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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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던 제발트라는 이름. 나는 사실 이 책을 꽤 매끄럽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종 변덕을 부리는 그래서 어떤 특징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내 독서 취향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위기를 탄다’ 이런 말이 어울릴까. 나는 자주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 딱딱한 책은 싫어하고 책의 느낌에 압도당해서 빠져들어 읽는 것을 좋아한다. <토성의 고리>의 경우, 상실과 폐허와 문명의 파괴에 관련된 줄거리가 평소 좋아하던 주제일뿐더러 발췌된 문장 또한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렇게 혹해서 제발트의 우주로 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큰 우주는 너무도 깊고 험난했다.

책의 갈래는 소설이지만 마치 산문처럼 읽히다가도 백과사전만큼의 딱딱한 역사적 사실들을 접한다. 이야기는 뒤섞이고 사건들은 수시로 방향을 바꾼다. 너무도 많은 지식이 나를 덮쳐온다. 깊은 수렁에 빠져 계속해서 빠져나오려다가 미끄러지는 듯한 독서, 참 오랜만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 책을 읽어야만 했던 이유는, 머리를 쥐어 싸매다가 우연히 발견되던 문장들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259쪽) 

1990년대 화자인지 작가 자신인지 모를 ‘나’의 도보여행으로 시작되는 사색은 그가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이어진다. 장소에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시간과 역사가 스며든다. 화자는 도시의 몰락과, 자연의 황폐화, 동물들의 몸짓, 기계와 노동, 건축물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등을 화제로, 관련된 방대한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다.

온전히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나는 제발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종종 감탄을 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 인간도, 문명도, 우리가 끝없이 쌓아올린 모든 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우리 자신보다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얼마든지 파괴해도 좋다고 여기는 종에게 거듭하여 떠넘긴다는 뜻이 아닌가?(85쪽)” 인간은 같은 종과 다른 종을 파괴하고, 또 파괴하고 파괴한다. 끊임없는 문명과 파괴의 반복.

종종 세상이 너무나도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이러다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고, 병들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어느새 일상으로 되돌아가 또다시 이전의 실수들을 반복한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다.



위대한 종족보다 더 오래 산 떡갈나무는 세 그루도 못된다 어떤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고 해도 기억될 권리를 확보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상의 인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양귀비 씨앗은 어디서나 꽃을 피우지만,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비참함이 눈처럼 우리 위로 내리면 우리는 이제 잊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 P35

꿈에서 본 것이 이상하게도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아마도 파묻힌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꿈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흐릿하고 뿌연 어떤 것을 통과하면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훨씬 더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물방울이 호수가 되고, 미풍이 폭풍으로, 한줌의 먼지가 황야로, 유황 입자 하나가 분출하는 화산으로 변한다. 우리가 시인과 배우, 기계 기술자, 무대 미술가, 관객 등의 역할을 한꺼번에 떠맡는 이런 연극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꿈의 도열을 거쳐가는 데는 우리가 잠들 때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사유능력이 필요한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 P97

제4의 철학학파의 대표자들은 이미 모든 시간이 지나갔으며, 우리의 삶이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의 여운이 비치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계가 이미 가능한 변이들을 얼마나 많이 겪없는지,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이 있다면 그게 몇개인지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개별 생명이나 생명 전체, 나아가 시간 자체를 상위의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낮보다 밤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뿐이다. - P183

우리가 고안해낸 기게들은 우리의 신체나 우리의 동경처럼 서서히 작열하는 심장을 갖고 있다. 인간 문명 전체는 애당초부터 매시간 더 강렬해지는 불꽃일 뿐이었으며, 이 불꽃이 어느정도까지 더 강렬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서서히 사그라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은 우리의 도시들이 빛을 발하고, 아직은 불이 번져간다. - P199

마이클이 말했다. 몇주동안 새 한마리 안 보이네. 마치 만물이 어떤 식으로 파내어진 것처럼 보여.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인데, 잡초들만 계속 자라나. 서양메꽃은 덤불의 목을 조르고, 쐐기풀의 노란 뿌리는 땅속에서 앞으로 기어나가고, 다년초 덩굴들은 나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크고, 갈색 반점 세균과 진드기가 번져가고, 끙끙대며 단어와 문장을 병렬해놓은 종이조차 진딧물이 짜낸 감로로 칠한 것처럼 느껴지네. 몇날 몇주동안 성과도 없이 머리를 쥐어자지만, 만일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습관 때문인지, 과시욕 때문인지, 아니면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삶에 대한 경탄이나 진리에 대한 사랑, 절망, 분노 때문인지 말을 할 수 없고, 글을 쓰면 점점 똑똑해지는 건지 아니면 더 미쳐가는 건지도 대답할 수 없다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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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토 - 2012년 제45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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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지 감정으로만 구별되는 추억은 없다. 좋은 추억, 나쁜 추억, 딱 둘로 나눌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 그 속엔 수많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추억은 과거의 일, 우리가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그렇다. 과거의 기억은 그저 일부일 뿐이라도 어떻게든 현재에 작용하고, 우리가 거쳐온 수많은 우연들은 끊어지지 않고 인생을 움직인다. 너무도 당연하고 당연한 이야기. 음악의 주법 이외에도 예술은 종종 인생에 비유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매우 친숙한 주제일 수도 있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권여선이 한다. 식상하거나 고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작가의 문장을 만나 펄떡거리는 생명력을 갖는다.

냉혹했던 유신이 지나고 학생 운동이 열렬히 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내의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 써클에서는 데모와 피쎄일 (전단 돌리기)로 뜨겁게 권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서툴렀고, 두려웠고, 때로는 불굴의 의지와 긍지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던 청년들이었다. 몇 개월, 혹은 몇 년,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인생을 걸었던 이들이었다. 이후 삼십 년이 지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동창들에게 어느 날 ‘정연’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언니의 과거를 알고 싶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로, 그들은 소식을 알 수 없이 실종된 정연의 과거를 다시 추억하게 된다. 각기 다른 관계이니만큼 그들의 기억 속 정연의 모습도 모두 다르다. 그들의 추억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사건들과 연결된다.

철없고 서투른 청춘들의 이야기와 위트 넘치는 대화들,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면들…… 다양한 인물들 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이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이 된 오정연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리는 방식은 사실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선배 ‘박인하’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완전히 달라진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정연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복잡한 감정이었고 끊임없이 의문이 생겼다. 왜 당신은 숨어 살아야 했는가. 왜 당신은 제대로 된 화해조차 하지 못했는가. 이 물음은, 이어 등장한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피쎄일을 하다가 사복경찰과 마주쳐 ‘무섭다’며 떨던 정연은, 광주에서 마치 각성하듯 발 벗고 일어나 총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남성과 선배라는 권력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고 당시 풀리지 않았던 분노는 또 다른 ‘권력’에 대한 크나큰 분노로 표출되었던 것일까.

‘앞선 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음은 이미 시작되는, 그렇게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연주하는 레가토 주법은 시간에 대한 인식에서도 유효하다’. 책의 마지막 부분, 후기에서 권여선 작가는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 변주되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썼다. 우려 섞인 말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걱정할 필요 없이 소설의 몰입감은 상당해서 물 흐르듯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문장들은, ‘역시 권여선’이라는 탄성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솔직히말해 그는 다시 옛 기억에 깊이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늙은 인간이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럭저럭 꾸려나가다 모자라는 게 있으면 그때 그때 조금씩 조달하며 사는 데 익숙해져버린 존재인 것이다. 갑작스런 기억의 환기로 일상에 작은 혼란이나 번거로움이 초래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게 된 존재인 것이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정연의 얼굴에 단단한 결기가 서렸다. 그녀는 그날 흘린 한 티스푼의 피를 생각했다. 그러자 한 티스푼만큼의 힘이 났다. 처녀도 뭣도 아니면서 베개를 눈물로 흠뻑 적시거나 툭하면 한숨짓고 입술을 깨무는 일 따위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쇠떡심처럼 질기고 염소처럼 힘이 세져야 하며 화전보다 기름지고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신발끈보다 매섭게 동여져야 한다. 망자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듯,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까딱까딱 양쪽으로 흔들어 자기 속의 죽은 처녀를 애도했다.

 인하는 손바닥 모서리로 눈가를 누르다 말고 양손으로 바지춤을 잡았다. 흥분했다가도 이 자세로 몇발짝만 걸으며 피가 싸늘히 식으면서 감각이 바위처럼 무뎌지곤 했다. 가장 끔찍한 과거와의 대면을 망각하고 가는 인생도 있지만, 그것을 굳이 환기함으로써 나아갈 힘을 얻는 인생도 있다. 그는 바지춤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정연에게 천 겹의 고통과 슬픔과 능욕을 안겨준 자신을 기억함으로써 퍼펙트한 자술서로 동지들을 팔아먹고 번번이 어머니의 치마폭에 감싸여 사지를 빠져나온 자신을 기억함으로써 그는 또 한번 삶에 단단한 옹이를 짓는다.

 순간 누가 귀에 속삭이기라도 한 듯 그녀는, 지금은 못 간다,고 생각했다. 인하형은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오난이도, 재현이도, 진태도, 경애와 명식이도, 주춤거리면서라도 끝끝내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녀는 문득 울고 싶었다. 그녀만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나 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들이 곧 싸워야 할 이유였다. 해산을 마치고 회복된 몸처럼 헝클어지고 혼란에 빠졌던 생각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울컥 스며나오는 섬뜩한 두려움은 여전했다.

 자신이 운동권이 되고 안되는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었다는, 어느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한때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신입생 헌터의 역할을 맡은 선배들은 한달 안에 낙점을 끝냈고, 낙점된 신입생들은 대개 한 학기 안에 마음의 결정을 끝냈다. 운동권에 몸담고 지낸 십수년의 기간에 비해 한달과 반년은 얼마나 짧은가. 그 짧은 동안 일어난 몇가지 단편적인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후의 기나긴 청장년의 삶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나 싶엇다. 하룻밤의 방황이 창녀와 부랑아를 만들고, 한번 발각된 도둑질이 전과로 점철된 인생을 부른다. 편재하는 우연이 새처럼 날아들면 그 순간 인생은 단박에 뒤틀린다. 그런 의미에서 스무살 청춘에게 허여된 한달 또는 반년의 말미는 필연의 첨탑을 쌓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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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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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라는 단어를 보면 흔히 타인의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정신학적 용어에 따른 애도의 의미는 ‘모든 의미 있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을 뜻한다고 한다. 애도의 대상과 방향은 고정되지 않고, 오로지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회복하는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이 임종 3일 전까지 꼬박꼬박 써 내려갔던 일기를 모은 이 책이 단순히 ‘투병일기’가 아니라 ‘애도일기’인 것은 그가 병상에 누워 애도하며, 삶을 긍정하고 투쟁한 기록이 꼼꼼히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이 애도일기라는 부제에는 다른 암시도 있다. 그가 번역한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한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긴 이가 김진영 철학자였다. 그 아름다운 글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아침의 피아노> 속에서 그는 번역한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현재의 감회를 전한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과 괴로움이다.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표현했던 당시 화자에 비해, 자신의 고통을 걱정하는 이기심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현존하는 자신은 지극히 행복하고,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 -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병환과 죽음 앞에서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순간 눈물이 솟구칠 때도 있으나 저자는 매일 아침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오랜 시간 타자들 앞에 서 있었던 자신의 존재, 말, 시간, 사랑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어느 하나 무의미한 순간들은 없었다.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투쟁했던 한 철학자의 삶이 이 책에 모두 들어 있다. 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텍스트를 둘러싼 여백에 포함된 한숨과 긴장, 슬픔과 고독의 시간들을 모두 읽어낼 수 있다면.

처음에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애도일기’라는 부제와 ‘아침의 피아노’라는 제목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내 좁은 식견으로는 아침보다 ‘저녁’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예상이 틀렸다. 이 책은 정말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아침이다. 사랑과 아름다움을 말하고,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힘차게 걸어나갔던, 한 철학자의 내밀한 기록이다.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나 또한 나의 하류에 도착했다. 급류를 만난 듯 너무 갑작이어서 놀랍지만 생각하면 어차피 도달할 곳이다. 적어도 지금가지 나의 하류는 밤비 지나간 아침처럼 고요하고 무사하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공부하고 돌아오는 나에게 큰 서재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셨다. 여기가 그 서재가 아닐까. 나는 여기서 한 권의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 나와 나의 다정한 사람들, 미워하면서도 사실은 깊이 사랑했던 세상에 대해서 나만이 쓸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내가 하류의 서재에 도착한 이유가 아닐까.

방금 아이가 묻던 말이 생각난다. 신기해 빗방울은 왜 동그랄까. 나는 대답했었다. 바보야 물이 무거우니까 떨어지면서 아래로 맺히는 거지. 그것도 몰라? 누가 그걸 몰라. 그래도 물방울이 신기해. 너무 예쁘잖아…… 문득 차라투스트라의 한 문장 :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다.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 온 세상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무르익은 것은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두가 무르익었다. 니체는 그 순간을 ‘조용한 시간 Der stille Stunde’이라고 불렀다. 조용한 시간 - 그건 또한 거대한 고독의 순간이다. 사람은 이 난숙한 무화과의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평생을 사는가.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내가 끝까지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군포 병원으로 면역 항암제를 맞으러 가는 길. 꽉 막힌 고속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들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강렬한 그리움, 아니 그리움이 아니다. 살아서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욕망의 충동.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기고 싶은, 아니 품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그렇게 어머니의 몸속을, 그 몸 안의 어떤 갱도를 통과하고 싶은 절박한 충동.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멘트 바닥을 천공하는 지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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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맑음 - 청소년과 함께 읽는 5.18 민주화 운동 이야기 창비청소년문고 33
임광호 외 지음, 박만규 감수, 5.18 기념재단 기획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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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연히 뉴스 기사를 읽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19년 촛불 집회 당시 엄청난 군 병력과 탱크, 장갑차 등으로 무력 진압을 하려고 했던 문건이 드러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무력시위로 변질될 때를 대비한 병력이라고는 하지만 촛불을 들고 질서를 지키며 평화적인 시위를 했던 시민들에게 이런 ‘거리를 쓸어버릴 만한’ 군 병력이 가당키나 할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 ‘만약’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어디에선가 작은 충돌이라도 일어난다면, 거리에 있는 수많은 시민들을 ‘폭도’로 만들어버리는 건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만약’을 상상하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것은 1980년 5월의 광주였습니다.

“열받아서 몰입이 잘 된다”는 이유로 근현대사를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인이 되기 전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후, 교과서보다는 문학이나 만화, 영화, TV 시사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갔지요. 식민 통치를 받고, 수차례 전쟁을 겪고,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가 되기까지 대한민국의 역사는 아픈 역사 투성이지만, 가장 가슴 아픈 역사는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건들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가까운 과거의 역사인 5.18은 너무나 깊게 새겨진 숫자였습니다.

<5월 18일, 맑음>은 그날의 기억을 사실대로 전달함과 동시에, 역사를 어려워하는 학생들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친근하게 기술한 책입니다. 광주에서 벌어졌던 열흘간의 항쟁뿐 아니라, 운동이 발발하기 전 대한민국의 상황, 그리고 5.18 이후 현재까지의 노력 등을 꼼꼼하게 담았습니다. 또한, 각 장마다 민주주의, 국가 폭력 등과 같은 키워드를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한편, 세계 속에서 5.18과 유사한 풍경을 그려낸 일들을 함께 소개하기도 했지요.

책은 어렵지 않게 편안하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사소한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소해 보이는 일들은 5.18의 진실을 하나하나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최초 사망자가 우연히 길을 걸어가던 청각장애인이었다는 것과, 그해 공수부대에서 수개월 동안 강도 높은 훈련과 세뇌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 눈뜨고 보기 힘들었던 무차별적인 폭행과 진압이었다는 점을 반증합니다. 영화 <택시 운전사>에도 등장했던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는 “베트남 전쟁에서 종군 기자로 일할 때도 이렇게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다(82쪽)”고 말했다고 하지요. 어떤 설명을 하든 그때의 상황과 같을 수 있을까요.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들어진 책은, 그 생생한 역사의 눈물 때문에 결코 편안하게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몸이 떨렸습니다. 

“원망스럽다, 이런 것들은 별로 없었어요. 기왕에 나는 죽겠다고 생각을 했고, (……) 당신들은 살아서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해 주겠지. (……) 10년이 갈지, 100년이 갈지. 그거야 모르지만은 언젠가는 이 얘기가 나오겄지, 그렇게 생각을 했죠. (122쪽, 양인화, 당시 시민군의 증언)”

하나하나 기억할 것들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들불야학’을 통해 노동자를 교육하다가 민주화운동을 이끌게 되었던 ‘윤상원’ 열사의 이름과, 생생하게 남은 증언의 주인공들, 시위에 참여하고 시위를 도왔던 사람들과, 남모르게 눈물 흘리며 현재까지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유족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 ‘아픔의 연대를 향해’를 통해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아픈 역사를 단지 역사적 사실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끊임없이 끌어올려 현재의 상황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나갈 청소년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조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가의 그 누구에게도 국민의 인권을 마음대로 줄일 권리는 없습니다. 대통령일지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이 만든 법에서 나오고 국민은 누구나 그 법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며 그가 가진 권력은 국민들에게 잠시 위임받은 것일 분입니다.
유신 공화국에 살던 사람들이 바란 민주주의는 그렇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 같은 사소한 일부터 소신대로 신문 기사를 쓰고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것,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 같은 작지만 소중한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했지요.
- P35

공수 부대는 한층 더 잔혹하고 무차별적이었습니다. 이성을 잃은 듯 사무실이나 주택, 여관까지 마구 들어가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찔렀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잡혀 오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속옷만 입게 한 채 마치 군대에서 하듯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등을 시키며 기합을 주었지요. 따라 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구령에 늦을 경우 여지 없이 곤봉을 휘둘렀습니다. 가톨릭 사제조차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라고 느낄 지경이었습니다. 공수 부대와 함께 시위 진압을 맡은 경찰 간부마저 시위대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 가라, 공수 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라며 울먹였지요. - P56

"몸이 약해서 보기에 그 헌혈허시면 안 되겠다고 그러면 막 화를 낸 거예요. 내가 죽어도 이럴 때 피 한 방울도 안 주면 내가 시민이 아니지 않냐. (……) 그때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슬펐고, 또 가장 인간으로서 감동적인 순간들을 너무 많이 체험을 한 거죠."
헌혈 행렬에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던 가정주부나 젊은 여성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안타까운 일도 생겼습니다. 전남여성 3학년 박금희 학생이 광주기독병원에서 헌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총을 맞고 사망한 것입니다. 박금희 학생은 헌혈했던 병원으로 다시 실려 오고 말았습니다. - P98

만약 어느 도시에서 치안이 사라진다면, 즉 경찰이 모두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할 사람이 없다면? 남의 집 담을 넘는 도둑들, 은행마다 들이닥쳐 자루 한가득 돈을 실어 나르는 강도들, 내키는 대로 거리에 불을 지르며 화를 푸는 이들로 도시는 큰 혼란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21일 이후부터 다시 진입해 들어온 27일까지 광주는 사실상 치안이 사라진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군인도 경찰도 없었지요. 하지만 광주는 혼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도시는 무척 안전했습니다. - P107

"도청 정문을 나설 때, 한편으로는 비겁하게 나 혼자만 살기 위해 빠져 나가는 것 같은 심정과, 또 한편으로는 저 많은 젊은이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는 운명의 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많은 시민이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남아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도청 YMCA 건물에 있다가 집으로 가라 하면 도청으로 가고 도청에서 가라 하면 다시 YMCA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도청에 남은 그 누구도, 돌아가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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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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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혐오의 사회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모욕하고 이용하는 일들이 흔하게 보인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조롱의 말을 쏟아내고, 누군가의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귀를 닫아버리는 일들도 허다하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싸움은 늘 벌어진다. 애써 보려 하지 않았을 뿐,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들을 통해 심각함을 인지하는 요즘이다. 다름을 포용한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영역을 내주거나 누군가가 침투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나와는 다른 사람을 얼만큼이나 포용할 수 있을까.

<버드 스트라이크>는 신비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날개가 달린 인간 (익인)이 등장하는데, 고원 지대에 모여 사는 익인 무리들은 필요에 의해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다친 대상을 꼭 안아 치유를 할 수도 있다. 생김새도, 사는 모습도, 도시의 사람들(날개를 가지지 않은 보통 인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들은 오로지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살기만을 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도시를 습격하기 시작한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시작한 싸움이다.

이 싸움의 중심에 ‘비오’와 ‘루’가 있다. ‘비오’는 다른 익인들과 비교해 현저히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익인들 무리에서의 소중한 구성원이지만 정작 중요한 행사에는 진정한 익인으로서 참여하지 못한다. ‘루’는 도시 사회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정쩡한 위치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소녀다. 우연히 만난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게 된다. 수많은 갈등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둘의 모습은 경계’에 맞서 싸우는 많은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성별과 외모, 피부색, 정체성, 가치관, 사랑의 형태, 가족의 형태…… 다수의 억압으로 만들어진, 결코 쉽게 부서지지 않는 경계들을.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죽을 듯이 날갯짓을 하며 앞서 나가던 비오의 모습을 떠올린다. 남들보다 작은 날개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 뒤에 숨겨진 수만 번의 날갯짓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편견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 누군가가 오랫동안 몰두하고 투쟁해온 일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자신이 태어나는지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모두가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것. 여전히 어디선가 자신의 리스크를 넘어서고 작은 날개로 날갯짓을 하는 이들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응원하고 지켜보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날그날의 감정에 충실할 권리가 있고, 그 결과로 인한 짐을 제 것이 아님에도 나눠서 져야 할 때가 있지. 그렇다고 해서 비오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뜻은 아니란다. 우리가 짐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베푸는 일이야. 그리고 나는 내가 데려왔던, 나를 다녀갔던 그 사람에게 베푼 것에 대해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나더러 좀 경솔했다고만 했을 뿐, 다음에 도시 사람 누군가가 우리의 눈앞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면 그게 어떤 사람이든 모두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손을 내밀 테고 말이야. - P93

"그러면 그 애는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요."
그 작은 날개를 가지고서.
"어디가 됐든 그곳이…… 여기는 아니겠지. 또한 그렇다고 하여 생각만큼 멀리도 아닐 테고 말일세."
옛사람은 오수에 젖어 드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는 날 수 없는 몸으로 초원조의 부름을 기다리는 옛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 P122

루가 눈을 떴을 때는 절벽 바깥으로 청년들의 모습이 세 개의 점처럼 멀어져 있었다. 비오는 이미 그 바람을 온몸에 맞으며 앞서 날아간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날개의 크기가 다른데 그게 가능한 일인지 루는 알기 어려웠으나, 다만 비오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그동안 다른 이들보다 몇 배의 날갯짓을 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을 으스러뜨리거나 목덜미를 낚아채어 던져 버릴 것만 같은 바람을 향해 비오가 날개를 활짝 펼쳤을 때, 그 앞에 펼쳐진 정경을 루는 결코 해독하거나 형언할 수 없을 것이었다. 루가 아는 어떤 사전을 머릿속에서 넘겨 보아도 이 느낌을 부를 마땅한 이름을 찾을 수 없었으나, 그것이 불안을 밀어 내고 순수한 경탄으로만 루를 감싸 왔다. - P168

혹시 그건 따라오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가 내려앉을 유일한 땅 한 뼘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의 휴식처로 남을 마음이 없어. 그래서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땅을 떠나기로 한 거야.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유한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라고 생각하니까.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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