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고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욕먹는 이런 시대에 고독은 사치와도 같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은연중에 무언가를 하고 있어요. 그러고보면 이렇게 바쁘고 힘든 피곤한 사회가 우리에게 소중한 고독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혼자서 그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듯한 캄캄하고 조용한 새벽이 너무 좋습니다. 혼자서 책읽는 그 새벽의 거실이 저한테는 '저만의 고독의 방'이 된 것 처럼, 그렇게 책을 읽고 뭘 쓰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무지 힘들긴 해도 그 시간을 그냥 보내기 아깝거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침시간은 헤롱헤롱... 이미 시간을 갉아먹지만 전 새벽이 좋아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노재희 작가는 그의 첫 단편소설집에서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고독'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킵니다. 작가를 꿈꾸는 샐러리맨, 아파트에서 사는 두 노인, 반복되는 코스를 매일 운전하는 버스 기사, 책 읽기를 거부하는 한 남자. 그들의 삶을 보면 안쓰럽기도, 또 공감이 가기도 해서 뭉클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판타지는 고독 속으로 달아나는 일, 현재의 고단함을 떨치고 자신만의 행복한 시간을 만드는 일일 거에요. 신기하게도 작가의 단편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은 아버지, 어머니 또는 그 역할을 하게 된 아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바람을 미룬 채 지겹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을 아버지, 어머니들을 생각하니 괜히 코끝이 찡해집니다.
외로워보이기만 하는 '고독'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간절한 바람이 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노재희 작가는 처음 만난 분인데 첫 소설집 느낌이 참 괜찮은 것 같아요.
- 문득, 어릴 때 학교 선생님들이 주던 벌이, 때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팔을 들고 있게 하는 것뿐인데, 왜 벌이 될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팔은 본래 아래로 늘어뜨리는 게 자연스러운데 중력을 거스르고 위를 향해 들고 있자니 힘이 드는 것이다.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야말로 벌인 것이다. 벌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자기가 굉장히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날마다 괴로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며 괜히 힘만 드는 인생인 것이었다. 이것은 진짜 인생이 아닌 것이었다. (15p, 고독의 발명 中)
- "이런 얘기 아니? 이 우주의 대부분의 에너지는 자기를 막아서는 어떤 것을 만났을 때 그 속으로 흡수되거나 혹은 그대로 소멸되는 대신 방향을 바꾼다는 거야. 그럼 어느 쪽으로 방향을 바꾸느냐, 자신의 안쪽으로 바꾸는 거지. 나선형을 그리면서 자신의 안쪽으로 점점 말고 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하다보면 나선의 중심이 탄생하는 거다. 그렇게 생긴 나선의 중심이 어떤지 아니?" "......."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주 고요하단다, 아주." "......." "태풍의 눈을 생각해봐라. 같은 이치지. 그래서 그 중심을 고요한 눈이라고 한대." "고요한 눈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요한 눈. 나는 그 고요한 눈이 자기 안에 똬리를 튼 우주라고 생각한다. 멋지지 않니?" (135p,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中)
- 해진이 말하길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안방의 누추한 이부자리나 병원의 소독된 시트같은 어떤 공간이 아니라 바로 시간 속에 던져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시간에서 지워진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시간이라는 좌표에서 지워졌다. 아버지와 정서적으로 공유한 시간이 별로 없으니 내 마음속 시간의 좌표에는 '부친 사망'이라는 간단한 흔적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드디어 내 인생의 반이 꺾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한 기분인데, 벌써 반이 꺾어졌다니. (169p, 시간의 속 中)
- 자석은 영혼을 가지고 있대. 언젠가 어머니가 말했다 영혼은 뭔가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인데, 자석은 철을 움직이니까.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나는 잘못을 딱 잡아떼고 있던 참이었다. 접촉하지 않고도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작용하는 힘에 대해, 이를 테면 자기력 같은 것에 대해 말한 후 어머니는 본론을 꺼냈다. 내가 널 때리려면 팔을 뻗어서 너에게 닿는 거리만큼 가까이 다가가야 하잖아? 그치만 나는 너를 때리지 않고도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할 수 있다. 네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어 우리에겐 영혼이 있으니까. (291p,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