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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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는가. ‘잊고 싶다’는 수식어는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한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 아닌, 일종의 터닝 포인트다. 선득하고 끈적하게 따라오는 까만 그림자 같은 것. 발을 담그다가 점차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깊은 웅덩이 같은 것. 누구에게나 존재할 것 같지만 기억의 회상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고통의 정도가 달라지는.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부끄러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말다툼 끝에 어머니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간 아버지에 손에는 낫이 들려 있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울음이 가득했던 끔찍했던 순간. 이후 부모님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행동하며 일상을 산다. 아무렇지 않게 무마된 기억은 지워지지 않은 채 화자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렇게 남은 감정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부끄러움의 정의, 가벼운 수치심이나 슬픔을 넘어 다양한 감정의 복합체로 여겨진다. 소설은 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어릴 적 ‘나’를 둘러싼 세계를 정밀하게 되짚는다. 전쟁 이후의 궁핍한 생활, 열두 살의 순수한 나이, 서로를 감시하는 주변 사람들 …… 가족과 학교, 시골 마을의 굴레 안에서 ‘나’는 이제 친구들과 다르게 자신이 불행 속에 소속되었다고 ― 부끄러움 속에 편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 소설은 그저 세밀한 감정을 늘어놓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감정의 해부학 (작품 소개 _신수정 평론가)’에 가깝다. 뼛속 깊이 스며든 감정을 이리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그 감정을 이미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철칙대로 쓰였으나, 이 소설에 투영된 기억은 작가의 어떤 자전적 경험보다도 더욱 어려웠던 것이라 작가는 밝히고 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장면을 글로 옮겼다. 지금까지는 일기에서조차 이렇게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마치 징벌을 야기하는 금지된 행위처럼. 어떤 글이든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는 금기. (이전처럼 여전히 글을 쓸 수 있으며 아무런 끔찍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방금 전에 확인하니 드는 일종의 안도감.)”

트라우마를 고백하기로 결정했던 순간부터, 글을 완성하고, 그토록 감추려 했던 기억이 세상에 모두 알려지기까지 작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라 짐작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소설 속에, 마침표 하나까지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누군가의 마음의 심연을 이리도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깊고 깊다.

 

며칠 전부터 나는 1952년 6월의 일요일과 함께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해 쓸 때면 그때 일이 ‘또렷하게’ 보였다. 형태도, 색깔도.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들렸다. 지금 그 장면은 흐릿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무성 영화로 변해 마치 해독 장치도 없는 유선 방송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 장면을 언어와한다 해도 의미의 부재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1952년부터 항상 그래왔듯, 그것은 광기와 죽음의 장면이었고, 나는 내 삶의 다른 사건들의 고통을 가늠하기 위해 항상 그 장면과 비교했지만, 그와 같은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나 주변 세계를 생각할 때 사용했던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정상적인 것과 용납될 수 없는 것, 심지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1995년의 나라는 여자는, 조그만 자시 도시와 자기 가족 그리고 사립학교만 알고 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제한되었던 1952년의 소녀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 그 소녀 앞에는 살아야 할 무한한 시간이 놓여 있었다.

열두 살 시절의 세계의 법칙을 드러내다 보니 꿈속에서 느꼈던 미세한 중압감과 폐쇄감이 슬며시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찾아낸 어휘들은 불투명하고, 요지부동의 바윗덩어리이다. 명확한 이미지는 빠져 있는 어휘들. 사전을 찾으면 나오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그런 의미마저도 빠져 있는 어휘들. 그 주위에는 어떤 초월도 꿈도 없다. 그저 물질들처럼 있다. 내 유년 시절의 사물과 사람들에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가 된 일상어. 내가 딱히 가지고 놀아볼 수 없는 언어들. 일종의 법령집.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거나 싸우지 않는 사람 또는 시내에 갈 때 정장을 차려입는 사람 같은 정상적인 범주에 더 이상 포함되지 않았다. 개학일마다 깨끗한 교복을 입고 예쁜 기도서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에서나 1등을 하고 기도문을 줄줄 외웠지만, 나는 더 이상 다른 여학생과 같지 않았다.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것이다. 순진무구한 사립학교에서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고, 그것을 통해 말끝마다 "아무튼 그런 걸 보고 사는 게 불행한 일이야"라는 이야기 속에 범람하는 폭력, 알코올의존증, 정신병의 세계 속에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식으로 소속되고 말았다.

그해 여름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나는 내가 ‘그제서야 나는 알게 됐다’라든지 ‘나는 -를 깨달았다’라고 쓰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런 단어는 체험한 상황에 대한 명징한 의식이 있음을 상정한다. 거기에는 이 단어들을 모든 의미 외적인 것에 고정시키는 부끄러움의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무거움, 그 무화 작용을 내가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최후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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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2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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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관련한 이야기들을 부쩍 많이 접하고 있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약자라는 점을 자각하기 시작하고부터 관심은 점점 다른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인종 차별은 성별에 관련한 논쟁만큼이나 뜨겁고 오래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관련된 많은 책을 우연히 읽어보긴 했지만 <아메리카나>는 정말로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 책이다. 인종 차별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그리지 않고 세련된 방식으로 풍자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흑인 여성 ― 온갖 상황의 차별을 경험했을 법한 ― 이 겪은 일들을 이토록 상세하고 현실적으로 부딪쳐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이지리아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난 이페멜루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넓은 땅으로 향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가족들도,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친구도 뒤로 한채 먼 곳으로 떠났지만, 찬란하게 빛날 거라 여겼던 아메리칸드림은 금세 실체를 드러낸다.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은 물론이고, 흑인마저도 출신지에 따른 암묵적인 계급으로 나뉘는 사회. 사람들은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때로는 인종에 관한 어떤 단어라도 말하기 어려워하고 말을 삼간다. 그러나 이페멜루는 곱슬거리는 머리와 미국 악센트가 없는 영어와 같은, 자신의 본 모습을 지닌 채로 어떤 전문적인 일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당신이 인종이 문제가 안 됐다고 말하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그랬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 바라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109쪽, <2권>)

어떻게든 살아남아 미국 사회에 스며들기 위한 노력은 종종 주인공에게 좌절감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환멸을 느낀 그는 아예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당당했던 본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겪고 느낀 바를, 인종에 대한 단상을, 블로그에 적나라하게 적으면서 인기를 끌게 되고, 마침내 미국에 정착하는 듯했지만 다시 고향인 나이지리아로 발길을 돌린다. 소설 속에선 이페멜루를 포함하여 그의 학창시절 남자친구였던 오빈제, 그밖에 다양한 인종과 계급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복잡한 미국 사회만큼이나 다양한 캐릭터들의 대화들 속에는 가감 없는 현실이 스며들어 있다. 2권에서는 각 장마다 이페멜루가 작성한 듯한 가상의 블로그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부분이 굉장히 인상 깊다.

소설은 ‘아메리카나’로서 성공하려 했던 사람들의 성장을 그리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벽한 성장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그의 전작 <보라색 히비스커스>도 그러하듯이) 주인공은 모두 완벽하지 않다. 당당하게 변화한 이페멜루 또한 때로는 머뭇거리기도 하고 실수를 한다. 블로그에 신랄하게 글을 써내리면서도 말이다. 연애와 관련한 그의 사생활 또한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가끔은 히스테릭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고 불안한 감정은 소설 속에 그대로 표현된다. 신념을 가진 사람도 모든 행동을 완벽히 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은 주인공이지만 너무도 평범한 인간이며, 소설은 이상적 미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철저히 현재진행형으로 변화를 염두해두고 있는 듯 보였다.

단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결말인데, <아메리카나> 속에는 페미니즘과 인종에 관한 담론을 포함하여 많은 복합적인 삶의 장면들과, 영혼의 단짝인 오빈제와 이페멜루의 인연을 중심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 또한 담겨 있다. 그 둘이 만나기까지 각자의 길고 긴 싸움이 있었으나 나는 그들의 마지막에서 마치 소설 <스토너>를 읽을 때와 같은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그들의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군가는 무언가 이상해서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으로 그려야만 하는지. 그들이 많은 역경을 건너온 만큼 조금 더 성숙하고 당당한 사람이길 바랐다.

 

 

 

"2층요." 그녀는 그를 집안에 들이면서 아까는 저런 쾌활함이 그의 몸속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가 생각했다. 그녀는 트고 갈라진 입술에 마른 살 껍질이 붙어 있던 그 사내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미국에서는 인종과 계층이 동의어다."는 포스트를 그의 극적인 태도 변화 이야기로 시작해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낼 것이다. 내게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내 외모는 그 위풍당당한 저택의 주인에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공적 담론에서 ‘흑인’이라는 집합 명사는 ‘가난한 백인’과 곧잘 짝을 이룬다. ‘가난한 흑인과 가난한 백인’이 아니다. ‘흑인과 가난한 백인’인 것이다. 실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81

그녀는 전화를 끊고 난 뒤에야 부끄러움이 솟아올라 얼룩처럼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에게 고맙다고 한 것, ‘발음이 미국인 같다’는 말을 열심히 화환으로 만들어 자기 목에 건 것이 수치스러웠다. 미국인처럼 말한다는 게 어째서 찬사 받을 만한 업적이란 말인가? 그녀는 이겼다. 크리스티나 토머스, 눈빛만으로 그녀를 작고 의기소침한 짐승처럼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허연 얼굴의 크리스티나 토머스도 이제는 정상적으로 이야기할 터였다. 그녀는 정말로 이겼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승리였다. - P295

"제 생각에 이 나라의 계급은 사람들이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자기 위치를 알죠. 심지어 계급 사회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어떤 식으로든 자기 위치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오빈제가 말했다. "이 나라에서는 백인 남자애와 흑인 여자애가 같은 노동자 동네에서 자랐다면 얼마든지 같이 어울릴 수 있고 인종은 2차적인 문제일 뿐이에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백인 남자애와 흑인 여자애가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해도 인종이 1차적인 문제가 될 거예요."

- P85

알렉사와 다른 손님들, 어쩌면 조지나조차도 누군가가 전쟁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억압적인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빈제 같은 사람들, 즉 유복하게 자랐지만 불만에 빠져 있고 태어날 때부터 고국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도록 길들어진, 진정한 삶은 그 다른 곳에 있다고 영구불변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 단지 떠나기 위해 ― 그중 어느 누구도 굶주리거나 강간당하거나 마을이 불타지 않았지만 그저 선택의 가능성과 확실성에 목말라서 ― 위험한 일, 불법적인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P87

아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미국인 흑인들도 인종 때문이 아니길 ‘원한다’. 그들은 인종 차별 짓거리가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들이 인종 대문이라고 말할 때는, 어쩌면 정말로 인종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나는 색맹이야."라고 말하지 마라. 당신이 정말 색맹이라면 당신은 병원에 가 봐야 하고, 그 말은 텔레비전에 어떤 흑인이 당신 동네에서 일어난 범죄의 용의자라고 나올 때 당신이 보는 것은 흐릿한 회보라색의 허여멀건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종 얘기가 지겨워." 혹은 "인류는 하나야."라고 말하지 마라. 미국인 흑인들도 인종 얘기가 지겹다. 그들도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길 바란다. 하지만 더러운 일은 계속 일어난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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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공부의 기초 -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간단한 틀
앨런 존슨 지음, 이솔 옮김 / 유유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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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을 인식하고부터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 또한 누군가를 습관적으로 차별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점검’이라고 하기엔 조금 가벼운 마음이지 않나 싶다. 엉겁결에 누군가에게 차별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나쁜 말을 내뱉고는 잠깐 주춤하는 식이다. 직접적으로 당사자에게 피해를 주진 않지만 나는 종종 부끄럽고 무서워진다. 아마도 이런 습관들이 다 없어지려면 스스로 지속적인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보다 성숙한 태도를 갖기 위해서 관련 책들을 많이 찾아보고 있다. <사회학 공부의 기초>는 그중 많은 도움을 받은 책이다. 제목과 부제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간단한 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각 개개인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으며 이들이 속해 있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며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의미 있는 행동과 가치는 선과 악이 아니라 인간과 삶의 본질, 도덕에 따른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보다 커다란 것의 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생각은 종종 무시되고, 많은 사회적 현상들이 개인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이 확고하게 유지된다. 두 시각이 충돌하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이 발생한다. 사회적 계급과 차별, 그로 인한 갈등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속에서 늘 벌어지고 있다. 책 속에선 다양한 상황에 대하여 설명한다. 왜 사회적 현상을 비난하면 누군가는 개인적 비난으로 받아들여 ‘버럭’ 하곤 하는지. 왜 사회적 약자 ― 여성, 흑인, 라틴아메리카인, 동성애자, 장애인, 노동자, 그 밖의 하층계급에 속한 이들이 지속적인 차별에 강하게 맞서지 못하는지. 왜 차별적 상황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동조하거나 침묵하는지.

모든 시스템에서 과반수의 사람들은 (종종 나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최소 저항’의 길을 택한다. 그것은 이 시스템을 의식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지금과 똑같은 사회적 삶의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일이 아니기에, 일단은 나의 안위가 우선이기에, 때때로 역할 갈등이 일어나서 택하게 되는 최소 저항의 방법이다. 그러나 저자는 경고한다. “세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곳이 될 수 있는지 상상해 보라.”

그리고 덧붙인다. “백인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특권이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편히 살 수는 없다.” 백인, 미국인, 학자, 비장애인, 남성…… 살아가며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았을 법한 저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인지한 채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조금 더 깊이 있고 너그러운 태도를 갖도록 독자를 인도한다. 자신의 자아와 몸과 지위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불완전한 세계를 상기하는 저자의 모습은 꽤 감동적이다.

우리는 늘 선택의 상황에 놓여 있다. 직접적으로 문제에 관련되어 있지 않는 한, 한 사람의 선택이 사회적 현상의 한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누군가를 쉽게 파멸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선택이 ‘양식화된 관습과 제도 혹은 고정관념’을 파괴시키는 ‘시작’이 될 수는 있다. 모든 변화에 참여할 필요도 없고, 모든 시스템에서 최대의 저항을 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작은 행위 (이를테면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도 그저 독립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조금 나아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는 차이가 단지 다양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이는 누구는 포섭하면서 누구는 배제하기 위한, 누구에게는 더 주면서 누구에게는 덜 주기 위한, 누구는 존경하면서 누구는 인간이 아니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취급하기 위한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차이는 특권의 근거가 되고, 이 특권의 범위는 모두가 가져 마땅한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에 관한 문제부터 생사의 결정이라는 극단적인 문제에까지 이른다.

내가 나보다 큰 어떤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사회학 실천을 통해 비난과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을 만든 것도 아니고,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 내 탓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학은 세상에 어떤 식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는지, 그 선택이 왜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백인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특권이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편히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길이 아니다. 길은 우리가 그 길에 대해 알고 있는지 혹은 그 길이 우리가 가장 가고 싶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지와 무관하게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 존재한다. 내가 한 번도 누군가를 성적으로 괴롭히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보면 의미 없는 사실이다. 그 여성이 ‘성인 남성’을 보며 연상하는 힘과 위협의 이미지는 우리 둘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남성지배적이고 남성지향적이며 남성중심적인 세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남성이란 없다. 따라서 나의 위험성을 알려 주는 지표는 없지만 내가 위험하지 않은 사람임을 보장해 주는 지표도 전혀 없다.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지닌 입장에 있는 그 여성 역시 마찬가지다.

환경을 ‘지키려’ 할 때마저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오만한 종’의 유혹에 빠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현상은 나를 포함한 아주 많은 인류가 근심하고 있는 환경 ‘훼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이런 종류의 오만함 때문에 인간에게는 편의대로 지구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게 되고, 이상적인 자연 상태로 보존되어야만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의할 자격 또한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각각의 경우에 인간은 인간적인 가치를 비인간적인 세계에 끼워 맞추면서도 그 오류를 눈치채지 못한다.

한 유명인의 성폭력, 한 정치인의 비상식적인 언행과 같은 일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양식화된 관습과 제도가 이러한 행동을 승인하고 지속시킨다. 많은 이들은 방관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권력 집단에 편입되거나, 최소한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많은 것들이 점차 악화되며,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해진다. 이를테면 성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듣고 벌떡 일어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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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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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종종, 변화를 위한 누군가의 작은 노력에 대해 폄하하곤 한다. “뭐 그렇게까지 해, 너 하나 바뀐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헛수고야,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잊힐 텐데 뭣하러 건드려서는.” 그들은 과정을 비웃고, 작은 실패가 있더라도 모든 변화가 끝난 것처럼 여긴다. 다시는 성공이 다가오지 못할 것처럼.

엄격한 가톨릭 교리와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큰 사업체와 진보 성향의 언론사를 소유하면서도 독실함과 베풂을 잃지 않아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엄격한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이념과 종교적 교리를 세뇌시키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끔찍한 폭력을 휘두른다. 그는 폭력을 휘두른 다음, 마치 자신이 하지 않은 것처럼 가족을 보듬기도 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어머니는 순응하고, 주인공 캄빌리와 오빠 자자 또한 대부분의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지만, 우연히 고모가 사는 ‘은수카’를 방문한 후 달라지는 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는 여타 성장소설과 비슷한 플롯이라 여겨진다. 화자인 ‘캄빌리’는 마음으로는 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쉴 새 없이 자신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점검하고 판단한다. 계속해서 예상외의 행동을 보이는 오빠의 모습 또한 긴장하며 살핀다. 아버지의 존재는 늘 소녀의 뒤에 있다.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또한, ‘나이지리아’라는 우리에게 생소한 국가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폭력의 피해를 당하면서도 일시적인 도움만 받을 뿐, 결국엔 아버지의 아래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앞에서 언급한, ‘작은 실패를 실패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완벽한 실패담처럼 보일 수도 있는 소설이다. 곳곳에 사회적 한계가 존재하고, 결말은 시원치 않다. 이를테면, 그나마 진보적이라 보였던 이모의 언어에도 뿌리 깊은 관습이 있고,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난 캄빌리는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된 신부님의 말을 마치 하느님의 말씀인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도 한다. 조금의 변화를 띈 어머니와 오빠, 캄빌리의 미래 또한 불투명하다. 노력 끝에 비자를 받아 미국이라는 새 땅에 정착한 이모 가족의 미래도 어떠할지 상상할 수 없다.

주인공들은 시시각각 갈등한다. 자유를 부르짖다가, 수그러들고, 웅크렸다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그저 부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 속 가족의 모습은 그저 개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과하게 말하면 조금 더 확장된 시민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주저하고, 고민하고, 망설이는 작은 마음은 하나하나 모여 언젠가 큰 불꽃이 된다. 무엇보다 특별한 빛과 색을 띄는 히비스커스가 된다.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27쪽)

내가 꿈꾸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려고 검은 미사보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콘로 한 가닥을 잡아당겼다. 왜 그들은, 오빠와 어머니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아버지는 방금 오빠가 말대꾸를 하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일까?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서 나들이용 빨간 원피스를 갈아입으러 위층으로 향했다. - P18

"누니에 음." 이페오마 고모가 부르자 어머니가 돌아봤다.

몇 년 전 이페오마 고모가 우리 어머니를 "누니에 음"이라고 부르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내 아내’라고 부른다는 데 경악했다. 내가 묻자 아버지는 그것이 불경한 전통, 결혼은 남자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의 잔재라고 말했다. 나중에 어머니는, 내 방에 단둘이 있을 때였는데도,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아버지의 아내이니까 고모의 아내이기도 한 거야. 그 호칭은 고모가 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란다." - P96

그리고 벨트가 멈추자 아버지는 자기 손안의 가죽을 가만히 쳐다봤다. 얼굴은 구겨졌고 눈꺼풀은 축 처졌다. "왜 죄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아버지가 물었다. "왜 죄악을 좋아하는 거야?"

어머니가 아버지에게서 벨트를 받아 식탁에 놨다.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홱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 P132

"겁낼 것 없어, 은네. 재밌을 거야." 이페오마 고모가 말했고 나는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고모를 돌아봤다. 고모의 코는 뾰루지처럼 작은 땀방울로 뒤덮여 있었다.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고모를 보고 어떻게 내 주위에 저런 기분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금 내 속에는 불길이 타오르는데, 공포와 희망이 뒤섞여 내 발목을 움켜잡는데. - P215

하지만 고모도 어머니와 나한테는 편지를 보낸다. 두 개의 직업, 전문대의 일자리와 약국 또는 (미국인들 표현에 따르면) 드럭스토어의 일자리에 대해 쓴다. 커다란 토마토와 값싼 빵에 대해 쓴다. 하지만 대개는 그리운 것과 희망하는 것에 대해 쓴다. 과거와 미래에 살기 위해 현재는 외면하는 사람처럼, 때로는 고모의 편지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다가 잉크가 번져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을 때도 있다. 한 번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민주 정치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오늘날의 민주 국가들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처럼. 그것은 걸음마를 떼려다 엉덩방아를 찧는 아기에게 가만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그 아기를 앞질러 가는 어른들은 기어 다녔던 시절이 없는 것처럼.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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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
필립 스테드 지음, 에린 스테드 그림, 김경주 옮김, 마크 트웨인 원작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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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동화를 읽습니다. 예전에 동화를 잘 몰랐을 땐 편견이 있었어요. 이야기 흐름이 비슷하게 흘러간다던가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던가 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세상에 수많은 가지각색 책들이 있는 것처럼, 동화도 생각보다 꽤 다양한 방식으로 쓰인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권선징악에 맞춰진 행복한 동화도 있었고, 어린이들이 봐도 괜찮을까 싶은 어두운 동화들도 있었고, 역사적 사실을 가감 없이 다룬 동화들도 있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을 뿐,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달시켜줄 수 있는 책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 책 또한 꽤 독특한 느낌이 드는 동화입니다. 마크 트웨인 원작이라고 적혀 있지만 리메이크나 재출간이 아니라, 미완성된 동화를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완성한 방식이에요. 1879년에 작가 ‘마크 트웨인’이 두 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는 대략 16쪽의 스토리로 과거를 건너 현재로 오게 되었습니다. 매력적이고 신비스럽지만 완성되지 못했던 동화는 이야기의 얼개를 유지하며 두 작가들에 의해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다시 만들어졌지요. 이러한 사연에 따라 이 동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점은 책의 중간중간 과거의 작가 (마크 트웨인)와 현재의 작가 (필립, 에린 스테드)가 가상으로 대화하며 해설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원작자에게 존경을 표하는 동시에, 툭툭 던지며 장난스레 대화하는 말투 덕분에 그림책의 이야기가 더욱 산뜻하고 독특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동화의 초반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소년 ‘조니’에게 갑작스럽게 슬픈 일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닭 ‘전염병과 기근’을 시장에서 팔아오라는 할아버지의 호통이었습니다. 포악한 왕이 지배하는 세상은 치열하고, 어른들은 각자의 삶만 바라보았지요.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치이고 치이던 조니는 눈물을 흘렸고, 그 앞에 우연히 한 노파가 나타나 ‘한 푼만 달라’며 구걸을 하게 됩니다. 허름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얼굴을 발견한 소년은 그의 친구 ‘전염병과 기근’을 행복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노파에게 닭을 선물하지요. 소년과 진정한 친구 닭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책 제목에 쓰인 ‘올레오 마가린 왕자’는 또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세상은 아름답고도 위험해 / 기쁘기도 슬프기도 해 / 고마워할 줄 모르면서 베풀기도 하고 / 아주, 아주 많은 것들로 가득해 / 세상은 새롭고도 낡았지 / 크지만 작기도 하고 / 세상은 가혹하면서 친절해 / 우리는, 우리 모두는 / 그 안에 살고 있지” (99쪽)

이야기의 중반, 큰 그림으로 표현된 노랫말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됩니다. 무척이나 현실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동화 <올레오 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의 느낌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 같아요. 곧이곧대로만 살 수는 없는 세상, 누구에게나 불행과 행복이 찾아올 수 있는 모순된 삶의 무게를 보여주기에, 이 책은 약간 무게감이 있는 편입니다 (아이들은 행복하게만 볼지도 모르겠지만요). 몽글몽글하게 예쁜 그림들이 가득 차있는 책이지만 글밥도 많은 데다가 현실과 이상을 생각할 수 있는 동화라서 초등학생 고학년 자녀와 어른이 함께 생각하며 보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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