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셔츠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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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와 버질 이야기 <20세기의 셔츠 - 얀 마텔>


 

 


 After Reading

 

 

  '홀로코스트'라는 단어의 어원은 원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죽이는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대전 당시 같은 인간에 의해서 너무나도 쉽게 목숨을 끊어버리는 행위가 인간에게 해서는 안될 정도로 잔혹했기에 '동물 학살'이라는 이 단어는 현대에 와서 유태인 대학살을 칭하는 말로 변화하였다. 독문학을 공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던 전쟁과 홀로코스트. 그래서 예전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20세기 셔츠>(원제 :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여느 홀로코스트 문학과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했을 것 같아 궁금해졌다. 무엇보다도 '셔츠는 어디에나 있다'라는 표지의 카피가 눈길을 끌었다.

 

  일단, 단순히 우화만으로 되어있을 줄 알았던 이야기는 내 예상과 달랐다. 효과적인 홀로코스트 문학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 헨리가 베아트리스와 버질(당나귀와 원숭이)을 박제한 박제사를 만나게 되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여러가지 석연치않은 구석이 있는 이 박제사와 희곡에 대해 의심을 품으며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간다. 소설은 역시 민감한 소재와 만만치 않은 메세지를 담고 있는 만큼 읽는데 녹록지 않다. 소설 속 희곡은 어떠한 사건없이 거의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대화 그리고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희곡과 희곡을 만든 박제사의 말에서 많은 부분, 상징적인 것들이 드러난다. 폭력과 고문, 그리고 그것을 당한 사건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는 끝에서 나온 '호러스'라는 단어,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참여한 국가, 줄무늬 셔츠, 잘린 꼬리, 미친듯이 학살하는 소년... 이런 것들을 보고 실제로 자행되었던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현실을 나는 떠올릴 수 있었지만 작가만의 표현과 상징이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아 난감했다. (그것은 너무 작가만의 것이었던 듯..) 소설의 대부분의 내용보다 오히려 나는 마지막에 따로 묶여있던 '구스타프의 게임'이라는 질문들이 더욱더 와닿았는데 이것은 역시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정답이 없는 질문들, 누구나 해석하기 나름의 질문들을 모아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군인이 당신들을 한꺼번에 '진료소'로 데려간다. 하지만 그곳은 진료소가 아니라 군인의 표현을 빌리면 '알약 하나로 병을 고치는'웅덩이다. 달리 말하면, 뒤통수에 박히는 총알 하나로 이 세상을 하직하는 웅덩이다. (...) 손녀딸이 당신을 쳐다보며 질문을 한다. 뭐라고 물었겠는가?'와 같은 것들.

 

 너무나 어려워서 아직도 이해가 되지 못하는 <20세기의 셔츠>. 일단 지금까지 느낀걸로 보자면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적 사실, 책 속에서의 '홀로코스트'이던 어떠한 문제이던간에 이것들은 이미 언어로만 남겨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언어는 이미 사실과 함께 주관적으로 쓰여졌다는 것, 그리고 독자들은 이러한 일종의 안내자(예를 들면 베아트리스와 버질 희곡처럼)를 바탕으로 나름의 답을 찾아나가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Underline

 

 

  - 동물들은 부드럽고 애원하는 듯한 시선으로 쥘리앵을 바라보며, 그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나 쥘리앵은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거나 단도로 찌르며 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았다.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 살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시간이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모든 것이 꿈에서처럼 쉽게 일어나는 환상적인 세상에 존재하는 사냥꾼이었다. 그때 그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녀석들은 한데모여 입김으로 서로 몸을 녹여주고 있었다. 입김이 안개에 감싸인 구름처럼 보였다. 멋진 피의 살육을 머릿속에 그리자 그는 너무 좋아 한참 동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쥘리앵은 말에서 내려 소매를 걷어 올리고 활을 쏘기 시작했다. (59p)

 

  - 내 생각에 믿음은 햇살을 받으며 지내는 것과 비슷한 거야. 햇살을 받고 있을 때 그림자를 만들지 않을 수 있어? 네가 너라는 것을 절대 잊지 못하게 할 것처럼, 너랑 똑같은 모습으로 항상 너에게 달라붙어 있는 그 어둑한 부분을 떨쳐낼 수 있냐고? 결코 떨쳐낼 수 없어. 그림자는 의심을 뜻해. 햇살을 받고 있는 한 네가 어디를 가든 그림자는 따라다녀. 그런데 햇살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144p)

 

  - "셔츠는 어느 나라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셔츠에는 보편적인 감응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셔츠를 입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셔츠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맞습니다. 외투, 셔츠 바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독일 폴란드, 헝가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149p)

 

  - 어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죽어갈 때 고통의 붉은 천을 움켜잡고 바싹 끌어당겨 찢으며, 그때까지 어떤 것도 붉은 천만큼 그들의 감정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던 것은 없었고, '나는 죽어간다! 나는 죽어간다!'라는 강박감을 안겨주며 그들의 지적 능력까지 마비시킨 것도 없었으므로 붉은 천은 그들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되고, 그들이 존재하는 방의 벽과 천장 모두에 붉은 천이 둘러지고, 건물 밖에서 죽어갈 때는 둥근 하늘 전체가 붉은 천으로 뒤덮이지만, 고통의 붉은 천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와 마침내는 옷처럼 그들의 몸을 휘감지만 좀 더 갑갑할 뿐이고, 다음에는 붕대처럼 그들의 몸은 휘감지만 좀 더 갑갑할 뿐이고, 이리하여 결국 붉은 천이 그들을 질식시키므로 그들이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 붉은 천은 자석이 끌어당긴 것처럼 사라지며 그들의 몸만이 남는데, 그들을 에워싼 사람들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존재여서 붉은 천을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삶이 승리를 거두고 계속될 거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붉은 천이 여러분의 눈앞에서 펄럭이며 여러분에게도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닫는 날, 여러분은 깜짝 놀라 어떻게 저런 걸 전에는 보지 못했을까, 어떻게 저런 걸 무시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겠지만 여러분의 그런 생각은 금세 끝나고 말텐데, 왜냐하면 그때쯤이면 여러분은 이미 뒤로 나자빠져 고통의 붉은 천과 씨름하며, 그 천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을 테니까요. (226p)

 

 

Add...  

 

후.. 요즘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어려웠던 소설이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잘 이해는 안되는데.

그런데 표지를 보면 자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영화가 떠올라서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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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도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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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정절보다 나의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 <표류도 - 박경리> 

 

 

 

 

 

  박경리 작가의 유달리 힘들었던 인생은 그녀의 문학을 정립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숙했던 그녀 개인의 철학적 사상 때문인지 그 당시 지금과는 꽤나 다른 생활상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읽어도 어색하지 않게, 굉장히 세련된 작품을 써냈다. 또한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작품 속 여자 주인공들에 투영되어 여러번 다뤄지게 되었고, 그 고달픈 삶 속에서 작가가 갈망했던 낭만적인 사랑의 모습이 <표류도>에서 나타난다.

 

<표류도>는 작가의 초기작이자 불륜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소위 막장 드라마 같은 통속적인 불륜소설과 비슷한 내용인가 싶다면, 전혀 아니다.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가정을 책임지며 일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였다. 그녀는 불륜이란 것에 통상적인 윤리의식 너머에 존재하며 자신의 사랑에 대해 '나의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고 말하는, 죄의식이 부재한 당찬 여자다. 또한 계급격차로 인해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자기만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작가는 이러한 여성을 통해 불륜의 사랑을, 불륜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닌 사랑의 의미를 파악하는 수단으로서 이야기를 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사랑 너머에 있다.

 

 주인공인 현회가 운영하는 다방 마돈나. 그곳에 사람들이 걸어 들어온다. 피로한 사람들,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 불순한 목적의 사람들, 그리고 살아갈 수단을 찾는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표류도>는 사랑에 대한 것들과 더불어 삶과 죽음에의 문제, 고독, 전쟁의 아픔, 여자로서의 삶, 어머니와 같은 또다른 문제들을 제시하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소설을 그려냈다. '표류도'라는 제목의 의미는 소설 후반, 사람은 모두 외로운 섬이며 각자 외롭게 떠내려가는 섬이라며 등장한다. 외롭게 떠내려가는 섬, 바로 인간. 결국 '인간의 숙명적인 슬픈 고독'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그것에 의하면 그들의 불륜적인 사랑은 정처없이 푸른 바다를 헤메는 고독한 두 섬의 만남일 뿐이다. 고독한 두 섬의 만남인 '사랑'은 외로움의 도피이며, 그리고 그 도피 또한 외로움을 백퍼센트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숙명적인 외로움, 쓸쓸하다.

 

 

 

 

 

  -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몸서리쳐지게 두려운 것이다. 나는 그를 생각할 적마다 죽음을 연상한다. 그를 생각하지 않을 때도 번번이 죽음의 문제에 부닥친다. 한밤중에 눈을 떴을 때, 그런 생각은 내 가슴에 절벽을 준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병의 징조이며 음악에 눈물흘린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못 쓸 값싼 감상의 찌꺼기, 그리고 연애를 생각한다는 것은 굴종이다. 통틀어 슬프다는 것은 청승맞고 궁상스럼고 - 확실히 청승맞고 궁상스럽다. 거대한 차량 밑에 깔려 죽어야 할 생각들이다. (11p)

 

  - 어둠 속에 솟아 있는 건물과 가로수, 쭉 뻗어 있는 길과 전선 줄과 전차 선로, 이런 것이 멀리 가까이서 비치는 불빛과 그 불빛들의 여광속에 잠겨 있다. 그것들은 암색과 원색을 짓눌러서 그려낸 신비로운 그림들처럼 한 폭 한 폭 전개되고 사라진다. 도시가 갖는 밤의 음률, 바람 소리, 차량들이 일으키는 금속성까지도 그림들 속의 여운처럼 안개처럼 깔리며 흐르고 있다. 나는 지금 환상에 싸여 밤을 밟고 가는 것이며 이 환상의 연속은 드디어 상현 씨에게 이를 것이다. 신문지가 발길에 감겨든다. 낙엽처럼 감겨든다. (27p)

 

 - 여행을 결행했다. 기차가 서울역을 출발하자 우리는 불안과 초조를 잊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참 떠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룻밤을 기약하고 떠나온 여행이다. 그러나 이 여행이 우리의 숨이 지는 그날까지 연장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서글픈 집착이 아닐 수 없다. 가는 곳도 Y마을이 아닌 더 깊은 산속이기를, 그보다 숫제 인간들이 서식하지 않는 밀림이나 동굴 속 같은, 흔히 표류기에 씌어진 고절된 곳이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황한 집착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육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욕망과 집착은 무한정하게 커갈 뿐이다. (156p)

 

 - 누구나 다 몇만 년을 살지 못합니다. 속된 말이지만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죽어갈 수밖에 없지요.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각각 떨어져서 떠내려가는 외로운 섬들입니다. 어렵게 생각지 마십시오. 사람의 인연이란 혈육이건 혹은 남이건 섬과 섬 사이의 거리, 그러한 원근에 지나지 못합니다. 내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외롭게 떠내려가야 하는 섬입니다. (272p)

 

 

 

  박경리의 소설들이 좋긴 하지만 가슴이 무거워져서,

이젠 좀 다른 걸로 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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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소설집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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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고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욕먹는 이런 시대에 고독은 사치와도 같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은연중에 무언가를 하고 있어요. 그러고보면 이렇게 바쁘고 힘든 피곤한 사회가 우리에게 소중한 고독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혼자서 그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듯한 캄캄하고 조용한 새벽이 너무 좋습니다. 혼자서 책읽는 그 새벽의 거실이 저한테는 '저만의 고독의 방'이 된 것 처럼, 그렇게 책을 읽고 뭘 쓰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무지 힘들긴 해도 그 시간을 그냥 보내기 아깝거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침시간은 헤롱헤롱... 이미 시간을 갉아먹지만 전 새벽이 좋아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노재희 작가는 그의 첫 단편소설집에서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고독'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킵니다. 작가를 꿈꾸는 샐러리맨, 아파트에서 사는 두 노인, 반복되는 코스를 매일 운전하는 버스 기사, 책 읽기를 거부하는 한 남자. 그들의 삶을 보면 안쓰럽기도, 또 공감이 가기도 해서 뭉클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판타지는 고독 속으로 달아나는 일, 현재의 고단함을 떨치고 자신만의 행복한 시간을 만드는 일일 거에요. 신기하게도 작가의 단편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은 아버지, 어머니 또는 그 역할을 하게 된 아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바람을 미룬 채 지겹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을 아버지, 어머니들을 생각하니 괜히 코끝이 찡해집니다.

 

  외로워보이기만 하는 '고독'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간절한 바람이 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노재희 작가는 처음 만난 분인데 첫 소설집 느낌이 참 괜찮은 것 같아요.

  

 

 

 

 

  - 문득, 어릴 때 학교 선생님들이 주던 벌이, 때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팔을 들고 있게 하는 것뿐인데, 왜 벌이 될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팔은 본래 아래로 늘어뜨리는 게 자연스러운데 중력을 거스르고 위를 향해 들고 있자니 힘이 드는 것이다.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야말로 벌인 것이다. 벌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자기가 굉장히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날마다 괴로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며 괜히 힘만 드는 인생인 것이었다. 이것은 진짜 인생이 아닌 것이었다. (15p, 고독의 발명 中)

 

  -  "이런 얘기 아니? 이 우주의 대부분의 에너지는 자기를 막아서는 어떤 것을 만났을 때 그 속으로 흡수되거나 혹은 그대로 소멸되는 대신 방향을 바꾼다는 거야. 그럼 어느 쪽으로 방향을 바꾸느냐, 자신의 안쪽으로 바꾸는 거지. 나선형을 그리면서 자신의 안쪽으로 점점 말고 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하다보면 나선의 중심이 탄생하는 거다. 그렇게 생긴 나선의 중심이 어떤지 아니?" "......."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주 고요하단다, 아주." "......." "태풍의 눈을 생각해봐라. 같은 이치지. 그래서 그 중심을 고요한 눈이라고 한대." "고요한 눈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요한 눈. 나는 그 고요한 눈이 자기 안에 똬리를 튼 우주라고 생각한다. 멋지지 않니?" (135p,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中)

 

  - 해진이 말하길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안방의 누추한 이부자리나 병원의 소독된 시트같은 어떤 공간이 아니라 바로 시간 속에 던져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시간에서 지워진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시간이라는 좌표에서 지워졌다. 아버지와 정서적으로 공유한 시간이 별로 없으니 내 마음속 시간의 좌표에는 '부친 사망'이라는 간단한 흔적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드디어 내 인생의 반이 꺾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한 기분인데, 벌써 반이 꺾어졌다니. (169p, 시간의 속 中)

 

 - 자석은 영혼을 가지고 있대. 언젠가 어머니가 말했다 영혼은 뭔가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인데, 자석은 철을 움직이니까.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나는 잘못을 딱 잡아떼고 있던 참이었다. 접촉하지 않고도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작용하는 힘에 대해, 이를 테면 자기력 같은 것에 대해 말한 후 어머니는 본론을 꺼냈다. 내가 널 때리려면 팔을 뻗어서 너에게 닿는 거리만큼 가까이 다가가야 하잖아? 그치만 나는 너를 때리지 않고도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할 수 있다. 네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어 우리에겐 영혼이 있으니까. (291p,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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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 12기, 기억에 '더' 남는 다섯권의 에세이

 

  6개월은 일년의 반이라고 생각하면 긴데, 막상 보내고 나면 너무 짧은 듯한 느낌이 든다. 12기 신간평가단이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끝났는데, 6개월 동안 만났던 12권. 그리고 6개의 페이퍼. 갯수를 적고보니 더욱 아쉬운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막상 해보니 너무나 즐거웠던 주목신간 페이퍼 작성과, 매달 두권씩 나와 평가단 분들이 추천해서 뽑힌 책들을 받아보는 기쁨이 정말 컸던 것 같다. 특히 소설에 편중된 독서에서 벗어나고자 신청했던 에세이 분야 평가단을 통해서, 내 책장에는 보기만 해도 예뻐 죽겠는 에세이들이 많이 모였다. 행복하다. 그리고 역시나 더 눈에 아른거리는 에세이들이 있다.

 

 

 

 

 책이 이루는 풍경, 그 속의 '나'와 '책' <책인시공 - 정수복> 

http://blog.aladin.co.kr/pretty9121/6370276

 

 일단 '책 읽는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부제에 진작부터 마음에 들었고,

또 읽고 나서는 책이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그 풍경들 하나하나가 참 마음에 들었다.

나도 역시 책을 읽는 사람이기에, 책을 읽는 장소, 그때의 기분, 그때의 냄새, 주변 그리고

많은 것들을 책에 함께 담아 기억할 때가 있다. 그냥 보기만 해도 흐뭇한 책이다.

 

 

 

 

 

 

 

 

 자연, 사소한 전환이 모여 아름다움을 방출하는 <완벽한 날들 - 메리 올리버>

http://blog.aladin.co.kr/pretty9121/6320660

 

 의외의 복병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좋았고, 얆은 책인데도 엄청난 깊이가 있었다.

자연을 담은 글이라 나도 모르게 괜히 싱그럽고 평화로운 기분이 되는 것 같았다.

아직 이런 감성을 따라가기엔 부족하지만 새로운 생각, 새로운 눈을 가질 수 있게 한 책이었다.

 

 - 이 책이 신간평가단 12기의 Best of Best!!

 

 

 

 

 

 나의 로망을 실현한 사람, 그의 책장으로 <마흔의 서재 - 장석주> 

http://blog.aladin.co.kr/pretty9121/6095177

 

 스물 초반에 마흔의 서재라니! 서재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이건 좀 너무 간듯한 느낌이 들어서

받고나서도 걱정이 앞섰다.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책을 읽은 후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려워서), 충분히 마흔을 지나고 있는 작가의 관록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작가처럼, 이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눈을 감으면, 아득히 멀어지고 아득히 가까워진다 <눈을 감으면 - 황경신>

http://blog.aladin.co.kr/pretty9121/6410274

 

 명화와 함께한 에세이. 너무 새롭다. 살금살금 읽다가 이야기의 끝에서 나오는,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어낸 원천인 그 그림을 발견하는 순간.

그 순간이 마치 추리소설의 결말 같다면 조금 오바일까?

 아무튼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는 예쁜 에세이다.

 

 

 

 

 

 

 

 세 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무라카미 하루키>

http://blog.aladin.co.kr/pretty9121/6426897

 

 평가단을 통해 하루키 에세이를 받아볼 수 있다니. 평가단을 하는 동안 세번째 시리즈가

나왔다는 사실이 그저 반갑고 행운이다. 나는 엄청난 '하루키 매니아'는 아니지만 작가인

하루키를 정말로 존경하는 팬이다. 그리고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를 읽고 사람 하루키의

매력을 느껴서 더 좋아하게 되었다.

 

 

 

 

 

   12권의 책들 중 가장 좋았던 다섯권을 사심을 가득 담아 골라보았다.

  물론 저 다섯권은 기억에 '더' 남는 책들일뿐. 나머지 책들 또한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행복한 독서를 하게 해준 알라딘 신간평가단 감사합니다 :) 12기는 이제 끝!! Bye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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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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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무라카미 하루키>

 

 

 

 


 

 

   첫 번째 무라카미 라디오는 읽지 않았었고, 두 번째였던 채소의 기분을 읽었을 때는 하루키라는 이름이 불러오는 기대가 엄청 컸던지, 생각보다 묵직하지 않은 무게감에 '어라?'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물론 재밌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때 두번째 시리즈를 읽고 하루키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기분에 어깨를 으쓱이면서 다시 한번 세번째 시리즈를 들었다. 멍한 얼굴로 샐러드를 마구 흡입하고 있는 표지의 사자를 보니까 왠지 그 사자 얼굴에다가 하루키 얼굴을 붙여보고 싶다. 아 그리고 책이 참 예쁘다. (비채는 특히 책표지를 정말 이쁘게 만든다!!)

 

  솔직히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역시 세계적인 작가야!!!'라는 칭찬을 하는 건 좀 오바다. (라고 생각한다.)

일단 난 그정도까진 아니고, 이 시리즈를 읽으면 왠지 기분이 말랑말랑 좋아진다. 나는 하루키의 열렬한 '빠'까지는 아니지만 호기심에 소설을 조금 읽어보고 '와 멋있다'하는 정도인데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내가 상상했던 소설가 하루키의 모습과는 너무 의외의 모습이어서 적응이 안됐다. 그치만 이제 그 세계적인 소설들을 마구 뽑아내는 소설가 하루키(내 상상속의..)보다 에세이에 나오는 사람 하루키의 모습이 더 좋다. 일본어 번역에 따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투도 재밌고,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나오기도 하고, 그리고 갑자기 진지해지기도 하고. 일단 가볍게 볼 수 있어서 더더욱 좋다.

 

  하루키는 에세이를 쓸 때, 꼭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쓰게 된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고양이와 음악과 채소),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쓰면서 또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즐겁게 읽고 있으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더있나 싶다.

  

 

 

 

 

  - 중학생 시절, 조금이라도 많은 지식을 익히고 싶어서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한 적도 있다. 그런 무모한 짓을 잘도 했구나 싶지만, 당시는 지식욕이 넘치는 순수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과사전을 독파하여 도움이 됐는가 하면, 특별히 도움이 된 건 없는 것 같다. 그때 머리에 넣어둔 것은 전부 어딘가 먼 곳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런 지식을 위한 코끼리 무덤 같은 곳이 있는 것 같다).  분명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의욕일 터. 그런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자신의 등을 밀어주듯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잘 풀리면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모르는 것을 '자랑'하는 작가가 될 수도 있다. 인생이란 꽤 복잡하다. (63p, 모릅니다 알지 못합니다)

 

  - 그런데 늘 희한하게 생각하는 것. 언제부터 소설가를 '작가님'이라 부르게 된 걸까? 옛날에는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채소가게 님' '생선가게님'같은 느낌이다. 뭐 사운드 면에서 편하긴 하지만, 그렇게 불릴 때면 이따금 "아, 예, 예. 어서 옵쇼"하고 두 손을 비비며 나가야 할 것 같다. (83p, 일단 소설을 쓰고 있지만)

 

 - 여행지에서 매일같이 낡은 옷을 버리고 갈 때의 기분이란 상당히 상쾌하다. 셔츠 한 장, 양말 한 켤레, 대단한 무게도 아니지만 나라는 인간이 그때마다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괜찮다면 한번 시도해보시죠. 그런데 거꾸로 말하자면 여행지가 아니면 좀처럼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여행이 주는 효용이겠죠. (119p, 여행을 떠나자)

 

 - 인생을 길게 살다보면 심한 말을 듣거나 심한 처사를 당하는 경험이 점점 쌓여가기 때문에 그냥 예사로운 일이 돼버린다. '이런 일로 일일이 상처받으면 어떻게 살려고'하며 툴툴 털어낼 수 있게 되고, 그 칼끝을 능숙하게 급소에서 치우는 요령을 익힌다. 그런 게 가능해지면 물론 마음은 편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곧 우리의 감각이 둔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상처입지 않도록 두꺼운 갑옷을 입거나 피부를 탄탄하게 하면 통증은 줄지만, 그만큼 감수성은 날카로움을 잃어 젊을 때와 같은 싱싱하고 신선한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없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그런 손실과 맞바꾸어 현실적 편의를 취하는 것이다. 뭐, 어느정도 불가피한 일이긴 하지만. (144p, 낮잠의 달인)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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