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도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의 정절보다 나의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 <표류도 - 박경리> 

 

 

 

 

 

  박경리 작가의 유달리 힘들었던 인생은 그녀의 문학을 정립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숙했던 그녀 개인의 철학적 사상 때문인지 그 당시 지금과는 꽤나 다른 생활상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읽어도 어색하지 않게, 굉장히 세련된 작품을 써냈다. 또한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작품 속 여자 주인공들에 투영되어 여러번 다뤄지게 되었고, 그 고달픈 삶 속에서 작가가 갈망했던 낭만적인 사랑의 모습이 <표류도>에서 나타난다.

 

<표류도>는 작가의 초기작이자 불륜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소위 막장 드라마 같은 통속적인 불륜소설과 비슷한 내용인가 싶다면, 전혀 아니다.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가정을 책임지며 일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였다. 그녀는 불륜이란 것에 통상적인 윤리의식 너머에 존재하며 자신의 사랑에 대해 '나의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고 말하는, 죄의식이 부재한 당찬 여자다. 또한 계급격차로 인해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자기만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작가는 이러한 여성을 통해 불륜의 사랑을, 불륜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닌 사랑의 의미를 파악하는 수단으로서 이야기를 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사랑 너머에 있다.

 

 주인공인 현회가 운영하는 다방 마돈나. 그곳에 사람들이 걸어 들어온다. 피로한 사람들,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 불순한 목적의 사람들, 그리고 살아갈 수단을 찾는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표류도>는 사랑에 대한 것들과 더불어 삶과 죽음에의 문제, 고독, 전쟁의 아픔, 여자로서의 삶, 어머니와 같은 또다른 문제들을 제시하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소설을 그려냈다. '표류도'라는 제목의 의미는 소설 후반, 사람은 모두 외로운 섬이며 각자 외롭게 떠내려가는 섬이라며 등장한다. 외롭게 떠내려가는 섬, 바로 인간. 결국 '인간의 숙명적인 슬픈 고독'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그것에 의하면 그들의 불륜적인 사랑은 정처없이 푸른 바다를 헤메는 고독한 두 섬의 만남일 뿐이다. 고독한 두 섬의 만남인 '사랑'은 외로움의 도피이며, 그리고 그 도피 또한 외로움을 백퍼센트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숙명적인 외로움, 쓸쓸하다.

 

 

 

 

 

  -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몸서리쳐지게 두려운 것이다. 나는 그를 생각할 적마다 죽음을 연상한다. 그를 생각하지 않을 때도 번번이 죽음의 문제에 부닥친다. 한밤중에 눈을 떴을 때, 그런 생각은 내 가슴에 절벽을 준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병의 징조이며 음악에 눈물흘린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못 쓸 값싼 감상의 찌꺼기, 그리고 연애를 생각한다는 것은 굴종이다. 통틀어 슬프다는 것은 청승맞고 궁상스럼고 - 확실히 청승맞고 궁상스럽다. 거대한 차량 밑에 깔려 죽어야 할 생각들이다. (11p)

 

  - 어둠 속에 솟아 있는 건물과 가로수, 쭉 뻗어 있는 길과 전선 줄과 전차 선로, 이런 것이 멀리 가까이서 비치는 불빛과 그 불빛들의 여광속에 잠겨 있다. 그것들은 암색과 원색을 짓눌러서 그려낸 신비로운 그림들처럼 한 폭 한 폭 전개되고 사라진다. 도시가 갖는 밤의 음률, 바람 소리, 차량들이 일으키는 금속성까지도 그림들 속의 여운처럼 안개처럼 깔리며 흐르고 있다. 나는 지금 환상에 싸여 밤을 밟고 가는 것이며 이 환상의 연속은 드디어 상현 씨에게 이를 것이다. 신문지가 발길에 감겨든다. 낙엽처럼 감겨든다. (27p)

 

 - 여행을 결행했다. 기차가 서울역을 출발하자 우리는 불안과 초조를 잊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참 떠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룻밤을 기약하고 떠나온 여행이다. 그러나 이 여행이 우리의 숨이 지는 그날까지 연장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서글픈 집착이 아닐 수 없다. 가는 곳도 Y마을이 아닌 더 깊은 산속이기를, 그보다 숫제 인간들이 서식하지 않는 밀림이나 동굴 속 같은, 흔히 표류기에 씌어진 고절된 곳이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황한 집착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육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욕망과 집착은 무한정하게 커갈 뿐이다. (156p)

 

 - 누구나 다 몇만 년을 살지 못합니다. 속된 말이지만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죽어갈 수밖에 없지요.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각각 떨어져서 떠내려가는 외로운 섬들입니다. 어렵게 생각지 마십시오. 사람의 인연이란 혈육이건 혹은 남이건 섬과 섬 사이의 거리, 그러한 원근에 지나지 못합니다. 내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외롭게 떠내려가야 하는 섬입니다. (272p)

 

 

 

  박경리의 소설들이 좋긴 하지만 가슴이 무거워져서,

이젠 좀 다른 걸로 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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