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본 케이블 TV에선 공연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다. 로비 윌리암스의 공연. 로비의 클로즈 샷 옆으로 자막이 새겨진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남자, 로비 윌리암스". 왜 씁쓸한 기분이 들었을까? 알 수 없는 나는 그저 흘러간 밴드의 노래를 흥얼 거릴 뿐이다. 가지 말라고, 네가 하려던 말을 하라고. 떠나지 않겠다고, 영원히 있겠다고, 그렇게 말을 하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어김 없이 흐르고,
빛나던 멜로디들은 사라진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하여. 음音의 속도로.

삼가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계를 돌고 싶었다.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사라져버리기 전에, 시간의 조수가 당신의 귀를 비우기 전에. 세상을 돌면서 말해주는 거지. 사그라진 밴드의 노랫말처럼, 내가 들었던 모든 것들을. 내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야기를, 멋진 멜로디들을. 팻말하나 들고. 헝그리 따위는 충분히 얼굴에 쓰여 있으니, 다만 들어 달라고. 또 들려 달라고. 나의 얘기를, 당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만들어질 화음을.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 단어씩만 주세요. 두 단어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두 단어를 주시면, 세 단어를 드립니다. 자, 단어 놓고 단어 먹기. 네? 미안합니다. 영어 잘 못합니다. 아, 저기 아가씨. 잠깐만요. 우리 전에 본 적이 있죠?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그때의 거지가 저입니다. 네? 하하. 지금도 거지 맞아요. 전 일관성 있는 남자거든요. 이래뵈도 고향에선 찌질하다는 소리 듣던 사람이랍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음... 영어로는 대충 'Fucking Awesome' 정도? 하하. 유아 웰컴."

물론 좀 더 현실성 있는 버전도 있다. 1. 멋진 소설을 쓴다 2. 베낭 가득 소설을 담는다 3. 떠난다 4.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소년, 영국 아저씨, 네덜란드 총각, 프랑스 아가씨에게, 한 권씩 준다. 한국어를 몰라도 상관 없다. 어떤 언어로 쓰여진 책이든, 그런 책을 받는다면 나 역시 기쁠 테니까. 비용은 물론 소설을 쓰고 받은 상금으로 충당. 아, 잠깐만. 이게 더 현실성 있는 버전이라고 한 거 같은데...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빨간 클립 두 개로 물물교환을 시작해 결국엔 이층 집을 마련한 캐나다 백수 청년처럼. 교환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신선한 생각. 그러니까 여기, 여행을 떠나고 싶은 젊은이가 있습니다. 돈이 없어요. 딱하죠? 호화판 여행을 떠나겠다는 거 아닙니다. 이른바 공정여행. 주워 들은 건 있는 젊은이인 모양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돈이 없다니. 비행기 삯이 얼만데. 이런 딱한 친구가 있나. 이봐, 추운데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뜨신 물에 밥이나 말아 먹구랴. 요즘 젊은 것들은 쯧쯧. 저기, 잠깐만요. 우리들 대부분은 떠나고 싶어하잖아요. 그런데 모두 다 떠날 수는 없잖아요. 가족에, 직장에, 생활에, 습관에... 그렇다면 한 사람이라도, 지금 당장 한 사람이라도 떠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여기 독서공방 펀드에 힘을 보태 주세요. 대신 떠나 드립니다. 물론 먹고 노는 여행 아닙니다. 자본의 시스템, 소비의 사슬을 떠나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이미 자신도, 그렇게 도움을 받아 떠나게 된 걸요. 세계를 돌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를 만나며 그들과 안면을 익히고 손짓 발짓 섞어가며 같이 웃고 눈물 한방울 흘리고 많은 걸 보고, 배우고, 담고 돌아올게요.

사기치지 말라고요? 잠깐만요. 펀드라고 했잖아요. 배당 해드립니다. 수익이 어디서 나냐고요? 여행기를 쓸게요. 제가 MD 출신이라는 얘기를 했던가요. 알라딘 여행MD 님... 막 친하진 않지만 그래도 오래 같이 일했고요. 친구와 후배 중에 방송작가도 꽤 됩니다. (명랑히어로에 나와서 뜬 그 여행책 아시죠?) 책 팔아서 도와주신 분께 돌려 드릴게요. 남는 돈은 세계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돌려 줄게요. 받지 않겠다는 분은, 역시 그 친구들에게 함께 드리죠. 그렇게 하고도 조금 남는다면 두번째 주자가 세계로 나갈 차례.

수익이 안나면 어떡하냐고요?
네, 고객님. 약관을 제대로 안보셨군요. 펀드라는 건... 사랑합니다 고객님.





금은 버려진 어느 카페의 대문엔 여전히 이런 인삿말이 걸려있다. 인생막장. 스물 너댓살 먹은 복학생들이 파릇파릇한 새내기들을 꼬셔 만든 학회이름치곤 영. 그래도 스물한 살 때 지은 반미실천단 이름인 (아지포함) "(미제의 심장에 박아버린다) 쇠말뚝" 보단 낫잖아. 선수들은 성장하고 아이들은 자란다. 물론 고릿적의 트레인스포팅을 베껴긴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건 있는 법이니까. 그것은 내 어떤 (유치한) 정서. 뭐 주한미군도 여전히 주둔하고 있고.

그래. 졸업한 지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또다시 '인생막장'이란 이름을 꺼낸 건, 그래서였다. 더이상 선택할 것이 남지 않은 것 같은 기분. 막장에 몰린 기분.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려고, 두 손으로 흙을 파내어 보지만, 손톱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 이 말도 안되는 글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을 때 내 기분이 그랬다.

돌아본 거다. 소위 말하는 (양 손의 검지와 중지를 살짝 구부리며) '의미'를 찾고 싶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내가 누구라고 말하는 당신은 누구이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는 또 누구인지, 알고 싶었으니까. 무척이나. 내가 기억하는 나는 21세기의 이력서 취미란에 꿋꿋하게 독서라고 적는 사람, 그러니까 칼빈 한 자루를 들고 생화학전에 뛰어드는 사람이었다. 다른 방법은 알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책을 가지고 직업을, 가족을, 뻑킹 빅 텔레비전을, 세탁기를, 미래를 그러니까 인생을 선택하려 한 모양이다. 그게 될 리가 있나. 무엇보다 MD라는 직업은 책을 '파는' 직업이었으니까. 대개 책이란 읽으라고, 꽂아 놓으라고, 그것도 아니라면 다운 받으라고 있는 것이었다. 베고 자거나 사람을 때릴 수는 있다. 하지만 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한텐 그랬다. 귄터 쿠네르트의 말처럼 나는





그 길의 막장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던 거다. 책을 읽는 것과 파는 것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인 인과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길에서 책을 파는 길로 방향을 튼 것은 '나'였고, 그 길을 벗어나는 것 역시 '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뒤늦게 알곤 하니까. 대부분의 것들을 1년 6개월이 지나, 할인판매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주간지 100권이 모이면 그만두기로 마음 먹는다 해도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건 일종의 '기계장치의 신'이었으니까. 연극의 막바지에 내려와 모든 것을 정리해주시는. 하지만 지금은 21세기다. 신은 죽었고, Film 2.0은 내가 94권을 모았을 때 망해버렸다. 실제로 회사를 그만 두기까지는 그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그래, 내가 죽였다. 이 자리를 빌어 Film 2.0 관계자들께 사과드린다. 죄송합니다. 저였어요. 고려원이 망한 게 오에 겐자부로 전집 때문이듯이.

로비 윌리암스는 잘못 없습니다. 

그저 나는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마음이 없었을 뿐이니까. 책 읽는 사람에서 책 파는 사람으로의 변태를 견딜 수 없었으니까. 끝까지 살아남은 남자 따위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39세의 노장 투수 빌리 채플에게 야구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뗄 수 없는 것이었듯이. 그가 원한 것은 뉴욕 양키스에서의 야구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의 야구도 아니었듯이. 내가 사랑한 것은 책이었지만, 그것을 파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이야기. 도둑처럼 소리 없이.




"그만 두겠습니다. 야구를 사랑하니까요."


래 이 글은, 사직서가 될 예정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길고 뒤죽박죽인 사직서가. 저 명예욕 있는 남자거든요. 처음엔 12월에, 다시 2월에 올리려고 했던 글을 퇴직하고도 한 달이 되어서야 쓰게 된 것은 천성적인 게으름 탓이다. 본래 인문MD로(낯선 단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싶었던 '인생막장' 시리즈는, 인문MD를 그만둔다는 것의 의미를 물으려 했다가, 결국엔 이렇게 마무리 되고 말았다. 별 수 없지.

시간은 어김 없이 흐르니까.

그래서 결국 내 앞엔 *천만원 어치의 시간이 펼쳐졌다. 물론 그것은 교환가치 바깥에 있고, 그렇기에 기묘하다. 누군가 나에게 수십억원을 준다해도 내 남은 시간을 전부 팔리 없겠지만, 몇 년 단위로 쪼개면 거리낌 없이 팔 수 있다는 것. 그 문제는 나중에 깊이 생각해보기로 하고. 자, 시간이 내 앞에 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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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것들. 자고, 걷고, 읽고, 쓰고. 혹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수밖에. 섣불리 기대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실망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겠지. 상투적, 상투적, 상투적, 상투적이야. 모든 말들은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소비될 때 상투적이 된다.

(다시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살짝 구부리며) '의미' 따위는 예나 지금이나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몇 가지는 안다. 모든 단어는 빈 항아리 같다는 것. 그 단어를 채우는 것은 결국 그것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 내 남은 시간은, 모든 상투적인 것들을 상투적이지 않게 하는데 바쳐질 예정이라고.


나는 여전히, 또 하나의 막장을 파며 그곳에서 나온 흙으로 나만의 항아리를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 동안 고마웠어요.
눈치도 못채셨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인사 없이 블로그를 버려 두어서 혼자 못내 걸렸어요.
이 블로그를 어떻게 해야할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뭐 상관 없겠죠.
따뜻한 봄이 골목 앞에 있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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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7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흐름 2010-03-29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RSS로 구독하고 있던 독자인데, 아쉽네요.
그렇지만 어디선가 또 글을 보고 누구의 글인지 잘 모르면서도 구독을 하게 되겠지요.
취향은 변하지 않는 법이더군요.

다락방 2010-03-2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이제야 뭔가가 어렴풋이 잡히려고 하네요.(아, 무척이나 뜬금없는 댓글입니다만.)

2010-03-29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31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31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주 들려 글 읽으면서 좋아하고, 권해주신 책도 사보고 그랬는데
지금 내리는 봄비처럼 마음이 그러하네요.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뵙든 다시 알아보고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꼭!
건투를 빕니다'_'

caren 2010-04-13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의 제보로 봤는데. 아무튼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니까 여행서 출간되면 꼭 제 돈 주고 사볼게요. 파이팅 하세요.^^

제보자 2010-04-13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할라할라.. 높이 올라가 세상을 다 가져봐~

외국소설/예술MD 2010-04-1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택에 싼 숙소에 묵었으면 감사의 표시로 밥을 사거나 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Azira 2010-05-10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알라딘편집팀서재에서 블로그명이 사라진 걸 발견했네요.
아쉬워요....눈팅만 했지만 나름 열혈 독자였는데. 어디론가 이사가시면 꼭 공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