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우리말 바로쓰기에 대한 그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자주 추천이 되는 고 이오덕 선생의 책도 아직 읽지 않았다. 왜냐면 알면서 실천 안 하기는 뭣해서 버텨보는 중이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을까봐 무서워서 못 보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지역의 언어(지방언어, 토박이말, 혹은 폄하해 사투리)를 좋아한다. 내 지역 언어뿐만 아니라 타지역 말도 매력 있어 한다. 표준어는 뭔가 재미가 모자란다. 경우에 따라서는 토박이말을 화끈하게(?) 써 줘야 쓰는 맛도 있고, 듣는 맛도 있고, 읽고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조정래 선생이 그의 역작들을,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서울말로 썼다고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밥맛이다. 그렇다고 표준어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표준어는 표준어 나름대로 존재의의가 있다. 각 지역 말을 이쪽저쪽으로 통역해주는 공통분모 말로써 말이다.

 

특정 전라도 말을 강원도 말로 통역해주면 강원도 사람만이 알아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표준어로 통역해주면 모든 지역사람들이 다 알아먹는다. 하여간 표준어고 지역 말이고 다 있어야 되고 표준어, 지역어는 둘 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만든 '한글(훈민정음)'이 변화 발전하여 오늘에 이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5백 년 동안 지배층들이 한문을 숭상하며 지속적으로 한글을 배척했는데도 오늘날까지 가열차게 살아남은 한글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감동스럽다. 내가 이 한글에 대한 느꺼움을 가슴깊이 새기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어를 배우면서이다.

 

십여 년 전, 일본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문득 '내가 한국인임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라는, 나도 모르게 내 주제를 그리고 주체를 파악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러한 가운데 떠오른 것이 다음이다.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 신라면, 그리고 한글.

 

한글 빼고는 죄다 먹는 것이라 오로지 먹기 위해 사는 인간 같아 뭐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위 여섯 가지는 이미 내 몸속에 ‘인’이 박혀 씻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내가 아무리 이탈리아 국수와 빈대떡을 좋아해도 이탈리아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부모를 바꿀 수 없듯이 내가 한국인임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서류상으로 바꿀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한국인이란 게 싫었냐고요? 천만에. 예전엔 내가 한국 사람임에도 별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말을 배워보니 나는 정말 한국인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서방세계 사람들은 당연한 듯 우리가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쓰는 줄 안다는데 그게 아님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우리말이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아일랜드처럼 독립은 했는데 말을 다 잃어버렸다면 그 원통함을 어찌했을 것인가. 헌법상에만 아일랜드어가 명시되어 있고, 실지로는 모두가 영어를 쓰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싶다. 그런 만큼 우리말을 지켜온 선조들이 고맙다.

 

너무도 오염된 한국어

 

그런데 요즘 활자로 된 글이 건 방송에서의 말이건 우리말이 분명히 있는데도 외국어를 마구 끌어다 쓰는 것을 볼 때면 아찔하다.  외래어야 할 수 없다 쳐도 신종 외국어를 마구 남발하는 것은 뭔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그러한 말들은 누가 퍼트리는가 생각해보니 범인은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먹물'들이 외국어를 많이 끌어다 쓰는 것 같다. 프랑스 갔다 온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독일어권에서 배운 사람들은 독일어를, 미국 갔다 온 사람들은 미국말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요새는 우리말이 버젓이 있는데도 예사롭게 남의 나라말을 걸림 없이 쓰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포도주: 요샌 활자화 된 글을 읽을 때면 '포도주'라는 말을 눈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죄다 '와인'이라 한다. 포도주 대신 와인이라 하면 맛이 더 '땡기'시는가. 나는 다른 신문도 아닌 <한겨레>에서 '와인'이라는 말을 수시로 발견할 때면 소름이 끼친다.

 

상표·상품(명): 요샌 이 말도 안 보인다. 역시 신문이고 방송이고 모두들 '브랜드'라고 한다. 새 브랜드를 출시했네 어쩌내 하면서.

 

깨끗한 선거: 내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인데 시민 단체들은 그동안 '매니페스토 운동'을 펼쳤다. 나 참, 이말 처음 나왔을 땐 뭔 말인가 싶어서 인터넷에 뜻을 물었다. 그냥 '구체적인 예산과 추진 일정을 갖춘 선거 공약'이라고 하면 5천만이 알아먹을 것인데, 40대인 나도 모르는 것을 나보다 나이 많은 윗세대들은 어찌 알 것인가.

 

어린이: 요샌 이 말도 간당간당하다. 학교 앞은 스쿨존이요, 어린이옷은 키즈 룩이다. 우리 동네 어린이집 이름에는 '노블 키즈'가 있고 놀이터로는 '키즈 정글'이 있고 학원으로는 '키즈 영어'학원이 있다.

 

고상한 분들이 주로 쓰는 말들도 한번 볼까. '노마드', '멘토', '트라우마'.

 

멘토와 트라우마는 몇 년 전부터 부쩍 쓰더니 요샌 '조언자'라고 하면 조언이 안 되고 '트라우마’라고 하지 않으면 깊은 '내적 상처'가 표현이 안되시는가.  그리고 '노마드'라 하지 말고 '유목민'이라 해도 충분히 자유가 느껴지는데 왜 이런 한글 잡아먹는 '신종마약'들을 퍼트리는지. 

 

이런 마약들은 너무 많다. '문화와 아비투스(습관)', '디아스포라(이산자, 떠돌이)의 눈', '볼런티어(자원봉사) 활동', '웜비즈(따뜻한옷)', '쿨비즈(시원한옷)'등등 신문 한 장 펴들고 이 잡듯이 형광색으로 물들이자면 수도 없이 나온다. 우리말이 없어서 그냥 쓰는 말이라면 할 수 없지만 읽어보면 우리말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애써 '새파란' 영어를 끌어 쓰고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보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똘레랑스'는 홍세화씨가 책임(?)지세요.)

 

만고의 진리, 우리말을 살려 써야 외국어도 잘한다

 

나는 우리말만 잘났고 외국어는 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말이 아름다운 만큼 비교할 수 없이 다른 나라 말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어 히라가나의 흘러내림을 보라. 그냥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이 물결치는 것 같다. 한자를 보라. 어떻게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어도 저렇게 예쁘게 만들었을까. 뜻을 모아 또 다른 말을 파생시키는데도 어찌 저리 철학적으로 만들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영어도 마찬가지. 영화 속 멋진 배우가 혀를 도르르 말아가며 의미 있는 대사를 읊조리면 정말이지 '영어의 바다에 빠지고 싶다.' 이들 말 뿐 아니라 내가 모르는 무수한 다른 나라말들도 아마 한글이 가진 역사성만큼이나 오랜 풍화작용 끝에 살아남았을 것이기에 존중하고 싶다.

 

백기완 선생은 그토록 보편적으로 쓰이던 '서클'이라는 말을 '동아리'로 산뜻하게 바꿔 놓았다. 때문에 요샌 대학에 동아리는 있어도 서클은 없다. 서클이라는 말의 존재를 모르는 새내기들도 많을 것이다. 선생이 퍼트린 '동아리'와 '새내기'처럼 지식분자들이 생각 없이 외국어를 끌어들이지 말고 작심하고 우리말을 살려 쓴다면 제2, 제3의 동아리, 새내기는 무수히 새끼 칠 수 있을 것이다.   

 

또, 작가 장정일씨는 어느 글에서 <한겨레>에 독자투고를 하면 자신이 쓴 말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감쪽같이' 바른 우리말 문장으로 바꿔줌에 찬사를 보내었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수년전 독자투고 글이 좀 길어 조금 줄이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내가 쓴 군더더기 말들을 솎아 내고 정말 감쪽같이 깨끗한 문장으로 만들어 주었다.

 

해서 <한겨레> 기자가 달리 <한겨레> 기자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자 다 어디로 갔는지. 외래어는 그렇다 쳐도, 외국어들이 너무 난무한다. 아주 외국어들을 외래어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나마 우리말을 살려 쓴다 맹세한 신문까지 이러니 다른 신문들은 오죽하랴.

 

물론 나도 반성한다. '브로크백 쓰나미'란 말을 쓴 적이 있고 '금요일 밤, 세 감독의 아우라' 어쩌고도 했고 그리고 '어감'이라는 말 대신 '뉘앙스'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제부터는 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한두 번 썩어 쓸지언정 글로는 위의 말들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이미 쓰여 지는 외래어라면 몰라도 새로 끼어드는 외국어는 사양하겠다.

 

하여간, 대운하 없기를 바라는 만큼, 우리말이 오염되는 것 또한 반대한다. 대운하가 우리에게 줄 피해만 큰 게 아니라, 외국어(특히 영어)가 우리 말(영혼)에 주는 피해도 심각하다. 제발, 너도나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우리말 살려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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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퇴행’. 이수광 이우학교 교감은 어느 글에서 ‘배움의 퇴행’이라는 말을 했는데 몹시 공감이 갔다. 그는 배움의 퇴행을 일러 ‘쓸데없는 것을 과잉 학습하는 과정에서 정작 배워야 할 내용들을 등한시한 나머지 자신의 성장 동기를 상실하는 부조리’라며 깔끔하게 정의하였다.

 

더 보탤 것도 덜 보탤 것도 없이 정곡을 찌르는 정의다. 요즘 아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하고 있는 반복학습이야말로 ‘배움의 퇴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동, 청소년들이 우리 어른들 보다 기억력이 좋은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렇게 기억력이 좋을 때 공통으로 배우는 것은 정규 수업시간에만 하고, 집에 돌아와 나머지 시간엔 각자 몰입 할 수 있는 곳에 시간을 쓰도록 해야 될 텐데 너무 안타깝다.

 

나는 지금 초등 3년인 내 아이가 고등학교 갈 때면 이런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하며 걱정 없이 살았다. 그런데 내 기대와는 달리 입시교육의 문제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만약 후일 내 아이도 ‘야자’를 하게 된다면 어차피 하는 것 그 시간을 최대한 슬기롭게 ‘견디다’ 오라며 나름 조언할 생각이었다. 예를 들면, 잠을 허용하는 선생님이 감독이라면 그냥 ‘엎드려’ 자고, 책을 보게 하는 선생님이라면 책을 보고, 문제만 풀어야 된다면 피할 수 없으면 그 자체를 즐기는 방법도 있다, 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되어가는 양을 보니, 부모인 우리만 성적에 목매지 마라 해서는 아이가 완전히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일을 우쩌? 계속 이런 식이면 고교 3년 다 못하고 검정고시로 건너뛰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아이 스스로 부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변에 동화되어 줏대 없이 경쟁에 ‘불붙어’ 버릴까 그게 더 두렵기도 하다. 그리하여, 점수 몇 점에 울고 웃는 마음이 된다면 그것은 ‘배움의 퇴행’이라는 지름길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때문에, 주장하노니, 우리 학생들이 ‘배움의 퇴행’으로 접어들지 않게 교육당국은 한시바삐 아침 자율학습과 저녁 ‘야자’를 없애 주길 바란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준비해서 7시 30분 까지 학교 도착하고, 밤 10시에 마치고 11시 다 되어 집에 돌아온다는데. 이게 도대체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이 권 할 짓인가 말이다. 이는 명백한 학대다.

 

그리고 부모들이여! 눈 있고 귀 있으면 다른 나라의 교육 풍습도 좀 보고 배웁시다. 우리식이 아닌 다른 교육 선진국 식으로 해야 아이들의 창의력이 솟구친다는데 왜 그러한 것들은 본받으려 하지 않는지. 다른 것은 잘도 따라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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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뜬금없이 고추장을 만들고 싶었다.
하루종일 비는 우중충 내리고 .... 투표는 했으되 희망은 안 보이는 듯하고  에라, 고추장이나
한번 만들어 볼까.

실은, 몇년 째 묵힌, 호박을 고아서 엿처럼 만든 것이 있었다. 그것을 이봄에는
기필코 처리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얼마전 부터 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 된 것이었다.

해서, 호박엿을 붓고 역시 몇년전에 담가서 두고두고 먹고있는 매실액을 넣고
푹 저어가며 끓였다. 8부 능선쯤으로 서서히 끓어오를때 아이들이 뭔가를 부탁해서
얼른 민원해결하고 와보니 글쎄 그새 넘어서 가스렌지 밑을 다 적시고 가스 구멍을 막아서
불도 제대로 안 켜지고....

하여, 이것은 가스렌지 청소 한번 화끈하게 하라는 주문인갑다 생각하고 열심히 닦았다.
그리고, 빨래널고 빨래개고 하다가  졸려서 한숨자고 나니
끓인물이 다 식어있었다.

미리 빻아두었던 고운 고춧가루를 붓고 큰애에게 저으라고 하였다.
고추장 만드는 방법이 이렇게 간단하다는 것을 알려주며 니도 나중에 담아먹어라 해가면서...

고춧가루가 썩이자 너무 뻑뻑해서 역시 먹어줄일이 막연하던 매실주를
두통이나 들이 부었다. 그러자 저을 만했다. 간을 위하여 굵은 소금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몇줌인지 헤아리지도 않고 그냥 뿌려댔다.

그냥 뿌려대도 간이 맞는 걸 보면 나도 이제 주부생활 10년에 어느 정도 득도를 한것인가.ㅋㅋㅋ

조청이며 메주가루, 찹쌀가루등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싱숭생숭한 고추장 이었지만
고추장에는 고춧가루가 주인이니  달콤하기만 하면 그 무엇을 넣어도 맛에는 별 상관이 없으렸다.^^

물론 맛이 이전 고추장과는 조금 다르긴 해도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조금 신선하기도 하였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그나저나, 고추장하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예전, 일본에서,  월급을 타면 커다란 고추장 한통을 샀다.
크다고 해도 3킬로그램이 아닐까 싶은데...이나라가 물가가 비싸다보니 아마 우리돈으로 치면 3만원은
주었던것 같다.

'아이고오, 고추장 한통에 3만원 씩이나 하다니 간이 떨려서 원~ '하면서도 너무 맛있었기에
다른 날은 못 사먹어도 월급날은 꼭 사서 먹었다.

어떻게 먹었냐하면 밥에 비려서 그냥 먹었다.
밥솥에서 금방 푼 따끈따끈 김이 모락모락나는 밥에다 고추장 한숟가락을 넣고 비벼먹으면
꿀맛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다른것은 아무것도 필요없었다.
아침도 저녁도 고추장 통의 바닥이 보일때까지 며칠을 그렇게 비벼 먹었다.

최종적으로 고추장 통에다 밥을 한숟가락 넣어 싹 비벼먹고 나면
'흐미, 내일부터는 또 무슨 낙으로 살꼬? 다음 월급날은 도대체 언제여? '하며 청승을 떨었다.

3만원 씩이나 하는 고추장이었기에,
한번은 통크게 사먹어도 두번은 사먹을수 없었던 것이었던 것이었기에.

아무튼 그때 느낀 내 소감은 한국사람은 고추장과 쌀만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학창시절에 한국사람은 김치와 쌀만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

......

하여간 고추장은 맛있었고, 맛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맛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봄에 고추장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을 살짝 알려주자면,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돈나물에 비비는 것이 제일 맛있다.

비빔그릇에 밥을 조금 담고, 돈나물을 밥보다 더 많이 그 위에 얹고,
돈나물 위에 고추장을 크게 한숟가락 떠 얹어서 비벼 먹으면?
봄날의 행복은 그속에 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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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8-04-09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재미있어서 늘 그냥 읽고만 가다가 오늘은 인사 남깁니다.
저는 주부 생활 19년차라도 아직 고추장을 친정과 시댁에서 얻어 먹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늘 읽으면서 미소가 머금어지는 글, 참 좋아요.
님의 글을 읽으니 나도 고추장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기네요.
글 잘 읽고 미소까지 얻어갑니다.^^

폭설 2008-04-10 18:24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번 담가 보세요.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조상들의 슬기 이런것들도 생각나구요.

된장, 간장도 담고 보면 아주 쉬워요.^^
요샌 인터넷이 선생이기도 하구요.

 

올해로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만 4년이 지났다. 바꿔 말하면 아버지 제사를 4번 지낸 것이다. 난 그 4번의 제사에 다 참석했는가? 1번밖에 안 갔다. 아버지 첫 제사 때 간 것이 전부다. 그때는 첫 제사다 보니 아버지로 인해 세상 빛을 본 자식들이 모두 모였고 시끌벅적했다.

푸짐하게 차려진 제사상을 앞에 두고 절을 하긴 했지만 아버지를 향한 회포나 회한이라든가 하는 감정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듯 다들 유쾌했다. 아버지가 워낙 '문제' 아버지셨으니 그립거나 아쉬울 틈이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지사.

그럼 두 번째 제사는? 까먹었다. 남들보다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이상하게도 아버지 기일은 잘 기억되지 않았다. 이 날인가, 저 날인가 점을 치다 엄마에게 다시 물어봐야지 하다가, 또 며칠 지나고 나니 아버지 기일은 이미 지난 상태였다.

 

매번 깜빡깜빡하는 아버지 기일, 난 불효자?

 
"세상에 지 아부지 제삿날을 우째 잊어묵노? 돌아간 지 5년이 된 것도 10년이 된 것도 아닌데, 쯧쯧."

"양력으로 돌아가신 그날(2004년 2월 4일 입춘)을 너무 선명하게 기억하다 보니 음력은 자꾸 헷갈리네. 그나저나 엄마 이참에 계속 모르쇠 하까?"

"몰라."

"엄마도 생각해 봐라. 영감 제사 매번 가고 싶나?"

"그냥 다들 지내니까 지내는 거지. 나도 이번에는 안 갔다. 다음에도 안 갈란다."

"엄마, 그러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오빠 보고 제사 지내지 말라 캐라. 아부지는 그런 것 안 원한다. 살아서도 아들 속을 그리 썩였는데 돌아가셔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을끼라."

"해석도 잘하네. 내는 몰라. 니 오빠가 지내면 지내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엄마가 그러니까 오빠가 감히 결심할 수가 없지. 아부지는 분명 좋은 데 갔다. 내 아부지 돌아가고 한 달쯤 돼서 꿈 꿨을 때 아부지는 고대광실 너른 집에서 대감 모자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유유자적하더라니까. 정말이야.(웃음)"

세 번째 제사 때는 고의적으로 빠졌다. 설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 제사인지라 설에 미리 오빠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래도 세 번째 아버지 기일엔 오빠와 올케 언니에게 미안해서 뒷골이 '땡'겼다. 지나고 나서 조카에게 들으니 오빠가 열두 시까지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 와서 참 안돼 보이더라고 했다.

해서 나는 또 오빠에게 이러저러해서 그랬다며 사과의 말과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빠는 마음을 비웠는지, 이해하는지, 아니면 나랑 대화할 가치조차 못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별 질책의 말을 하지 않았다.

"결혼한 출가외인에게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으니 니 좋을 대로 해라."

말은 그래도 목소리로 보아하니 나름 섭섭해 보였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니가 인간이가 짐승이가?"하면서 무섭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할 수도 있을 텐데 오빠 또한 신사적으로 나오니 그냥 내친김에 계속 '개개'기로 하였다.

드디어 올해는 네 번째 제사. 두 번째, 세 번째의 연습이 효과가 있었던지 이번에는 미풍양속(?)을 거역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그전에 비해 훨씬 줄었다. 아니, 확실히 '굳히기'에 들어갔다. 오빠 또한 '이것들(나와 둘째 언니)이 확실히 세 번씩이나 빠지는 것을 보니 영 구제 불능이구나'하며 체념을 굳히는 느낌이 들었다.

 

매년 아버지 기일은 좋은 일 하는 날

내가 아버지 제사를 안 가고도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 것은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생전에 아버지가 내게 제일 많이 하신 말은 "착하게 살아라"였다. 비록 취중이었을망정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된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그 말들이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잘하면서 그런 말하면 수긍이 가겠지만 가족들을 괴롭히며 그런 말을 하니 그 말을 듣기조차 싫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비로소 그 말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간 그 상실의 언저리에서 나는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우리 인간이 꼭 하고 넘어가야 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아버지가 말하던 바로 그 '선한 삶'을 떠올렸다.

'옳지, 매년 아버지 기일에 즈음하여 꼭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을 하자.'

의미 있는 일이라고는 했지만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뿐이다. 다름 아닌 좋은 일 하는 단체에 소액의 기부금을 내는 것. 그동안 아버지 제사 네 번 중 세 번을 빼먹고도 하늘나라 아버지에게 전혀 죄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의 뜻을 조금은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하늘나라 아버지와의 가상 대화)

 아버지 : 너무 적다. 좀 더 써라. 5만원이 뭐꼬?

나 : 시방 돈 없어요. 일단 시작은 이렇게 5만원부터 시작해서 차차 늘려 가겠심니더.

아버지 : 그래? 한번 믿어 볼까? 내가 다른 때는 몰라도 해마다 2월에는 꼭 점검할 끼이데이.

나 : 알았어요. 다른 때는 몰라도 아버지 기일을 즈음해서는 꼭 그 어딘가에 송금하겠습니다.

 

'기념일 후원'에 '추모 후원'도 넣으면?

 



월드비전 누리집에 들어가면 '기념일 후원'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무슨 기념일을 맞아 자축하면서 후원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아이들의 첫돌이나 생일을 맞아서, 혹은 결혼 몇 주년 기념으로, 또 아니면 병원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퇴원 기념으로 감사한 마음에 내는 후원이다.

난 제사 대신 '추모후원금'을 자신이 좋아하는 단체에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신 분의 삶과 성향에 맞는 곳에 추모후원을 하면? 정의롭고 공정한 것에 무게를 두고 사신 분이라면 아름다운재단 '소금창고기금'에다 추모 후원을 하면 될 것이다.

기아에 대해 유난히 마음 아파하신 어른이라면 세계의 굶주림을 돕는 재단에, 노인 분들에게 애잔함을 드러내신 분이라면 노인복지 재단에, 반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면 아동복지 재단에, 또 아니면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이었다면 문화예술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단체에 등등, 추모후원을 할 곳은 수두룩하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추모를 가족 안에서만 음식을 하고 제를 올린다면 가족끼리만 추모의 정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식으로 생전 고인의 삶과 뜻이 비슷한 곳에 추모후원을 하면 추모의 마음은 가족을 넘어 세상 속으로 퍼지게 될 것이다.

오래된 전통이기는 하나 '제사'는 많은 갈등을 야기하고 원래의 그 좋은 뜻도 빛을 바래 '형식'만 남았다. 물론 아직도 제사가 가족의 화목을 도와준다면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지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제사가 들어 있는 달만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한 게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고, 도망가고 싶어진다면 과감히 그 무거운 형식을 털어버리자. 대신, 형편에 맞게 부담도 없고 알맹이만 남는 '추모 후원'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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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꽃 -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전희식.김정임 지음 / 그물코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똥꽃>(그물코)을 읽었다. 그전에, 얼마 전 <인간극장>에서 방영한 저자의 여든 노모 모시는 광경을 본적이 있다. 여든 중반의 치매를 앓으시는 어머니를 어찌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지 아니 21세기에도 저런 효자가 있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한량으로 살다가 8남매와 빚을 남기고 일찍 돌아간 남편을 대신해 평생 일에 묻혀 사시다가 그 자식들 다 크고 저마다 살길 찾자 이제는 몸도 늙고 치매도 오고.....공동 저자인 김정임 할머니의 고단한 여든 중반 평생에는 그 나이 대 할머니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내 엄마(82세)도 시집살이와 우리들 키울 시절에는 항상 잠이 부족하여 잠 한번 크게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하였던가. 보리밥이나마 밥 한번 원 없이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하였던가.

‘하루 종일 논이나 밭에 나가 일하면서도 삼 세끼 밥을 하고, 방아 찧어 쌀 만들고, 한밤에는 베를 짜고 옷을 짓고, 베틀에 앉아 잠깐 졸았나 싶으면 어느새 닭이 울고....’ 엄마는 지금도 그 시절 얘기 할라치면 ‘아이고오’ 앓는 소리를 내는데 그 ‘아이고오’ 소리는 울 엄마만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네.

<“아만 보듬꼬 젖 멕일 쌔가 어딘노. 등에 업고 쇠죽 끄리믄서 겨드랑 미트로 돌려서 젖 물리고 쇠죽 뒤직이믄 김이 올라와서 숨은 막히고 아는 울고, 아이고오, 오줌이라도 싸믄 그것 치울 쌔도 엄씨 밥해야지.”

“미역국은 커녕 무시국이라도 한 바내기 먹고 싶었지만 누가 끄리주노. 호박잎 국밥이 먹고 싶었는데 간네띠기가 한 그릇 각꼬 온 것 너거 아부지가 홀딱 닦아 먹어 삐리고 나는 팥잎 국밥 건더기 건져 먹었다가 가슴이 쪼개지는 거 가태서 숨도 못 쉬고... 아이고오.”

“너는 날 보믄 맘 상할 끼고 나도 너 고상하는 거 보믄 맘 상하고. 내가 가기 전에 개 한 마리 사다가 너 꼬아주고 가야 될 낀데 아이고오, 오찌 될랑고. 입그라, 응? 곧 추워지는데 따시기 입거라.”-본문 213, 214, 224>

신산스러웠던 지난날에 대한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 대목을 읽으며 한참을 웃었다. 김정임 할머니의 말투가 어찌나 재미있고 톡 쏘는지 슬퍼 울면서도 웃음이 났다. 보아하니 아마 저자의 글발도 엄니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아닐는지. 

아무튼 저자의 어머니는 감옥살이 같던 도회생활에서 효자 아들 덕분에 하늘도, 땅도, 자연도, 공기도, 꽃도 모두 다시 찾았고 건강도 많이 회복 되신 것 같아 축하드리고 싶다. 

 
그러나, 효도만으로는 어려운 게 노인 복지의 현실

 
♣ 사례1: 나의 큰외숙모는 아마 20년도 더 되었지 싶다. 무엇이? 치매가. 내왕이 없어 그 얼굴이 가물가물하지만 외사촌 올케언니를 생각하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진다. 외사촌 오빠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며 시모 간병을 20년씩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효부 났다는 칭찬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 사례2: 남편의 고모는 당뇨, 신장병, 그리고 치매 등을 앓고 계시는데 고모의 며느리는 10년째 고모님을 돌보고 있다. 울 어머님은 ‘정말 며느리 한번 잘 들였다.’ 하면서 칭찬이 자자하지만 난 나와 같은 동년배인 그분이 나와는 다른 결혼 10년을 살았다는 것에 역시 억장이 무너졌다. 

올해 86세인 어머니를 저자는 1년째 모시고 있지만 그전에 8남매의 맏며느리인 저자의 큰 형수님은 20여년 모셨다고 하였다.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서울하늘에서 20여년 시모를 모신 그분을 생각자니 역시 가슴이 아팠다.  

저자의 어머니를 향한 지극정성은 백번 칭찬받아 마땅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저자의 경우는 특별하고도 특별한 경우이다. 우리 같은 속물들은 저자 같은 사람을 마땅히 본받아야 하나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아니 그럴 수 없다.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로 들어 갈 수도 없고 도시에서라 하더라도 그렇게 살갑게 모실수가 없다.

도시에서 역시 86세의 노모를 3년째 모시고 있는 한 지인은 우울증이 와서 한동안 무척 힘들었다고 하였다. 이러다 내 먼저 가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모시지만 자꾸만 한계에 부닥친다고 하였다. 

 “시모를 모시는 데는 기약이 없잖아요. 3년이면 3년, 5년이면 5년 기한이 딱 정해져 있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매일 돌아가시라고 기도 할 수도 없고 말이죠.” 

 
효도보다는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노인의 삶을 보장해줘야   

저자가 행한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도는 가깝게는 7,80년대의 우리네 며느리들이 다 한 것이다. 멀게는 이씨 조선 500년 역사가 효를 근본으로 삼았기에 다들 그렇게 효도를 하며 젊음을 불살랐고, 늙어지면 이제는 반대로 자식들의 효도를 받음으로써 ‘보상’받았다. 

그렇게 늙어서 보상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아니 늙어서 보상 받는 다기 보다 늙어서 ‘복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추 당초 맵다지만 시집살이 웬 말인고...’ 그저 나온 게 아니다. 갖은 설움을 이겨가며 시부모 봉양을 잘하고는 나중에 화병이 도저 이제는 반대로 가해자가 되어 며느리를 달달 볶으며 늙어간 게 우리네 선배 아낙들의 삶이었다. 

그런 식으로 억지효도가 반복되다가 시대가 가파르게 변하면서, 나름대로 먹고 살만해지면서 우리네 며느리들도 ‘배 째라’가 된 것이다. 저자는 본인의 ‘의지’로 어머니를 모시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마음은 애 저녁에 떠나도 ‘어쩔 수 없이’ 병든 부모 혹은 시부모를 수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며느리가 무슨 죄가 있나.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의 부모를 몇 십 년이고 수발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말이다. 또 장기간의 노인 수발은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다. 다른 엄마들은 수영 가네, 살 빼러 가네, 혹은, 뭐 배우러 가네, 하며 나름의 취미생활을 하며 사는데 자기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 수발하다 세월 다 보낸다면 얼마나 우울할 것인가. 

때문에 주장하노니 울 나라도 이제 노인복지를 국가에서 책임져 달라. 노인의 불행은 노인 한사람만의 불행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불행일수도 있다. 노인의 삶이 안정되어야 가족의 삶도 안정되고 가족이 건강해야 나라도 건강해지는 것이다. 

세금이 문제라고? 그러니까 상황설명 확실히 하고 당당하게 세금을 거두면 누가 말릴 것인가. 가까운 일본의 경우 2000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 시절에 전 국민 개호보험이 통과된 것으로 안다. 그 안에 노인수발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있음은 당연한 거고. 지난핸가 교육방송에서 보니 2000년에 시작된 그 제도가 이제는 안착이 되어 너무도 잘 굴러가고 있어 한없이 부러웠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지난해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 국회에서 통과 되었고 올 7월 부터는 시행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혜 폭이 아주 미미했다. 대략 3%의 65세 이상 노인 분들이 혜택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이름만 그럴듯하지 먹을 게 하나 없다. 제도를 보완해서 아니, 민주노동당이 말하던 대로 전 국민 ‘무상의료’가 되게 세금 좀 많이 거뒀으면 좋겠다. 

 
마무리.....

사실 지금 시아버님이 병원에 입원중이다. 뚜렷한 역할을 못하면서도 며느리들은 마음이 무겁고 아들들은 자주 연가를 써야하니 회사에 눈치 보이고 몸도 고달프다. 시어머님은 ‘그만큼 고생시켰으면 됐지 이젠 병구완까지 시키나’ 싶으니 우울하시다. 

처음엔 약 3주라고 했으나 별로 차도가 있지 않아 입원기간이 연장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한 열흘이 지난 것 같은데 시계추가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 비교적 짧은 기간임에도 다들 힘들어 하는데 장기간 수발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세상 그렇게 불공평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하여, 결론은, 내 생각은 그렇다. 세금 얼마든지 낼 테니 제발 노인 분들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실 방안 마련 좀 해 주시라, 국가는.  무늬만이 아닌 실질적 혜택이 ‘팍팍’ 돌아오게 제발 세금 좀 많이 거두시라. 국민들이 협조 안하면 협조 안 한다 하지 말고 홍보 좀 하시라.

아주 내 가심이 탄다, 아이 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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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사람 2008-04-0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같은 마음으로 가슴이 타네요... 허궁~~

폭설 2008-04-01 20:12   좋아요 0 | URL
차츰 좋아지겠죠? ^^ 하여간 개인에게 맞기면 노인불들만 더 힘들어지게 되니
우리도 제도 보완이 확실히 되어 노후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