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 예종.성종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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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세조에 이어서 왕이 된 예종.

그도 병으로 죽지 않고 즉위기간이 길었다면, 이러한 군주의 강한 권력을 이어갔으리라.

그러나 발병으로 즉위한지 14개월여만에 아버지를 따라 숨을 거둔다. 그의 능은 고양시 서오릉이 있단다.

 

이 시대의 유명인물이 '남이'장군이다. 26살의 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역임한 그였지만, 구공신들의 견재에 밀리고, 자신이 추천한 인물인 유자광에 의해 되려 역모로 밀고당한다. 세조시절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용맹을 발휘했던 장군의 최후가 빨랐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앤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 하는 기개찬 시를 지어댄 대장부이지만, 시대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남이는 구공신 중 강순을 물귀신작전으로 끌고 간다. 진흙탕같은 정치판의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춘천 근처에 있는 남이섬엔 그의 가묘와 추모비가 있다. 용산구 전자상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남이장군사당'에서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고 있다.  이곳에 사당을 세운 이유는 남이 장군이 용산에서 병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화()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 용산구에서 매년 벌이는 남이장군 사당제>

 

권력이 훈구대신들인 구공신들의 손에 들어간 이후, 이들을 비난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글은 쓰기 어려워진다. 이로 인해 사관들도 정직한 역사기록을 꺼린다. 민수란 사관이 처음엔 정직히 썼다가 고치려고 사초를 빼내서 수정한 게 발각되어 된통당한다. 언로가 막히면 역사는 왜곡된다. 오늘날의 언론은 권력자들에게 굽실대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신숙주와 정희왕후(세조의 비), 한명회, 구치관등이 의논하여 자을산군(성종)을 왕으로 세운다. 그가 낙점된 이유는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란다. 성종은 할머니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에게 효자였다. 특히 할머니의 수렴청정을 받게되는데, 할머니는 손주의 정치권력 안정을 위해 어떤 일이건 마다하지 않는다. 지극한 손주사랑이다. 구성군 이준도 걸리적 거릴 것을 염려하 유배지로 보낸다. 수렴청정 속에서 착실한 군주수업을 받은 성종은 20세에 친정을 시작한다. 대신권력의 손에서 좌지우지 되었던 성종이었지만, 유자광의 상소를 받아서 한명회를 조용히 물리친다. 대신들의 의논에 의해 국정을 결정했던 원상제도 폐지한다. 그리고 사관원, 사헌부,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권력의 중심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왕의 모든 일에 꼬투리를 잡으며 지나친 비판을 하여서 성종은 불만이 쌓여가기도 했다.

 

도학군주로서 유교원리에 충실했던 성종은 토론과 자문을 거쳐서 정책결정을 하였고, 무신이라도 문신으로 기용하는 등 능력에 따라서 인재를 등용했으며, 길재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김종직을 등용한다. 그리고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이로써 사림파가 중앙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인사권이 어떻게 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연줄이 아니라 실력에 따라 사람을 뽑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공신이요 외척이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쥔 한명회는 물러가고 김종직의 시대가 열렸다. 계유정란으로 수양대군을 세조로 세우고 보필하면서 두 왕 (예종과 성종)을 사위로 삼았던 한명회이다. 그러나 그가 벌인 행악의 댓가 때문인지 딸들은 요절한다. 압구정은 그가 지었던 한강변의 정자였단다.

 

<정선의 압구정 그림>

 

한편 성종은 불교는 철저히 탄압하고 유교는 중흥시켰다.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이 정비되었다. 반면 문 중심으로 흐르다보니 군사적인 측면의 정비는 매우 취햑했던 것이 약점이라고 한다.

 

한편 성종은 아내 복은 없었다. 연산군을 낳은 윤씨는 도도해졌고, 권력욕에 잡혀서 후궁들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폐서인되고 사약을 받게 된다. 이런 여인으로 인한 고통을 겪었기에 어우동 사건을 매우 극하게 처벌했는지도 모른다.

 

성종이 25년간 재위하고 향년 38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뒤,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이 보위를 맡게 된다. 보고 들은 게 있으니 그가 왕위에서 할 일은 불보듯 뻔하다.

 

제2의 세종이라 했던 성종. 그의 시대가 태평성세였으나 가정사의 문제를 비롯하여 권력의 이동에 따른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있는 걸 볼 수 있다. 하여튼 성종은 대간들의 상소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은 내면성 있는 군주라 할 수 있다.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함부로 벌하지 않는 군주였다고 하지 않는가. 유학의 정신을 뿌리깊이 흡수하였기 때문일까나? ^ ^

 

<예종, 성종의 가계도>

 

<성종, 정희왕후와 그의 아들 정종이 묻혀있는 강남구에 위치한 선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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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man 2015-12-06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정리를 잘 해주셨네요.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