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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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심하게 살면 편하다. 어떤 것도 고민하지 않고, 어떤 장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지나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는 불편함을 목격하고, 불편함을 생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불편함을 불편하다 인식하기 시작하기부터 피곤해지지만 발을 담근 순간 어쩔 수 없이 바짓단은 젖어든 상태다. 텅 빈 머릿속은 시끄러워진다. 보지 않던 것이 계속해서 보인다. 나 또한, 이런 갈등의 세계를 걷고 있다.

여성이 페미니즘을 생각하게 된다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몸으로 겪고, 수없이 많이 목격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페미니즘이라 굳이 언급하고 규정하지 않아도 여성들은 마음으로 느끼고 은연중에 말한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엔 사실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젠더 규범 속에 남성성을 강조하며 자란 그들이 갈등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어떻게 자신이 속하지 않은 사회를 위해 마음을 쓸 수 있을까.

저자는 문단의 젠더 권력 (페니스 파시즘)을 목격하고 나서 ‘이상한 세계’를 뼈저리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았다. 항시 긴장상태로 많은 것을 점검했다. 그러나 남성인 그가 온전히 여성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어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다분했다. (20쪽)” 언어와 행동, 숨어있는 폭력적인 면모까지 모두 끄집어내어 고쳐야 했다. 많은 부분 압축된 글 너머에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터. 그는 수많은 노력으로 자신을 다듬었다. 그런 도중,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녹내장에 걸려 실명 위기였던 애인을 ‘함께 아프자’라는 말로 붙잡았다. 그들의 결혼은 ‘혼인 의례는 우리라는 삶을 선언하는 날’이라는 문장 아래 철저히 주체적인 신념에 맞추어 진행했다.

이후의 내용은 저자가 ‘임신, 출산, 육아’라는 미지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언뜻 육아일기 같으면서도 진지한 고민들이 세밀하게 담겨 있다. 그는 출산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지 못해도 옆에 꼭 붙어 느끼고, 아내 대신 육아를 전담하며 다른 집은 보통 여성들이 겪는 일들을 체험한다. 머리로 경험하던 일들을 마침내 몸으로 제대로 경험함으로써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늘 긴장감을 유지한 채 올곧은 자신의 신념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아이에게도 올바른 자세를 전해주려 노력한다.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고 해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남성―인간으로서 살아왔고, 남성―무의식 속에서 살게 될 것이고, 남성―질서와 함께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내가 죽기 전까지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87쪽, <두 번째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라 언급하긴 하지만 그가 중요하게 바라보는 대상에는 단연 ‘여성’만 있지 않다. 여성, 장애인, 아이, 동물, 자연…… 억압받는 모든 것들이 있다. 이쯤 되면 대상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같은 상황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그 속의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는 시선의 차이. 내가 존중받는다면 당신도 존중받아야 하고, 세상 어떤 존재도 말이 되지 않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여성인 나는 그에게 진정한 페미니즘, 아니 ‘살아가는 자세’에 대하여 배운다.

 

그 느낌의 세계로의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어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다분했다. 피와 살의 느낌이라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가까워지려는 ‘노력’에 의해서 겨우 가능할까 말까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또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축척해온 젠더 무의식은 꼭 실수를 하고 나서야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릅쓰고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어머니, 이모, 친구와 동료 중 절반이 여성이고 내 안의 여성성도 들끓고 있으니까. 여성들과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몸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반복할 수밖에. 오직 반복뿐. - P20

이사를 하면서 우리는 다짐했다. 집을 근거로 해서 삶을 꾸려 나가겠다. 집을 소외시키지 않겠다. 남성―공적 영역 / 여성―사적 영역으로 성 역할을 분배하는 공간 배치를 거부하겠다. 집을 우리 삶의 장소로서 가꾸겠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집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집을 근거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집을 길들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 바로 집사람. 눈사람이라는 말과 비슷해서 제법 귀엽기도 하다. 이날부터 애인과 나는 서로를 집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물론, 새롭게 태어날 아가도 집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집사람으로 해야 할 몫을 함께 할 것이다. - P66

막달인 당신의 바다에는 요즘 태풍이 자주 부나봅니다. 숨 쉬기가 힘들고, 갈비뼈가 아프고, 배가 뭉치고, 골반이 아픈 당신은 몇 번이고 자꾸 새벽에 혼자 깨어 몸을 동그랗게 말아 새벽을 건넙니다. 나는 가능한 한 질긴 해초 다발이 되어 당신이 떠내려가지 않게 등을, 배를, 허리를, 종아리를 스윽스윽 감아 다시 눕힙니다. - P82

베개를 베고 누워 잠깐 생각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오래된 오해는 아닐까. 오해를 오래 해서 이해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이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이해가 될 때, 이해는 오해가 된다. 이해를 둘러싼 투쟁의 영역에서 물러나 싸움을 그만두었을 때, 늙어간다는 걸 이해한다. 나는 오늘치의 이해를 과다 복용했다. 어딘가 쓸쓸하게 늙은 것 같다. 선크림 발라야겠다. - P103

장/애인과 아이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선의를 조금이라도 내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잠시라도 착해지고 싶었을 테고, 애써 다정함을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연민의 시선에 잘 적응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을 두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어붙은 호수"라고 표현하면서 이러한 시선들이 세계와 주체의 거리감을 체험하게 한다고 말했다. 연민의 시선에서 나는 그들과 나 사이에 얼어붙어 있는 호수가 놓여 있음을 확인한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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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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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실에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비유적 표현으로만 존재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마법을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엄청나게 큰 불행에 휩싸인. 열여섯살의 소년은 지하철역에 버려졌고, 운좋게 집으로 돌아갔으나 또한번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아버지는 단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새엄마와 의붓여동생을 데리고 왔고, 처음엔 상냥했던 그들은 점차 소년을 경멸하기 시작한다. 말을 더듬고, 구박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피하며 살아오던 소년은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살아왔으나, 성추행을 당한 의붓여동생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한 순간 그는 집을 뛰쳐나와 버린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년이 갈 수 있던 것은 종종 끼니를 때우던 ‘위저드 베이커리’. 무뚝뚝한 빵집 주인과 상냥한 알바생의 도움을 받아 빵집의 비밀 공간에 겨우 겨우 숨었다. 그런데 여긴 정말 수상한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왠지 모르게 평범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파티시에 마법사, 그리고 파랑새로 변신하는 소녀 직원, 원하는 마법을 선택할 수 있는 갖가지 맛의 빵. 이토록 신비스러운 마법 빵집에서 내가 원하는 환상을 모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빵집에서는 이러한 우주의 논리 아래, 사소한 마법이라도 충동적으로 쓰면 안된다고 재차 강조한다.

“따라서 저편에서 누군가가 뒤틀어놓은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이편에서 다른 힘으로 붙들거나 되돌려야 한다고. 세상의 마법사들은 모두가 함께 존재하지 않거나, 모두가 같이 존재해야만 하는 딜레마를 안고 살아간다고. 그것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소망이라는 게 없어지지 않는 한 ―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남아 있는 한 계속되는 현상이라고.”

소원을 빌면 뾰로롱,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는 소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악한 사람은 불행하고 선한 사람은 행복한, 무조건적인 법이란 없다(사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이 반대인 것 같기도). 주인공이 고난을 하나 하나 시원하게 해결하고, 훈훈한 교훈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 성장하는 스토리 또한 따라가지 않는다. 이성적이고 시니컬한 소설이 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위저드 베이커리>는 다양한 청소년 소설들 사이에서 분명 다른 색을 띈다.

작가는 약간의 마법(도움)을 가미하며 이 이야기를 통해 ‘선택’과 ‘책임’을 강조한다. 당신의 선택으로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고, 그 선택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환상’을 줄 수 없다면, 어쩌면 이런 따끔한 충고도 약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리 말하는 이들도 실은 알 거다. 이상과 철저히 거리를 둔 현실을,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이 주는 무게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최소한의 금전적인 지원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조금은 감수해야 할 여러 유형의 폭력이 있다는 체념적인 단정. 일단 닥치고 집을 나와 청소년쉼터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아마도 생명의 위협에 가까운 폭력을 피해 도망쳤거나, 견뎌본들 나중에라도 얻을 것 없는 가난한 집에 미련을 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이리라는 폭 좁은 편견. 기타 강간이나 임신 절도 등의 문제는 가난과 폭력의 별책 부록 같은 것이리라고.

때로는 한없이 어리석지만 그것밖에는 선택할 수 없는 남들의 바람을 이루어지게 도와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소원이 없는 사람. 남들의 감사만 받아도 모자랄 마당에 단지 뒤틀린 결과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탓할 상대가 있어서 편할 것이다. ‘당신이 그런 수상쩍은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손대지도 않았을 금기를…….’

옛이야기에서와 달리 지금 사람들이 마법의 과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당장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보다는 대체로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문제 때문. 과열된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소를 가득 담은 풍선만큼이나 끝없이 상승할 수 있다. 감정과 풍선의 공통점은 비가시권의 높이에서 제풀에 폭발해버린다는 것.

그에 비하면 현실이란 그넷줄이나 위로 튀어오르는 공과 같이 얼마나 건조하고 절망적인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까지박에 오르지 못하며, 땅이 잡아당기는 힘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내려오니까.



…… 무엇보다도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치 통조림만도 못한 주제에.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강제와 분리가 없다면 언제고 언제까지고 그 안에서.

― 언제나 옳은 답지만 고르면서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인생에서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나요?

―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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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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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 디스토피아를 주제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새롭게 SF를 그려낸 작가는 그때보다 더 나아갔을까.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제 한국의 대표 페미니즘 소설이 된 <82년생 김지영>의 이름은 작가의 곁에서 늘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책 제목을 대며 많은 기대를 하고, 때로는 불평을 하고, 책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깎아내리려 용을 쓴다. 종종 이런 글들을 보며 한숨을 쉬면서 새 책을 집필하는 부담감이 어마어마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최근 출간 인터뷰에서 ‘페미니즘 작가로 불리는 것에 대해 부담감은 없다’고 밝혔다. 그저 쓰고 싶은 주제를 쓰는 것이라고. 꽤 단단하고 믿음직한 말이다.

2012년부터 구상했고 조금씩 수정해나갔다는 신작 <사하맨션>은 오랫동안 작가가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촘촘히 들어차있다. 소설 속의 사회는 ‘타운’이라는 이름의 기괴한 도시 국가다. 기업의 인수로 탄생한 ‘타운’은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엄격한 통제로 유지된다. 공동 총리제를 도입하고, 무분별한 밀입국을 막기 위해 계급을 두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전문 지식 혹은 기술을 가진 L, 자격심사를 통해 2년 동안의 체류권을 가지는 L2, 그리고 그 둘에 모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하’라는 이름의 맨션에 숨어들었다. 각자의 상황을 가지고, 맨션의 이름을 따 ‘사하’라고 불리며 배척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작 소설처럼 펼쳐진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 모조리 귀 닫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작은 도시국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기시감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거대 기업은 거대 권력과 결탁하고, 주민이라는 이름 아래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타운의 주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2년마다 검사받는 L2의 인생은 비정규직의 일상과 닮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선한 사람들, 수상한 배의 침몰,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은 나비 혁명, 임신 중절이라는 이슈가 등장한다. 소설의 이야기는 격렬하지 않지만 그것을 읽는 내내 마음은 소용돌이친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여타의 한국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남주의 소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부분들이다.

“우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서로 미안하지? 나한테 진짜 미안해야 할 사람은 누구지? 아무도 내게 사과를 안 해.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요즘 분해서 자꾸 눈물이 나.” (117쪽)

사하 맨션에 정착한 사람들은 ‘몰려난’ 사람들이다. 폭력에 대항하다가 죄인이 되고,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죽음을 맞거나 사고를 내고, 조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이용당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들은 사회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약자들이다.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혐오는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밖으로,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매정하게 내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그리고 당연히 그 사람들은 사과를 할 생각도,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데도.

작가는 사하맨션에 들어온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들려주면서 사회의 부조리함을 조용히 고발한다. 연작소설처럼 시점이 바뀌는 소설의 흐름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닫히지 않는 결말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야기의 큰 굴곡보다는 대화나 장면 속에 숨겨진 분노들을 응시하며 읽기를 바란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
진경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고, 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등을 돌려 누우며 덧붙였다.
"나도 타운 주민이 되고 싶어." - P51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 그러니까 진경 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위로도 배려도 보살핌도 격려도 함부로 받지 말아요."
아니요. 위로받아도 됩니다. 위로와 배려를 받게 되면 받는 거고 받았더라도 따질 게 있으면 따지는 거고 그리고 더 받을 것이 있다면 받는 게 맞아요. 진경의 머릿속에 이아의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 P163

원장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만큼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고 그래서 아이를 낳는 곳은 아이를 낳지 않는 곳도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고 부주의할 수도 있고 상황이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P227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쁘지 않아. 어떻게든 둘러대는 사람들이 주로 나쁘지." - P240

―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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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 - 체육관에서 만난 페미니즘
양민영 지음 / 호밀밭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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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학교에서 열린 체력장 시간이 고역이었던 내가 운동에 관심이 생긴 건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이어트 카페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있었고, 충격적인 이야기도 쏟아져 나왔다. 가혹한 식단으로 식이 장애를 겪는 사람, 뚱뚱한 몸매를 면전에서 저격하는 친구와의 에피소드, 그렇게 원하던 마른 몸을 얻었지만 볼륨을 잃어버려 가슴 수술을 고민한다는 글이 있었다. 이후, 두 번째로 한 일은 브라탑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운동을 하다 보면 먼저 가슴 지방이 빠지고,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꼭 브라탑을 입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살이 빠지면 당연히 지방이 뭉쳐 있는 가슴이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여자의 멋진 몸매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빛나는 바디 프로필의 이미지는 운동을 하는 여성들도 대상화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근력운동을 하면서도 여자들의 근육은 ‘남자같이’ 울룩불룩하지 않아야 한다. 볼륨과 근육은 특정한 부위에 있어야 하며, 한껏 섹시한 모습을 자랑해야 한다. 이상적인 몸은 한결같았다. 건강과 체력, 혹은 운동에 대한 순수한 열망보다는 섹슈얼한 몸의 이미지가 전면에 드러났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생각하게 된다. '운동하는 여자'들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날씬하고 매끈하며 섹시한 건강미의 콜라병 같은 실루엣. 이러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의 건강미를 발산하는 여자들이 있다. 거칠고 힘이 넘치며 강한 투지를 보이는, 우리의 인식 속에서 마치 '여성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들. 그러나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일 듯한 모습들.

<운동하는 여자>는 오랫동안 남성적인 행위로 규정되었던 '운동'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다. ‘체육관에서 만난 페미니즘’이라는 부제가 적혀 있지만, 총체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상’에 대한 고민과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가 갖가지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경험을 토대로 갖가지 편견들과 이슈들을 담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강도 높은 운동을 시작하면서 '운동하는 여자'들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번 체감하곤 했다. 근육과 힘이 늘어나면 여성적이지 않아 여성의 범주 안에 들 수 없고, 훌륭한 능력을 보여도 '여자치곤 - '이라는 말로 평가 절하되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가 바로 '운동하는 여자'들이었다. 저자는 주짓수를 배우면서 여자들이 싸움에 무지한 이유에 의문을 품고, 헬스장에까지 메이크업을 하는 여자들을 보며 현실을 인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을 긍정하는 것과 예쁘게 치장함으로써 당당해지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66쪽)" 그리고 브라를 벗어던지고 힘차게 달린다. 자유로움을 향하여!

개인적인 경험은 책의 중반부에 이르러 사회적 문제로 확대된다. 출산 후 경력단절로 고생했던 '세리나 윌리엄스', 여자 선수와 남자 선수의 '샐러리 캡(팀 연봉 총액의 상한선을 정해두는 제도)'의 문제를 제기한 '김연경' 선수, 분노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맨스플레인의 대상이 되었던 '론다 로우지', 체육계의 성폭력을 고백한 '심석희' 선수 등,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스타들에게도 적용되는 여성차별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또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와, 반대로 외모지상주의와 고정관념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넷생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의 수많은 이미지들에 대해서도 문제 어린 시선을 던진다.

"넷생을 점유한 트렌드는 다시 현생에 영향을 끼친다. 넷생과 현생이 영향을 주고받는 양상을 살펴보면 체육관의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다. (…) 이 방면에 크게 관심이 없던 여성들까지 자신의 몸에 의문을 갖는다. 내 몸은 매력적인가? 얼마나 섹시한가? 충분히 말랐는가? 여기까지 도달하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순간이다. (…) 물론 인터넷 자아를 선택하고 연출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노출과 그로 인한 섹스어필이 쿨한 것으로 통하고 그 반대는 따분하고 경직된 것으로 여기는 흐름 속에서 그것이 취향이고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188쪽)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운동에 대한 즐거움과 투지를 얻길 바란다고 썼다. 남이 만든, 남이 투영한 모습이 아닌 진정한 '나'를 바라보고 자신을 긍정하기를 바란다고.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했고 체중계의 숫자와 칼로리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던 나는, 요즘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로 무언지 계속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는 중이다. 빼빼 마르거나 섹시한 몸이 아니라, 오로지 건강과 체력을 위하여 몸을 움직이는 것. 어쩌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진정한 행복을 찾아나가는 것이 바로 이쪽이 아닐까.

 

여성은 운동을 배우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법까지 함께 익힌다. 예를 들면 내가 처음 역도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동작이, 양 무릎의 방향이 바깥을 향하도록 벌리는 것이었다. 평영을 배울 때는 바로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같은 여성이어야 마음이 놓였다. 나중에 함께 운동하는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왜 아니겠는가? 여성들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다리를 오므리라고 교육받는데. - P17

하지만 문제의 ‘남자 같은 여성’은 진짜 남성이 아니다. 그래서 남성들의 비교 대상에나 머무른다. 이를테면 ‘여자도 이거보다 더 들어요’, ‘여자보다 기록이 안 좋군요’ 하는 말이 대수롭지 않게 오고 간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은, 운동을 하는 남성들도 이토록 다양한 평가와 비교를 당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운동은 남성적인 행위로 규정돼 왔다. 남성이 운동하는 것은 남성성을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환영받는다. 그렇다면 운동하는 여성에게 가하는 평가나 비교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운동하는 여성을 편견에 따라서 대상화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이들을 남성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 아닌가? - P35

덧붙여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우리 사회의 폭력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최초로 이 사건을 전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심 선수가 침묵해야 했던 4년의 세월과 그 지난한 고통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하며 침묵했던 시간은 나에게까지 아프게 와닿았다.
심 선수는 그 극심한 고통에 맞서서 세계 정상이라는 성적을 냈고 그런 다음에야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뢰할 만한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 이른바 꽃뱀을 골라내는 여론재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 P142

말하자면 우리는 단 한 번도 도와달라고 크게 소리치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목을 조르는 남자의 팔을 어떻게 부러뜨리는지 배우지 못했고 가해자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얼어붙지 않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요컨대 여성은 싸움을 모르고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그것이 여성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싸움은 너무 과격하다는 편견 때문에, 다칠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배려 덕분에, 싸움을 모르는 존재로 길들여진 것이다. 그 결과 일부 여성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마치 사칙연산을 모르지만 함수를 풀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폭력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인가?
- P83

우선 근육은 필수지만 너무 크거나, ‘예쁘지 않게’ 발달해서는 안 된다. 전반적으로 마른 가운데 근육질인, 전문 댄서 같은 실루엣을 갖춰야 한다. 여기에 복근과 애플힙이 반드시 추가돼야 하며 몸이 완성될 무렵에 인공 태닝 등으로 피부색을 어둡게 해서 더욱 슬림하게 보이게끔 효과를 준다. 화보의 콘셉트는 시선을 끌면서도 너무 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콘셉트를 선택하든 노출을 빼놓을 수 없다. 어렵게 만든 몸을 인정받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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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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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누군가가 죽는다. 그의 죽음을 못 견디게 슬퍼하다가, 언제까지나 절망에 빠져있을 수는 없어서 (사람이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그의 죽음을 비로소 인지하며 애도를 시작한다. 시작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나, 애써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거나 마음의 일부를 조금씩 떼어놓기 시작하는 시점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처 애도조차 시작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 어떤 이유도 밝혀지지 못하고, 무의미한 이유들로 진짜 이유가 숨겨지고, 더 이상 대답조차 할 수 없는 누군가의 죽음에 부조리가 더해진 때. 바로 권여선의 소설 <레몬>에서 등장하는 여고생의 죽음 같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꼬이고 꼬여버린 해언이라는 소녀의 죽음 앞에서, 작가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세히 그리는 데 집중한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단연 소녀의 가족들이다. 언니의 유별나고 위태로운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다언’은 이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킨다. 자신의 얼굴에서 언니의 모습을 속속들이 찾는 엄마를 보고 성형을 결심한다. 수년, 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죽음이 압도한 삶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한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동급생 ‘태림’은 그때의 기억을 잊기 위해 신에게 매달린다. 사건과는 관련이 없지만 자매의 고통을 지켜본 ‘정희’는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다언’의 모습에 또 한 번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 잡을 수 있는 것들을 붙잡고 꾸역꾸역 살아간다. 

사건의 진실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는다. 의뭉스러운 채로 넘어가는 것이 결코 시원치는 않으나, 세상엔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입을 닫고, 누군가는 보지 않았다고 세뇌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위해 비밀을 만든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을 관망한다는 신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신은 있는가, 어쩌면 신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그동안 작가의 장편소설을 생각하면 사실 이 소설은 조금 느슨한 감이 있다. 이전의 소설들이 울먹이며 꽉꽉 채워진 느낌이라면, 이번 <레몬>은 하고 싶은 말들을 조금씩 삼키는 느낌이었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생략된 부분을 읽어내는데 약간의 수고가 들어가는 책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줄을 넘기고,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한꺼번에 모든 답답한 가슴이 품어졌다고 이야기한다면 과장일까. 소설 속에서 삼켜진 모든 말들을 다시 은은하게 채워 넣는 ‘작가의 말’ 전문을 나는 책상 한편에 베껴 적어 놓고 종종 읽어보려 한다.

“사람이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을 수 없다는 걸,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아는데,
저는 그게 가장 두렵고,
두렵지만, 두려워도
삶의 실상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삶의 반대는 평(平)인 것인가,
그래서 나는 평하지 못한 삶의 두려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그러나 우리는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눈앞에 임박한 대입시험의 생생하고 폭력적인 부담감이 모든 정서적 충격을 녹여버렸다. 그래, 몇명이 사고를 당하고 유학을 가고 전학을 가고 이런저런 이유로 떠난 것뿐이야. 그래도 우리는 여기 그대로 남아 있잖아? 죽을 맛이야.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사는 게 이게 뭐냐. 이게 사는 거냐. 그런 식으로 그 사건은 우리에게서 끝이 났다. - P57

다언은 내가 계속 시를 써으면 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언을 관찰하고 다언의 말을 들으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관대한 척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언에게 내 속을 들키자 발끈하여 그녀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나는 자문했다. 나 또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 P67

나는 사물들을 누르거나 밟거나 던지곤 했다. 필연적으로 그 사물들은 보드랍고 물렁하고 깨지지 않는 것들이어야 했다. 그 이유는 내가 부딪치거나 깨지는 소리를 도저히 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콱, 퍽, 와작하는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끔찍한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그 소리를 귀로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았다. 무엇인가 단단한 것이 단단한 것과 부딪쳐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고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눈앞에 파열음과 굉음들이 만들어내는 타는 듯한 지옥도가 펼쳐졌고 그 한영을 보는 내내 피처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P93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단호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래 다져진 땅 같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다언의 관념은 곱씹고 또 곱씹어 어떤 날도 들어가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노인들의 그것보다 더 무섭고 더 죽음에 가까운 듯 보였다. - P179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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