 왕 (예종과 성종)을 사위로 삼았던 한명회이다. 그러나 그가 벌인 행악의 댓가 때문인지 딸들은 요절한다. 압구정은 그가 지었던 한강변의 정자였단다.

 

<정선의 압구정 그림>

 

한편 성종은 불교는 철저히 탄압하고 유교는 중흥시켰다.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이 정비되었다. 반면 문 중심으로 흐르다보니 군사적인 측면의 정비는 매우 취햑했던 것이 약점이라고 한다.

 

한편 성종은 아내 복은 없었다. 연산군을 낳은 윤씨는 도도해졌고, 권력욕에 잡혀서 후궁들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폐서인되고 사약을 받게 된다. 이런 여인으로 인한 고통을 겪었기에 어우동 사건을 매우 극하게 처벌했는지도 모른다.

 

성종이 25년간 재위하고 향년 38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뒤,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이 보위를 맡게 된다. 보고 들은 게 있으니 그가 왕위에서 할 일은 불보듯 뻔하다.

 

제2의 세종이라 했던 성종. 그의 시대가 태평성세였으나 가정사의 문제를 비롯하여 권력의 이동에 따른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있는 걸 볼 수 있다. 하여튼 성종은 대간들의 상소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은 내면성 있는 군주라 할 수 있다.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함부로 벌하지 않는 군주였다고 하지 않는가. 유학의 정신을 뿌리깊이 흡수하였기 때문일까나? ^ ^

 

<예종, 성종의 가계도>

 

<성종, 정희왕후와 그의 아들 정종이 묻혀있는 강남구에 위치한 선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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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man 2015-12-06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정리를 잘 해주셨네요. ^^b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 세종.문종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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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세종.
정치 스타일이 너무너무 달랐다.

태종은 왕권을 충녕대군(세종)에게 물려준듯 싶었지만, 외척의 세력을 철저히 죽여놓는 일을 했으며, 새 임금을 길들이기도 했고, 일본에 대해서도 대마도 정벌을 통해 강력한 국가이미지를 굳혔다. 많은 피를 흘리면서 왕권을 굳혔다. 세종의 아내였던 소헌왕후 심씨 가족에 대해서도 경계의 끈을 놓치 않고 있다가 당시 영의정이었던 심온이 중국을 다녀온 사이에 꼬투리를 잡아서 그를 처단한다. 병조판서 강상인 사건을 빌미로 그에게 사약을 내리고 왕비의 어머니와 자매들은 관노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반면 세종(1397~1450)은 집현전과 황희정승의 쌍두마차를 몰며, 대신들과 토론하면서 상의하고 최선안을 찾아가는 스타일이었다. 집터와 기둥을 세운 것에 벽을 쌓고 지붕을 올려 문과 창을 내어 완성하는 일을 했다. 무엇보다 정권을 인수받으면서 이전의 정적과 같은 사람들도 껴앉고 갔다. 정치보복이 아닌 양보와 희생으로 화합을 이끌어내는 군주였다. 유교경전을 열심히 공부했으나 실용을 위한 궁구를 꾀했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계속 맡기는 스타일이다. 자연히 세종의 시대에 학문이 융성하였고, 과학기술을 비롯한 음악에 있어서 엄청난 진보가 있었다. 조선의 문예부흥 시대라고나 할까. 이천, 장영실, 정초, 이순지, 정인지를 통하여 천문관측기구와 시계 제작기술을 발전시켰다. 규표, 혼천의, 앙부일기, 자격루 등. 무기분야에서도 화포기술이 개량되었고, 음악에서는 박연을 통하여 아악을 발전시켰다. 세종 자신도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고 한다. 북방의 4군 6진을 개척하고 야인들을 물리치게 하며, 남쪽의 백성들을 북쪽으로 이주시킨 사민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분노가 가득해졌다고 한다. 저화와 동전의 사용을 강제함에 따라 현물을 가지고 물물교환하는 것에 익숙했던 백성들은 불평하였다. 또 '수령고소금지법'이란 게 있어서 수령들에겐 날개를 달아주고, 백성들은 보호막을 없애버려 이또한 불만 사항이었다. 세종 시대라고 백성들이 그저 흥겨워한 시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웠다. 오히려 이 시대를 좋아한 것은 지식인층이였다고 할 수 있겠다.

 

훈민정문이 반포되었을 때 최만리의 상소가 올라오자, 세종은 핵심주제를 비껴가고, 지위로 위압하고, 약점을 잡으면서 공론화 의사가 없음을 드러낸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직접, 비밀리에 창제 작업을 하여서, 집현전 학자들도 몰랐던 것도 의외의 사실. 둘째딸 정온공주가 도왔다 하는데,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를 차용하여 소이라는 가상의 여인을 끌여들인 게 아닐까 싶다.

 

황희정승에 대한 기사도 흥미롭다. 24년간 정승으로 있었고, 19년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세종을 보필한 그였는데, 청렴하고 온화했다고 여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도 사위의 일로 빽쓰고 돈써서 합의를 보게 만들었으며, 땅 차지에도 열을 올렸다고 하니, 청백리로의 이미지가 다소 사라지는 듯 싶다.

한편, 장영실, 최윤덕, 이징옥, 김종서 등을 보면 능력이 우선시 되는 사회였다는 걸 보게 된다. 신분을 극복케 했고, 무인이라도 정승으로 임명도 했으며,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권에 있어서 탁월한 임금이었음을 본다.

 

한편 마지막 5장에서 다룬 준비된 임금, 문종의 이야기는 가슴아프다. 8살에 세자에 책봉되어 늦게 왕에 올라 단지 이년여간 통치하다가 등에 난 종기가 심해져 세상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왕이 되기전 세자 수업을 받았던 그였으나, 실제 통치는 너무 짧았다. 문종은 또한 아내복도 없어서 첫째부인, 둘째부인 모두 소박맞아 내쫒김을 당하고, 세째부인마저 어린 단종을 낳고 먼저 죽었다고 한다. 이는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이 세자 단종의 위를 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요순시대와 같이 태평한 시대를 가져온 세종대왕. 그가 남긴 한글을 잘 쓰고 있어서 늘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다. 광화문 앞의 세종로에 있는 세종대왕. 이제는 행정복합도시의 이름인 '세종'시로 남아 두고두고 후손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도 이 만화를 통해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세종대왕>

 

<뿌리깊은 나무 : 세종 역의 한석규씨>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영령릉.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가 합장되어 묻혀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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