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묵묵하고 먹먹한 우리 삶의 노선도
허혁 지음 / 수오서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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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버스 기사님들에 대해선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크게 없다. 늘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보다 선명하게 남지만 크게 거슬리는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꽤나 무감각하게 타고 다녔던 모양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가 있는데, 늦은 밤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버스를 탔던 날이었다. 어둑하게 조명을 최소한으로 한 버스가 고속도로를 지나고 정류장이 있는 시내로 들어오니 벨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각각 다른 사람들이 한 정거장에 두 번 울리는 일도 반복되었다. 버스 기사님은 하소연이 섞인 짜증을 내다가 ‘벨 좀 한 번씩 누르라’고 호통을 쳤다. 기사님의 업무 환경을 생각하면 소리 때문에 미치겠다는 말도 수긍이 가는데, 먼 거리를 이동하는 승객들이 정류장을 지나칠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누르는 것도 나쁜 마음이 아니란 걸 알기에 상황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고요 속에서 불편한 냉기가 감돌았다.

 

이전에 알고 있던 책이지만 이 사건 때문에 다시금 급하게 책을 찾아보았다. 버스 기사님들의 업무와 생활 반경, 감정들이 궁금했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는 실제 전주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입사 5년 차 기사님이 쓴 에세이다. 전주는 특히 버스 대수에 비해 노선이 많고, 승객들의 불편함 호소도 많은 지역이라 한다. 물론 지역에 상관없이 버스기사들의 악명 높은 업무 환경은 여기도 비슷한 수준인 듯 보인다.

 

저자는 하루 열여덟 시간씩 버스를 몰다 보면 착한 기사와 비열한 기사의 마음을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한다고 말한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참을 수 없고, 표정 관리가 격하게 힘들어진다. 끼니와 생리적 욕구 또한 신경 쓰기 힘들고, 연료 충전과 버스 청소 등 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업무를 넘어, 일상까지 버스의 속도로 달려야 하는 셈이다. 고작해야 한 시간 이하로 이동하는 일이 대다수인 시내버스 승객들은 수시로 일어나는 도로 위의 아찔한 상황과 기사들의 고충을 알 턱이 없다. 악의가 아니라 그냥 무심하게 지나가거나, 왜 내가 탑승한 시간에 기사가 불쾌감을 표출하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짜증 나고 당황스러운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꺼내놓고, 가끔은 툴툴거리며 당부하는 저자의 글은 재미있고 통쾌하다. 제대로 솔직해서 좋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책을 보는 느낌도 비슷하다. 읽다 보면 어느새 덜컹거리는 우리 동네 시내버스에 올라 있는 듯하다. 나는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는 것을 살피고 티가 나는 수신호를 주고, 조금 더 세심하게 주변과 운전석을 살피고, 대답이 없어도 눈치 보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심코 지나치던 누군가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건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상황을 모르니까 그냥 지나치고, 이유를 모르니까 억울하다 (서로 시비를 걸고 싸우는 건 보통의 일이 아니라는 전제를 두고).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이 배려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또한 승객과 기사 사이의 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해결돼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육체와 감정을 넘나드는 노동 현실의 개선을 넘어 저자가 전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삶 전반의 속도가 조금 더 낮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이다.

 

● 22쪽,
윤리적 판단을 하기 시작하면 바로 운전대 놔야 한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도 그러려니 하며 무심하게 빠져나갈 수 있어야 운전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인지라 서서히 화는 쌓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던 길이 막히면 화가 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운전할 때 유독 짜증이 심해지는 것이 인격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 76쪽,
외진 도청 앞에서 목이 빠져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던 가난한 승객들에게는 양심이 준 선물이다.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잔뜩 열이 받아 있는 승객이 화를 풀 길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기사밖에 없다. "어이 기사, 이 버스 몇 시 차여. 여기서 얼마를 기다렸는지 알어?" 눈물 나서 대꾸도 하기 싫다. 대꾸도 않는다고 또 시비다. 앞차를 빼먹은 동료도, 항의하는 승객도 그 어떤 누구도 잘못이 없다.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는 옳고 자기 인식 수준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삶이 징그럽게 외롭고 고독한 대목이다.

● 79쪽,
산다는 건 리듬을 타는 일이다. 그 리듬으로 한 사회의 성숙도를 알 수 있다고 본다. 저상버스가 휠체어 탄 승객을 싣기 위해 리프트를 펴는 잠시 동안에도 ‘빵빵‘ 거리며 도로가 난리가 난다. 버스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속도가 지금보다 확실히 낮아져야 한다.



● 116쪽,
시간에 대한 삶의 태도가 제각각인 시내버스에는 운행 정시성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현실은 간단치 않다. 적폐기사와 공정기사, 적폐승객과 공정승객이 마구 뒤섞여 있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항상 타는 시간에 버스를 탈 수 있어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 기사의 운전습관이나 도로 사정에 따라 운행 중간지점부터는 10분 이상 차이가 날 수 있다. 버스가 많은 노선은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버스가 귀한 노선은 한 번 놓치면 몇 시간이라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다.

● 160쪽,
버스기사는 운전원이면서 동시에 승무원이고 청소원이다. 운전은 기본이고 승무원의 역할이 더 강조되고 있다. 운전하려고 취업했지 스튜어디스 하려고 온 것 아니다. 당신 같으면 하루 세 번 이상 혼자 사무실 청소 다 하고 수시로 민원인들 상대하가며 생명을 담보한 주 업무는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언제나 친절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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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디어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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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먹은 보랏빛의 표지 그림을 보자마자 어떤 정보도 없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흔하디흔한 첫사랑의 추억을 다룬 그래픽 노블이라는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따로 책 소개를 찾아보지 않은 채 책을 펼쳐 보았다. 의외로 분량은 적었다. 아이들의 그림책이 생각날 정도로 글밥도 많지 않았다. 여백이 많다는 건 무수한 설명과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고, 열려 있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독자라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책의 분량만큼이나 짧은 시간 동안 마지막까지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정말 묘- 했다. 어, 도대체 이게 뭘까. 신기하고 이상하다.

 

다양한 행동과 사건에 ‘첫’이 붙으면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설렘과 두려움, 황홀함, 두근거리는 다양한 감정이 함께 들러붙어서 느낌은 오묘해진다. 책 속에는 두 명의 소녀가 등장하고, 사춘기 소녀들이 으레 주고받을만한 얘깃거리로 대뜸 첫 장면이 시작된다. 다소 충동적이거나 불안하고, 신중하고 세심한 소녀들의 마음이 한 장의 그림들로 표현된다. 둘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도, 어떤 큰 사건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대신에 아주 일상적인 대화와 장면들만 뜨문뜨문 등장한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확실치 않은 그들의 마음들과 걱정과 두려움, 감정들을 조각조각 하나씩 보여줄 뿐이다.

 

순서도 없고,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이 뜨문뜨문한 이야기가 꽤 어색하지 않게 다가왔는데, 나에게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무수한 '처음'들을 기억하는 방식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감정적으로 깊게 빠져들었던 상황을, 때로는 아무 의미 없이 던졌던 말들을, 때로는 그냥 같이 앉아 있던 일들을 무심코 떠올리듯이. 정말 내가 언젠가 겪었던 일들을 추억하고 연상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 짧은 책이 불러오는 긴 여운과 남다른 분위기는, 단순히 ‘첫’이라는 단어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건 아마도, 흐르지 않는데 책 속에서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음악'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내 감정 그대로를 담은 듯한 음악 한 곡을 감상하는 것 같다. 그림과 음악과 대사, 그리고 따뜻하고 서툴고 공감되는 감정들. 어쩔 수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조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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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문 테이크아웃 10
최진영 지음, 변영근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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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 대였을 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정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었을 때 했던 말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자살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 그거 너무 무섭지 않아?" 누군가에게 툭 던졌던 그 말은, 생각해보면 생이 무척이나 행복해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 반대도 아니었으며, 단지 고통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던 어리숙함 때문이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삶을 꾸역꾸역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 죽음으로 향하는 순간의 고통이나 두려움보다 더 힘든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자살을 선택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내 곁엔 없지만 어딘가에 무수히 있는 그들. 그들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 곁에 있던 사람들을 왜 남겨두고 떠났냐고 무책임을 질책하는 말들은 얼마나 날카롭고 무의미한가.

 

'자살'하면 흔히 이유를 찾는다. 실제 상황에서도 그렇고, 픽션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이의 관계, 사회의 폭력, 병 혹은 가난, 온갖 이유를 대어 설명한다. 그래야만 말이 된다. 관계없는 사람에겐 일종의 편의로 작용하고, 관계 깊은 사람에겐 오직 그 방법 밖에는 없기에 이유를 찾는 것에 매달린다. 소설 <비상문>에서 자살한 ‘신우’의 형인 화자도 그러한 이유에 대하여 끊임없이 되묻는다.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짐작이 되는 일도 없는데, 왜 동생은 삶을 끊어내길 선택했을까. 비상구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에서 잠깐 멈춘 9분 57초의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떨어지기 전에는, 그 순간에는, 아니 그전의 모든 순간들 속에서는.

 

"빛난다는 건 손실된다는 것(24쪽)" 물리 문제집에 쓰여 있던 법칙에 의미 부여를 하듯이, 화자는 수많은 단서들을 찾는다. 언젠가 '말했을지도 모를' 이유와 겉으로 드러나던 모든 사실들을 되짚어본다. 이를테면 부모님의 불화 같은 것들과 유독 예민하던 신우의 시선들과 그가 했던 모든 말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유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상상하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 아닐까. 삶도, 죽음도, 이유 없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떠올랐다면 너무 식상한 것일까. 이 짧은 소설에서도 최진영 작가는 그동안의 소설들로 오랫동안 천착해 온 소설의 중심점을 드러낸다. "매우 사랑하면서도 겁내는 것이다. 이 삶을." 소설 끝에 실린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그토록 어지러운 삶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말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 속에서 설명하고 매달릴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해보자고.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가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서두진'씨와 '이재영'씨와 그다음의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는 것처럼. 죽은 동생을 투영하며 끊임없이 '생'을 확인하는 것처럼.

 

표지와 내지를 온통 감싸고 있는 따뜻한 파란색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잔상처럼 남는다. 어두컴컴한 계단에 머무르는 비상구의 푸른빛처럼, 순간적으로 쨍하게 시리고 아프다가도 눈부시게 아름다워지는, 그런 소설이다.

 

 

 

 

● 16쪽,
사람마다 시력이 다르듯 존재의 어둡고 습한 부분을 유독 잘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남들은 찾지도 못하는 얼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남들은 듣고도 들은 줄 모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감각이 그쪽으로 유별나게 발달한 사람들. 나는 신우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 17쪽,
신우가 죽어서 내 인생이 달라졌는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모르겠다. 신우가 죽지 않은 삶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우습게도, 그리고 끔찍하게도 나는 동생이 자살하지 않은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동생이 죽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어떤 식으로 상상해도 동생은 죽는다. 내가 화를 내거나 울거나 사정하면 동생은 죽지 않겠다고 나를 안심시키고 결국 죽는다. <최신우가 살아 있다면>이란 가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우의 죽음은 단단한 뼈처럼 내 삶에 고정되어 버렸다.

● 38쪽,
아니다. 신우는 너무 믿었다. 그 정의와 가치를 신뢰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공평하지 않은 것에 공평함이란 단어를 쓰는 것, 기회도 아니면서 기회라는 팻말을 내거는 뻔뻔함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나는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는 것들을 신우는 따지고 들었다.
그 누구도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없어. 똑같은 원을 그리는 사람도 있을 수 없고. 하나하나 다르다고.
나는 신우의 불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 68쪽,
빛 같은 것? 빗물 같은 것? 신우는 다른 것이 되고 싶었나? 빛과 빗물은 무수하고 최신우는 하나뿐인데 어째서? 태양과 달은 낮과 밤에 보이지만 한 공간에 있다. 행복도 불행도 한 공간에 있고 그것이 유난히 잘 보이더라도, 우리는 굳이 그것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것 아니라도 별은 무수히 많다. 세상은 점점 더러워지고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네가 어디 있고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도록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게 우주의 법칙이니까. 그런 세상을 같이 살면 좋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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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출산에서 어떻게 소외되는가 - 우리가 몰랐던 출산 이야기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7
전가일 지음 / 스리체어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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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기 전 출산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은 얄팍한 성교육으로만 접했던 간단한 사실들뿐이었다. 되돌려 생각해보니 우리는 학교에서 임신과 출산에 대해 세세하고 정확하게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세포가 어떻게 아기가 되고, 아기가 어떻게 자라는지에 관해서는 열심히 배운 기억이 있는데 출산의 과정에 관련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미비했다. 아기가 엄마의 몸속에서 거의 빠져나올 때쯤 의사가 회음부 절개를 한다는 것도, 출산 후 한 달까지도 ‘오로’라 불리는 분비물을 배출할 수 있다는 사실도, 제왕절개 출산도 엄청난 고통이 있다는 사실도 성인이 돼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임신과 출산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했다. 그러니 무지한 비경험자인 나로서는 이 제목을 보고 의아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출산은 분명히 여성이 주체가 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소외받는다는 것인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또 어떤 식으로 여성의 인권이 뭉개지고 있는 것인가.

 

알고 보니 책은 의료화된 출산의 문제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자는 세 아이를 출산할 당시 모두 조산 ― 요즘 흔히들 이른둥이라 부르는 ― 이 되었고, 날짜를 꽉 채운 일반적인 출산보다 더욱 긴장되고 다급한 순간들 속에서 의료화된 출산의 폐해를 경험했다. 그는 출산 당시 생생한 감각을 전달하기 위하여 ‘일화적 내러티브’ 형식으로 책을 기술했고, 다양한 방식을 비교하기 위하여 지인과의 인터뷰도 수록했다.

 

저자는 처치실에서 홀로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었던 두려움의 시간을 회고하며, 지극히 의료화된 출산의 과정에서 느꼈던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다양한 문제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출산을 하는 산모의 ‘주도권’은 없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출산하는 것이 ‘당연하고 일반적이고 정상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현대의 출산 과정에서, 산모는 아기를 품고 있는 주체가 아니라 단지 빠르게 아이를 빼내야 하는 ‘환자’가 된다. 아기가 나오기 좋은 자세보다는 의사가 처치하기 좋은 자세로 오랜 진통을 견뎌야 한다. 의학적인 지식 앞에서 어떠한 질문과 협의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빠르고 신속한 출산을 위해 원하지 않는 의료적 처치를 감내해야 하고, 때로는 조금만 기다리면 아이가 나올 수 있는 상황에도 의료진 입장에서 ‘비교적 간편한’ 제왕절개 수술을 시행하기도 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이러한 문제점 속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산모의 두려움을 볼모로 하고 있다(67쪽)’는 것이다.

 

“여성이 출산 과정에서 자기 몸의 주인이자 출산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비로소 “분만을 당하는 delivery” 것이 아니라 “출산을 하는 give birth to” 것이 될 수 있다. (106쪽)”

 

아울러 각자의 상황 속에서 다른 방식의 출산을 경험한 세 여자의 대담이 이루어지는데 이 부분도 굉장히 흥미롭다. 외국의 출산’과 ‘자연주의 출산’이라는 다양한 출산 경험을 전해줌과 동시에, 성숙한 토론을 통해 한국의 출산 의료화와 임산부의 소외 문제에 관하여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의학이라는 학문의 지향점과 의료계의 현실,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의료 시스템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며, 무엇보다 ‘출산’ 자체를 받아들이는 임산부의 자각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듯 감정적인 배려가 어려운 의료 시스템 하에서도, 인간적으로 배려해주던 의료진도 있었다며 좋은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책의 분량 내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한 생각들을 꺼내놓으며, 의료화 출산을 무작정 피하기보다는 조금 더 실질적인 시스템을 위해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고 언급한다.
 
이 모든 것이 단번에 바뀌긴 힘들지라도 다양한 방식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 자체로 선택의 여지가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출산을 앞둔 여성들이 이 책을 포함하여 많은 정보를 접하고 대비하며, 어떠한 두려운 상황에서도 최대한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되기를 바란다.

 

 

● 52쪽,
그들 모두에게 나는 지극히 도구화된 대상이었다. 활짝 깬 의식으로 떨고 누워 있는 나를 직접 소독하면서도 옆에 있는 동료에게 내 배에 대해 묻고 있는 그 인턴에게 나는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 여성, 인간, 현존재가 아니라 아기를 담고 있는 배 그 자체였다. 나의 신체는 그들에게 배로 환원되고 있었다.

● 90쪽,
출산 시의 여러 가지 변수와 복잡한 분만 상황에서 제왕절개술이란 의료진에게 통제가 용이한 방법이다. 즉, 의료화 출산 과정에서는 위험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편리’하고 ‘깔끔’한 분만을 위해 수술이 선호될 수 있다. 특히, 류정미는 대부분의 제왕절개 수술은 산모나 아기에게 위험하고 꼭 필요해서 행해진 의료적 처치이기보다는, 기다리면 자연 출산을 할 수 있었던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 102쪽,
그러나 그러한 배경과 구조적인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협의 가능성이 희박한 한국의 병원 출산 문화는 출산권을 위협하는 매우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의료진이 산모인 여성들의 질문을 무시하거나 터부시하는 것은 일종의 전문가적 폭력이다. 이러한 의료진의 태도는 훈련받은 의료적 지식만을 과학적이고 ‘귀한’ 유산이라고 여기는 지식의 배타적 권력화의 산물이다.

● 109쪽, (면담 중에서)
안타가운 게, 우리는 보통 의사를 사람으로 잘 안 봐요. 한국 사람들 인식에 의사는 신이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능력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가 바라는 의사는 모든 걸 해결해 주고 포용해야 하는 존재인 건데, 의사도 사람이잖아요. 우리는 인간적인 대우를 받길 원하면서, 과연 의사는 인간으로 보고 있는가 하는 지점은 좀 의문이에요. 의사의 근무 환경은 되게 비인간적이에요. 그리고 그 자리에 오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였는데, 정작 우리가 내는 비용은 그에 비하면 되게 적죠. 저는 이 부분도 같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131쪽,
의료화 출산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이 곧바로 탈의료화로 이어지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의료화 출산의 문제는 곧 의료 권력화에 대한 문제 제기인데, 이것을 곧바로 탈의료화로 귀결하는 것은 비약이다. 탈의료화가 여성에게 더 큰 자유를 줄 것이라는 전제의 위험성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자칫하면 탈의료화가 의료적 시선을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더 많이 침투시키면서 기존에는 의료 시스템이 고려하지 않았던 더 많은 영역을 의료화하는 역습을 초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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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느 독일인의 삶 - 괴벨스 비서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브룬힐데 폼젤 지음, 토레 D. 한젠 엮음, 박종대 옮김 / 사람의집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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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 있었는데 난민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SNS에 난민 관련 정보를 검색했다. 해외에서 일어난 일부 난민들의 폭행, 강간 사건을 다룬 기사와 사진이 뜨고, ‘이슬람이 국가를 정복해나가는 과정’ 등의 정보를 무분별하게 긁어모았다. 최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다 보니 제주도에 여성 실종자가 많아졌다는 이야기도 들려 화가 났다. 어느새 머릿속엔 ‘난민 = IS’라는 정보가 입력되었다. 걱정은 거의 병적으로 커졌다. ‘난민이 무서워’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사실 IS와 관련한 공포와 거부감은 당연한 일인데, 이번 난민의 문제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언론 보도와 난민 분별을 도맡아 하는 관리들에 대한 불신, 이방인을 향한 불안감에서 오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려운 동시에 스스로가 무서워지기도 했다. 어느 쪽도 아닌, 갈팡질팡하는 중도라는 이름으로 나는 은연중에 차별과 배척을 하고 있진 않을까.

 

과거 독일인의 삶을 다룬 이 책에서 느닷없이 난민 문제를 언급한 이유는, 이 책이 독일 내에서 출간될 당시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국민들의 불안감과 극우파들의 반대, 난민 테러가 격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엮은 정치학자 ‘토레 D. 한젠’은 이러한 모습이 마치 나치의 집단적 애국주의와 닮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증가, 난민들에 대한 공격, 시리아 전쟁 같은 최악의 상황에도 젊은 세대의 상당수는 마비되어 있거나, 좌절과 체념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정치나 사회 문제에서 관심을 돌린 것처럼 보인다.” 또한, 문제를 대응하는 현 세대의 모습에서 이 책의 주인공 ‘브룬힐데 폼젤’의 일부를 목격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브룬힐데 폼젤은 나치가 국가를 장악하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면에서 국민을 선동하던 ‘괴벨스’의 비서다. 이미 한차례 전쟁을 겪었지만 그래도 형편이 나았던 동네에 살았던 폼젤은 엄격한 가정에서 순종과 무지를 배웠다. 오로지 부와 출세를 원했던 폼젤은 오전에 유대인 골트베르크 씨 사무실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나치당원 불프 블라이 밑에서 일하게 된다. 그 무렵 독일 사회의 불안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경제적으로 결핍되어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점점 사라져갔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폼젤은 다양한 인맥을 접하면서 결국 나치의 핵심 인물인 괴벨스를 만난다.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된 폼젤은 ‘모든 게 선택받은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폼젤의 인터뷰에서 독자는 그의 증언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나치의 고위 관직이었던 괴벨스의 밑에서 일했는데 어떻게 모든 걸 알지 못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는 유대인들을 가스로 대량 학살한 샤워기 밑에서 샤워를 하며, 그들이 그렇게 학살 당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유대인을 향한 반감도 없었고, 유대인 친구도 있었고, 단지 ‘이리저리 출렁이는 바다와 같은 민족’에 휩쓸렸을 뿐이라고. 오로지 의무감과 성실함으로 자신의 일을 했고, 의지와는 무관하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근시안적이고 무관심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듯하면서도, 정당화와 합리화로 회피하거나 당시 나치와 맞서 싸웠던 사람들의 노력을 평가절하시키기도 한다.

 

“나는 늘 타인들을 조심하면서 살아 왔는데,그러는 나는 내 속의 보통 사람입니다. 그 보통 사람 속에는 군대 전체의 배반과 폭력을 조장하기에 충분한 관성적 부조리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다들 얼마씩 품고 있는 폼젤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 잡지 <VICE> 파울 가르불스키 (엮은이의 말 중에서)

 

역사의 가해자 편에 섰던 브룬힐데 폼젤의 진술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누구나 마음속에 폼젤의 일부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나치즘이 국가를 장악했던 이유를 단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정치에 대한 수동적 태도와 무관심, 소비 지상주의와 이기주의 등 모든 복합적인 요인이 모여 벌어질 일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거의 한 세기 전 과거 독일의 상황,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은 완전히 다르고 시대에 맞는 대응책은 늘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폼젤의 삶과 증언, 그것을 바라보는 독일인의 반성적 태도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멀리 떨어진 땅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일부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이 땅으로 밀려들어 오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

 

 

 

우리는 사실 별 걱정 없이 즐겁게 사는 편이었어요.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죠. 모든 사람이 잘 벌었어요. 떵떵거리며 살지는 못했지만, 자잘한 것들은 별 어려움 없이 구입할 형편이 됐고 우리끼리 만족하며 살았어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늘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생각해 봐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매일 하고 살겠어요? 요즘 바다를 건너다 물에 빠져 죽는 불쌍한 시리아 난민들도 우리가 불쌍하게 여기지만 매일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잖아요? 그렇게 살 수는 없죠. 다만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다시 그 생각이 떠오르죠. 어떻게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될 수 있느냐는 거죠.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에요.

나는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당시엔 그런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저 난 항상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줬어요. 그만큼 성실하게 잘했고, 항상 정확했어요. 어떤 자리에 있건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완수했어요.

사실 그런 격동의 시절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혹시 나는 이런 이유에서 이렇게 했고, 저런 이유에서 저렇게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몰라도요. 우리는 그저 시대에 끌려다녔을 뿐이에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치 시절에 강제 수용소가 있었다는 건 나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거기서 사람들을 독가스로 죽여 불태운 건 전혀 알지 못했어요. 나 자신이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그런 가스가 나왔던 샤워기 아래 서 있었다는 상상을 하면…… 같은 곳에서 샤워를 했다는 상상을 하면 …… 그래요, 나는 목욕탕 건물에 들어가면 옷을 벗어 47번 갈고리에 걸어뒀어요. 내 고유 번호였죠.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옷은 빨아 다른 방에 걸어 뒀어요. 같은 번호 밑에요. 그러면 나중에 그걸 다시 찾을 수 있었죠. 그 사이 나는 15분 정도 타일이 깔린 커다란 목욕탕에서 샤워를 했어요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던 책임에 대한 문제만큼은 스스로 답을 일찍 찾았어요. 그래요, 난 책임이 없어요. 어떤 책임도 없어요. 대체 뭣에 책임을 져야 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 져야 할 책임도 없죠. 혹시 나치가 결국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요, 그건 우리 모두가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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