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공부의 기초 -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간단한 틀
앨런 존슨 지음, 이솔 옮김 / 유유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을 인식하고부터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 또한 누군가를 습관적으로 차별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점검’이라고 하기엔 조금 가벼운 마음이지 않나 싶다. 엉겁결에 누군가에게 차별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나쁜 말을 내뱉고는 잠깐 주춤하는 식이다. 직접적으로 당사자에게 피해를 주진 않지만 나는 종종 부끄럽고 무서워진다. 아마도 이런 습관들이 다 없어지려면 스스로 지속적인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보다 성숙한 태도를 갖기 위해서 관련 책들을 많이 찾아보고 있다. <사회학 공부의 기초>는 그중 많은 도움을 받은 책이다. 제목과 부제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간단한 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각 개개인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으며 이들이 속해 있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며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의미 있는 행동과 가치는 선과 악이 아니라 인간과 삶의 본질, 도덕에 따른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보다 커다란 것의 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생각은 종종 무시되고, 많은 사회적 현상들이 개인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이 확고하게 유지된다. 두 시각이 충돌하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이 발생한다. 사회적 계급과 차별, 그로 인한 갈등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속에서 늘 벌어지고 있다. 책 속에선 다양한 상황에 대하여 설명한다. 왜 사회적 현상을 비난하면 누군가는 개인적 비난으로 받아들여 ‘버럭’ 하곤 하는지. 왜 사회적 약자 ― 여성, 흑인, 라틴아메리카인, 동성애자, 장애인, 노동자, 그 밖의 하층계급에 속한 이들이 지속적인 차별에 강하게 맞서지 못하는지. 왜 차별적 상황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동조하거나 침묵하는지.

모든 시스템에서 과반수의 사람들은 (종종 나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최소 저항’의 길을 택한다. 그것은 이 시스템을 의식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지금과 똑같은 사회적 삶의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일이 아니기에, 일단은 나의 안위가 우선이기에, 때때로 역할 갈등이 일어나서 택하게 되는 최소 저항의 방법이다. 그러나 저자는 경고한다. “세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곳이 될 수 있는지 상상해 보라.”

그리고 덧붙인다. “백인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특권이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편히 살 수는 없다.” 백인, 미국인, 학자, 비장애인, 남성…… 살아가며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았을 법한 저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인지한 채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조금 더 깊이 있고 너그러운 태도를 갖도록 독자를 인도한다. 자신의 자아와 몸과 지위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불완전한 세계를 상기하는 저자의 모습은 꽤 감동적이다.

우리는 늘 선택의 상황에 놓여 있다. 직접적으로 문제에 관련되어 있지 않는 한, 한 사람의 선택이 사회적 현상의 한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누군가를 쉽게 파멸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선택이 ‘양식화된 관습과 제도 혹은 고정관념’을 파괴시키는 ‘시작’이 될 수는 있다. 모든 변화에 참여할 필요도 없고, 모든 시스템에서 최대의 저항을 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작은 행위 (이를테면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도 그저 독립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조금 나아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는 차이가 단지 다양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이는 누구는 포섭하면서 누구는 배제하기 위한, 누구에게는 더 주면서 누구에게는 덜 주기 위한, 누구는 존경하면서 누구는 인간이 아니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취급하기 위한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차이는 특권의 근거가 되고, 이 특권의 범위는 모두가 가져 마땅한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에 관한 문제부터 생사의 결정이라는 극단적인 문제에까지 이른다.

내가 나보다 큰 어떤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사회학 실천을 통해 비난과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을 만든 것도 아니고,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 내 탓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학은 세상에 어떤 식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는지, 그 선택이 왜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백인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특권이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편히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길이 아니다. 길은 우리가 그 길에 대해 알고 있는지 혹은 그 길이 우리가 가장 가고 싶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지와 무관하게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 존재한다. 내가 한 번도 누군가를 성적으로 괴롭히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보면 의미 없는 사실이다. 그 여성이 ‘성인 남성’을 보며 연상하는 힘과 위협의 이미지는 우리 둘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남성지배적이고 남성지향적이며 남성중심적인 세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남성이란 없다. 따라서 나의 위험성을 알려 주는 지표는 없지만 내가 위험하지 않은 사람임을 보장해 주는 지표도 전혀 없다.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지닌 입장에 있는 그 여성 역시 마찬가지다.

환경을 ‘지키려’ 할 때마저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오만한 종’의 유혹에 빠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현상은 나를 포함한 아주 많은 인류가 근심하고 있는 환경 ‘훼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이런 종류의 오만함 때문에 인간에게는 편의대로 지구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게 되고, 이상적인 자연 상태로 보존되어야만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의할 자격 또한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각각의 경우에 인간은 인간적인 가치를 비인간적인 세계에 끼워 맞추면서도 그 오류를 눈치채지 못한다.

한 유명인의 성폭력, 한 정치인의 비상식적인 언행과 같은 일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양식화된 관습과 제도가 이러한 행동을 승인하고 지속시킨다. 많은 이들은 방관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권력 집단에 편입되거나, 최소한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많은 것들이 점차 악화되며,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해진다. 이를테면 성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듣고 벌떡 일어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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