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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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스스로의 일에 변덕을 부리는 순간들을 생각한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것, 눈물 나게 힘들다가도 이 정도론 더 버틸 수 있다고 위안하는 것, 혼자가 좋다고 하지만 정말 혼자라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 누군가를 싫어했다가도 못이긴 척 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 금세 미소를 띠고 살아가는 것. 이랬다저랬다 수많은 일들을 변덕스럽게 뒤집는 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삶을 버텨나가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꼭 붙잡고 삶의 흐름과 관성을 유지해나가는 것과 같이.

박소란의 몇몇 시를 읽고 감동한 적이 있다. 우연히 마주친 시였고, 하나의 시를 읽는 것과 시인의 궤적을 품고 있는 한 권의 시집을 통째로 읽는 것은 당연히 결이 다른 얘기였기에 나는 또 경험해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다. 초반부터 조금은 두근대는 마음이었다가, 점점 조금씩 벅차올랐다. ‘괜찮다’는 말 가운데서 머뭇거리고 변덕을 부리던 일들이 떠올랐고, 모두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시인의 말에 살짝 울컥하기도.

심야 식당의 우동이나 퇴근길에 산 상추 한 봉지, 방바닥에 깐 전기장판과 같이 정감 가는 소재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끔은 작은 공간에서 혼자 무언가에 감탄하거나 위안을 받고, 가끔은 주저앉아 맥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가끔은 많은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이 속에 나는 있다 / 지금은 안심할 수 있다 (108쪽, <천변 풍경>)고 말하는 시인의 일상은 익숙한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가. 어쩌면 조금은 다를지 몰라도, 견딜 수 있다거나 잊으면 그만이라고 다독이거나,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살아있다고 매번 다짐하는 시인의 말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곤 하는 것.

“벽돌에게도 밤은 있고 / 또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아픈 기도의 문장을 읊조리기도 할테지만 / 그것은 단지 벽돌의 일 / 당신과는 무관한 일” (114쪽, <이 단단한>)

시집을 읽으면서 자꾸 이 시를 보내주고 싶은 사람들 생각이 났다. 책을 자주 읽지 않아도, 시를 어색하거나 낯설어하든 간에 찬찬히 읽어내리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것 같아서. '한 사람이 돌진하여 슬픔을 쏟아내고, 그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그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는 (65쪽, <감상>)' 일을, 나도 조심스럽게 따라 해보고 싶다고 나지막이 다짐해보는 밤이다.

 

 

 

 

 

 


● 18쪽, <비닐봉지>

퇴근길에 김밥 한줄을 사서

묵묵한 걸음을 걷는



묵묵한 표정을 짓는

입가의 묻은 참기름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 때마다

알 수 없는,

참 알 수 없는 맛이다



● 20쪽, <심야 식당>

모르겠어요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 86쪽, <벽>

언제부터

벽은 거기에 있었나

벽에 기대어 생각했다 벽의 아름다운 탄생에 대해



벽은 온화하고 벽은 진중하니까 벽은 꼭 벽이니까

● 93쪽, <모르는 사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 100쪽,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을 잃고 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

갖지 않고도 산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나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게 되었다

머리핀이 아니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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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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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고 좁은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올라간다. 세월의 흔적이 약간은 느껴지는,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돌벽과 촌스럽고 정겨운 초록색의 바닥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은 옥상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수많은 불빛이 뒤섞여 새로운 색을 만든다. 떠들썩한 소리 속에 고요한 옥상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분명 거리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이런 옥상의 풍경을, 귀엽고 키치한 그림 속에 그대로 담은 이 책의 표지가 퍽 마음에 든다. 딱 정세랑의 작품 이미지 그대로였으니까. 광각으로 담은 듯한 세상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결코 무거워지지 않는 재기발랄한 정세랑의 세계같다.


초반에 나왔던 <웨딩드레스 44>는 표현력이 재미있는 소설이라 인상 깊었다. 분량 면에서는 단편이지만 묘하게 장면을 읽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최근 읽고 있는 작가의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의 축소판 같기도 했다. 단 하나의 웨딩드레스가 수명을 다하기까지 거쳐갔던 44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은 작품의 주인공이라 하기엔 너무나 많은 인원을 내세웠지만 뒤죽박죽 어지럽지 않았다. 이유도 상황도 제각각인 그들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하고, 그 시선 속에는 각자 나름의 행복과 불행이 모두 들어 있었으니까.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을 가늠케 하는 단편들도 이어졌다. 오컬트와 뱀파이어, 판타지와 SF……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독특한 장면들 속에서,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와 상징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격한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특별한 연대를 그린 <옥상에서 만나요>, 뱀파이어가 된 여자의 이야기 <영원히 77 사이즈>, 쿠키 귀를 가진 남자의 이야기 <해피 쿠키 이어> 같은 단편들은 정세랑 작가여서 쓸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작가로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풀어낸 느낌이랄까.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작가의 역량인데 이 자유로움이 어색하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단편을 꼽자면, 돌연사한 사람들의 데이터를 모아 네트워크를 만드는 <보늬>와, 이혼을 앞두고 집안의 살림들을 친구들에게 되파는 <이혼 세일>이 기억에 남는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선호하는 성향상, 이런 단편들이 조금 더 깊이 다가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매력적인 소설들이 가득했다.


표면적으론 독특한 배경과 장르로 작가만의 개성을 보여주던 단편들이었으나, 파고들어가면 사람 하나하나의 관계를 깊이 고민하게 하는 시선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작품들 속 한 인물, 한 인물들에게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입해보고 있었다. 과거에 만났던 이들, 지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들, 미래에, 내 눈 속에 담게 된 이들, 혹은 나의 모습들. 그리고 다정하게 불리는 이름들. 전체적으로 시원하고 상쾌한 소설들이어서 불행을 이야기해도 전혀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 33쪽, <웨딩드레스 44>

"자기는 왜 그런 생각을 안해?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 공동체가 된 거라고."

"평안하게 끝까지 잘 사는 사람들도 아주 없진 않잖아?"

"그런 경우라 해도 평균수명을 생각해서 일곱살쯤 어린 남자를 사랑할걸."

여자는 푸념했고,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간 어두운 생각 좀 하지 마."

남자는 간단하게 말했다. 여자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두워. 사랑은 어두워. 가족이 된다는 건 어두워. 어두운 면은 항상 있어. 아이를 낳으면 설마 그 아이의 죽음까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일까? 여자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누운 채로 늘어날 두려움을 헤아려보았다.

● 43쪽, <효진>

적의에 대해 생각해. 적의에 오래 노출되고도 괜찮은 사람은 여기든 거기든 없을 거야. 그 나쁜 입자들을 씻어낼 수 있는 샤워 비슷한 게 있다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간편한 에어샤워 같은 것.

울면서 만든 베리타르트의 맛을 두고 컴플레인이 걸려오진 않았어. 슈거파우더로는 거의 모든 걸 덮을 수 있지. 사람들의, 관계의 가장 저열하고 싫은 부분까지도 말이야.

● 133쪽, <보늬>

유전자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의 심장이 너무 지쳐버렸나. 셋이서 고민하기도 하고 혼자서 고민하기도 하다가 어떤 날은 아예 고민하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일정 퍼센트의 어린 개구리들도 그냥 죽는지 모른다. 일정 퍼센트의 낙타들도, 박쥐들도, 악어들도, 문어들도. 우리가 인간이라서 자연스러운 도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불며 이렇듯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모든 것으로부터 한발짝 뒤로 물러서는 마음이 드는 그런 날이 있었다.

언니는 도태된 것일까. 종이 가만히 버리고 가는 일부였을까. 달팽이 진액처럼 뒤에 남았나.

● 216쪽, <이혼 세일>

들을 때는 별 도움 안되는 소리를 한다 싶었지만, 그후 지원은 이상하게 이재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고정되지 않았어, 고정되지 않았어, 하고 주문처럼 되풀이했던 것이다. ‘보기 드물게 일관적인 양육자‘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에는 ‘보기 드물게‘ 쪽에 방점을 두어 스스로를 칭찬하고, 어떤 날에는 ‘일관적인 양육자‘ 쪽에 방점을 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랬기에 지원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맡기고 이재의 이혼 세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서 무언가 근사한 말을 돌려줘야 했다. 주문 같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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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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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과 친하진 않지만 매번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독특한 소재를 참 다양하게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조금 더 열려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인지 더욱 자유로운 느낌. 이 소설도 상당히 특이합니다. 보통 ‘사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죽음의 의미 때문인지 어둡고 음산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요. 책 속에서 그런 이미지는 완전히 반전됩니다. ‘사신’에 ‘아르바이트’라는 말을 붙여서 귀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사신 아르바이트라니, 상상을 해봐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요.

소설 속 내용에 따르면 ‘사신’은 ‘미련이 남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사자’를 저세상으로 보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사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완벽하게 후련한 죽음보다는 미련이 남는 죽음이 세상엔 더 많을 테니까요. 미련을 품고 죽은 사람들 중 드물게 누군가가 사자로 탄생하게 되면 세상은 ‘추가시간’이란 이름의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합니다. 이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은 오직 사신만 기억할 수 있고, 곧 다시 찾아올 죽음 앞에서 미련을 떨치고 떠나기 위해 사자는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소설은 막대한 빚을 얻고 꿈을 잃은 채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친구가 다가와 사신 아르바이트를 제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쥐꼬리만한 급여에도 불구하고 이 사신 아르바이트를 수락한 건 근무기간을 채우면 소망 하나를 들어준다는 특별한 보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강조한 친구의 말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생각지 못한 작은 보상들을 층층이 쌓아 갑니다.

행복은 뭘까. 먼 기억 속 누군가가 물었다.

이제는 안다. 지금이 행복함을 아는 게 행복임을.

잃기 전에 깨닫는 것.

잃었더라도 행복했음을 기억하는 것.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기억해낼 수 있는 것. (335쪽)

목적이 분명한 소설입니다. ‘사신’의 일이 오로지 사람들의 행복만을 빌어주기 위해 생겼듯, 이 책 또한 사람들의 행복과 희망, 감동을 위해 쓰인 듯 보입니다. 주인공을 포함한 소설 속 인물들이 비밀을 풀어나가고 성장해나가는 모습과, 중간중간 행복에 관한 말들을 늘어놓는 것 자체가 힐링 소설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건 특별한 소재에 비해 분량을 채우는 대화들이 조금 빈약하게 느껴졌다는 점이지요. 꽉 채워지지 않고 분위기를 타고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삶을 사랑하는 작가의 메시지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잃었더라도 행복했음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구절을 계속해서 오물오물 반복할 것 같습니다.

 

● 55쪽,

"어, 그래."

오늘 밤은 여느 때의 ‘또 보자’가 아니었다. 왜일까.

혼자 걷는 밤길은 무더웠다. 구름에 가렸는지 방금 전까지 빛나던 달이 보이지 않았다.

- 오늘 밤을 소중하게 간직해.

어째서인지 하나모리가 남긴 말이 문득 떠올랐다.

● 87쪽,

구슬 일곱 개를 모으면 나타나는 용신처럼, 뭐든 말하라고 해놓고 ‘그건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 애당초 희망을 신청한다는 표현도 걸린다. 하나모리에게도 확인했지만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과도한 기대는 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어떤 소원이라도 이루어준다면.

● 157쪽,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돌이켜보기 싫기 때문일까.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사자’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분명 히로오카도 그렇겠지. 후회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미련에 관해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실은 남에게 들통나서 편해지고 싶다. 그런 딜레마를 안고 지내온 것이다.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추가시간을.



● 294쪽,

"추억을 만들자."

"응?"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희망을 끌어낸다.

"결국 잃는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웃으며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분명 아주 의미 있는 일이겠지. 슬픔을 없앨 수는 없어. 하지만 슬픔을 능가할 행복을 찾아낸다면 분명 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거야. 아사쓰키한테 배웠는데, 과거에 괴로워하기보다 내일에 희망을 품어야 행복해질 수 있나 보더라고. 우리도 마지막으로 그런 기적 같은 시간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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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엘레지 읻다 시인선 2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지음, 최승자 옮김 / 읻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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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로 쓰인 ‘시’를 번역한다는 건 어떤 문학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시를 잘 몰라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의 시선과, 초점이 맞춰진 순간과, 행간의 리듬을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 이 책이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었으며, 작가와 텍스트와 번역가로 이어지는 흐름을 오랜만에 깊이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낯선 시인의 시를 익숙한 시인이 이어준다. 게다가 둘의 ‘케미’가 너무 좋다는 게 느껴진다. 조금 든든한 기분이 든다.

빈센트 밀레이라는 이름은 낯설었지만 알고 보니 다른 시 모음집에서 그의 시 한편을 마주친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도 일부 암송되는 시가 있었다. 한국의 여성 시인이 자신의 책에서 시를 거론한 적도 있었다. 이리도 낯설고도 가까웠던 빈센트 밀레이는 20세기 미국의 대표 시인이자 여성 최초의 시 부문 퓰리처상 수상자였으며, 생전엔 자유를 갈망하는 페미니스트와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페미니즘 색채를 띤 것은 아닌데, 오히려 시에서 계속 반복되는 언어들은 슬픔과 죽음에 가까우며 전체적인 이미지는 고요하고 웅장하다.

인생은 그 자체가

빈 술잔, 주단 깔리지 않은 층계.
해마다, 이 언덕 아래로,
사월이 재잘거리며, 꽃 뿌리며
백치처럼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18쪽, <봄>


죽음과 허무, 슬픔의 언어들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시는 죽음의 고통이나 어두운 부분에 대해 깊게 집중하는 것 보다도, 언젠가 찾아오게 될 죽음을 통해 삶을 각성시키는 듯한 몸짓으로 느껴진다.
“삶은 계속되어야 해. 정확히 그 이유는 잊었지만” <비가>라는 시 속의 문장으로 이 몸짓을 설명할 수 있을까. 상실과 고독과 슬픔을 부르짖으면서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어디론가 나아가야 하는 시인이다. 이유 모를, 삶에 대한 의지는 계속된다. 거의 안간힘에 가까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어느 순간 많은 의미를 품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삶의 모호함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아름답고 사소한 것들이 서서히 쌓이고 쌓인다. 의지는 아마도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의 경우엔 사소한 무언가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이 계절에 읽기 좋은 시집이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함께 느껴지니 신기하고 몽롱한 기분. 그래서 이상하게 반복해서 읽게 된다. 곱씹을 수록 더욱 차갑고 뜨거워진다.

 


 

● 12쪽, <슬픔>
사람들은 옷을 차려입고 시내로 간다.
나는 내 의자에 앉는다.
나의 모든 생각들은 느리고 갈색이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아무래도 좋다. 어떤 가운을 걸치든
혹은 어떤 구두를 신든.

● 89쪽, <죽음>
아늑하고 고요하게 누운 채로,
만일 내가
그 속에 앉아서
주의 깊게 듣고 엿보는
감각할 수 있는 나를 가진
감각할 수 없는 물질일 수 있다면,
나는 죽는다는 것과
흥정을 시작할 수도 있으리라.

● 104쪽, <눈 속의 수사슴>
눈 속의 수사슴을 무릎 꿇게 하고 가지 쳐진 그의 뿔을 꿇게 하는
죽음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이냐.
지금쯤엔 아마도 일 마일 떨어진 곳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의 깃털을 떨어뜨려 제 무게를 조금씩 없애는 묵직한 독미나리 숲 아래서,
그 암사슴의 눈으로 주의 깊게 본다면,
얼마나 이상한 것이냐, 삶이란.

● 126쪽, <당티브 곶>
나는 뭍보다는 바다 편인지라, 밤에 폭풍우에 세차게 채찍질당했던 나의 부루퉁한 마음은 그렇게 빨리는 가라앉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들 속으로, 둔중한 울림과 함께
바다는 철썩철썩 밀려왓다
물러간다.
잔잔한 낮에 내 곁에 있을 때조차도 심란해진 지중해는 묵직한 큰 파도와 함께,
새들이 재잘대는 해변으로 기울어져 부딪친다.




● 130쪽, <유년은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죽은 살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다.
그들은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차를 마시지도 않는다.
생전에는 차가 낙이라고 말했으면서도.
(…)
너의 차는 이젠 차갑게 식었다.
너는 그것을 선 채로 마시고
그리고 집에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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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크러시 1 - 삶을 개척해나간 여자들 걸크러시 1
페넬로프 바지외 지음, 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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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역사는 강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쓰여진다. 중요한 사람, 정말로 역사에 길이 남아 두고두고 이름이 불려야 할 사람……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닦아준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를 기록하는 후세들을 통해 분류된다. 누구나 어릴 때 위인전 한 권씩은 읽었을 것이다. 한국을 벗어나 세계의 많은 위인들을 만나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이상한 점이 있다. 여성 위인들의 이름은 다 어디로 갔던 걸까. 인생의 모토로 삼는 여성 위인을 찾고 싶지만, 워낙 손에 꼽을 만큼 한정되어 있어서 남성 위인을 고르거나 겹치는 인물들을 고르기 일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로 외우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가사에는 여자의 이름이 단 네 명뿐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아, 그때는 진짜 모르고 즐겁게도 불렀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물론 있었겠으나, 여성이 뭔가 해보려고 하면 행동 제약을 걸어버리는 시대상황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걸크러시>는 프랑스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웹툰이다. 남성 우선적인 사회에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사회에 반항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여자들의 삶을 짤막한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뤘다. 1권과 2권을 합하여 총 30명의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국적도, 직업도, 나이도 다른 여자들의 공통점은 세상의 편견에 맞서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갔다는 점이다. 왕, 전사와 탐험가, 부인과 의사, 독재정권에 맞선 운동가, 화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 자신의 위치에서 다양한 일을 했던 여자들이 있었다. 꿈을 이루기 전부터 걸림돌로 작용하는 많은 사회적 제약뿐만 아니라 끔찍한 폭력과 억압 또한 존재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떠올려보자면 여성 수영복을 최초로 만들어낸 '애넷 캘러먼'이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엄숙주의는 호주에도 영향을 끼쳤고, 여자들은 대낮에 수영도 하지 못할뿐더러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불편한 옷을 입고 물속에서 헤엄을 쳐야 했다. 애넷은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수영복을 만들었고, 뒤이어 올 누드 수중 연기로 영화계에 위대한 도전을, 여성들의 몸과 건강을 위해 끊임없이 권유하고 노력했다. 또한 강력한 페미니스트 운동을 이끌었던 노벨 평화상 수상자 '리마 보위',  아테네 여성들이 의술을 배울 수 있는 첫걸음을 뗀 부인과 의사 '아그노디스'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을 한 여자들도, 뚜렷한 정점을 찍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길을 당당하고 자신 있게 걸었던 여자들의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책에서 주목할 점은 아마도 업적의 중요도보다는 자신의 일과 소신을 꿋꿋하게 지키며 살아갔던 그들의 삶의 양식일 것이다. 어려운 사회적 상황에 대항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 책 속의 여자들의 행동과 언어들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용기까지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단 한 가지로 규정될 수 없는 '페미니즘'의 다양한 모습들을 여자들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 덧, 한국이란 작은 땅에서 여성으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들도 더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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