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들 모두가 바람에 빠진 드라마가 있다. SBS의 <조강지처클럽>이 다름 아닌 그것이다. 지난 세기말 <절반의 실패>시리즈도 그 당시에는 대단했었는데, 이 요란 벅적한 21세기에는 ‘바람의 실존’을 또 어떻게 그릴지 자못 궁금하였다.
과연 <절반의 실패> 그로부터 상전벽해를 두 번씩이나 해서 그런지 이번 ‘바람’은 심각하기보다 코믹하게 불었다. 가슴에는 가득 한을 담고 있을망정 안양순(김해숙분)여사의 어투와 표정 등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안양순’이라? 사연인즉, ‘안’ 양순하다는 뜻이었다. 이 드라마에는 안양순 여사를 시작으로 주인공들의 이름이 모두 그 사람의 내면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등장인물의 성격과 역할이 확 드러나는데 이름 그 자체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한심한 +안양순 +복분자 +한원수 +나화신+모지란 +이기적+한복수 +정나미 +길억
+이화상(박인환분)
한심한은 조강지처 안양순을 차버리고 복분자와 살고있다. 복분자는 한심한을 독차지했지만 여차하면 옆길로 새는 한심한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마음은 착해서 안양순이 갖은 욕을 해도 형님, 형님하며 정을 내는 것이 때론 이쁘기까지 하다.
한원수(안내상분)는 동생 한선수와 달리 하필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부유한 유부녀 모지란(김희정분)에 빠져 나화신(오현경분)이 꼴도 보기 싫어지고. 이기적(오대규분)은 정나미(변정민분)가 부자 길억(손현주분)과 결혼하는 바람에 매점아가씨 한복수(김혜선분)와 홧김에 결혼하였는데 한복수는 갈수록 매력 상실이고 그런 찰나 첫사랑 정나미가 나타나 혼을 빼앗긴다.
나화신은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이혼만은 안 된다며 고집을 부리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한원수는 나화신이 지긋지긋해지고 종내는 폭력까지 휘두르고 만다. 팔은 안으로 굽는 이치. 원수의 엄니 양순 여사는 처음에는 동병상련으로 며늘 편을 들었으나 아들이 죽어도 싫다며 팔딱팔딱 뛰니 ‘사람 싫으면 못 사는 벱이여.’하며 슬쩍 냉정모드.
길억과 모지란 남편은 배우자의 반란에 입술을 깨물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생각해서 백번 참으며, 잘해보자 다짐하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 억울한 심정을 어디다 하소연할꼬.
재혼해서 잘되기 그리 쉬운 줄 아나?
며칠 전, 동네 미용실 원장님에게 <조강지처클럽>무지 재미있다며 권했다가 ‘재미’라는 말에 꼬투리가 잡혀 혼 줄이 났다. 그런 심각한 상황을 어떻게 ‘재미’있게 볼 수가 있느냐며 몰아부처 ‘아이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며 읍소했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아니, 그 드라마엔 왜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도 없어? 왜 자꾸 그런 드라마 만드는 거야? 바람은 달콤하지만 순간이란 걸 왜들 모르누. 태풍 지나간 자리 복구 어렵듯이 바람도 마찬가지야. 정신 차려 이친구야.”
“요즘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던데요? 그 왜 길억(손현주분)씨 친구가 길억씨 보고 말하기를, ‘니는 절대 니 마눌 바람 난 걸 니가 알고 있다는 티 내서는 안돼.’라며 충고하던데요. 그리고 모지란(김희정분)씨 남편도 다 눈감아 줄 테니 자식 생각해서 참고, 어디 바람이나 좀 쏘이고 오라며 수표까지 쥐어 주던데요. 요샌 남편의 과거는 못 받아줘도 마눌의 과거는 받아 주는 분위기던데...후후..”
“땍!! 아무리 세상이 변했기로서니 그라믄 안 되는 기라. 자식 두고 그라믄 안 되는 기라. 경험자가 말하면 새겨듣고 집에 가서 남편 떠받들며 살아욧. 요샌 다들 왜 그런다니. 내가 가게를 하다 보니 그런 사람 수없이 봤다. 가정 부수고 나가 잘 되는 사람 못 봤다.”
“아니, 드라마가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주제들을 해학으로 승화시키며 잘 풀어간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디...그리고 요즘은 어느 한쪽이 무작정 참는다고 될 일도 아니고 아니다 싶으면 일치감치 각자 새 출발 하는 것도....”
“새 출발은 무스그 새 출발 스토리 뻔하다. 새 출발 해봐야 똑같다. 아니, 더 복잡하고 힘들다. 더 잘되는 것은 천에 하나다.”
“우쨋거나, 예전에는 갈 데 없는 여자들이 일방적으로 참고 살았기에 ‘검은 머리 파 뿌리’라는 유종의 미가 유지되었지만, 그 속이 그 속이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사이 안 좋은 부모 밑에서 밥 얻어먹고 사는 지식들도 힘들었어요. 후훗.”
“그러게, 옛날엔 무슨 성심으로 다들 그렇게 살았던고? 구박받으며, 때론 맞아가며, 시부모건사에 자식들 입에 풀칠까지 그거 혼자 다 짊어지면서도 이혼안하고 살았다. 요새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것도 못 참데. 옛날사람들은 너무 참아서 탈이지만 요새 사람들은 너무 못 참아서 탈인기라.”
“긍께, 뭐 뾰족한 좋은 수 없을까요? 시청률 올리자고 불륜드라마 쓰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나름대로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거잖아요.”
“경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일단 문제가 있더라도 자식이 클 때까지는 서로 생활반경을 조금씩 피하면서 함께 사는 게 차선인 것 같아. 깨진 그릇 같은 서로의 마음을 봉하겠다고 노력하는 것도 이 개명 천지에 시간 낭비고....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사이가 안 좋으면 ‘아빠 타지로 전근 갔다’로 처리하고 따로 살던가. 아무튼 원수로 헤어지는 것은 안 좋은 것 같아. 헤어져도 신사적으로 헤어져야지.”
“그렇죠?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쪽이 사과문도 낭송하고 재산도 좀 더 떼 주고, 또 상대가 헤어질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하면 몇 년 더 기다려 주기도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외국 영화에서 보면 전남편이랑 새남편이랑 한자리에 앉혀놓고 잘도 웃던데..”
“그렇게 배려하고픈 마음이 생기는 사이라면 아예 이혼이란 걸 안하지. 그냥 대충 참고 살지. 그리고, 전남편 새남편이랑 사이좋게 떠들기 까지 그 나라 사람들도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겠지. 우엣기나, 평소에 마음보를 잘 쓰고 살더라고, 젊은 사람들.”
다소 지나친 듯 하지만 드라마는 현실을 충분히 반영
내 나이 이십대라면 무슨 이런 황당한 드라마가 있나 했겠지만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이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숨은 뜻과 적나라한 설정이 이해가 갔다. 현실이라고 그보다 덜 하라는 법은 없다. 지금은 설사 조금 덜하다 치더라도 그리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나 할까.
사랑(타자의 입장에서는 바람)이 어느 날 교통사고처럼 찾아왔네 하며 운명인 듯 빠져들지만 좀 더 파보면 다 이유가 있다.
이유 없이 싫어지는 권태기던가, 아주 커다란 이유로 상대배우자가 꼴도 보기 싫어지던가, 도대체 상큼하게 되는 일이 없는 자신에 회의가 들던가, 금전적으로 어느 한쪽이 신뢰를 저버려 더 이상 희망이 없든가 등 바람의 씨앗은 얼마든지 있다. 원인(씨앗)은 달라도 그 모든 것들이 바람(사랑)으로 ‘부화’ 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바람의 당의정에 빠져 현실감을 잃을 수가 있는데 달콤한 사탕발림이 끝나고 났을 때의 그 추레한 현실은? 물론 당사자들의 몫이다. <도쿄타워>의 주인공 아짐처럼 ‘내일 니가 나를 싫어해도 오늘 나는 너를 사랑해’ 정도 되면 새로운 사랑을 할 자격이 있겠으나.... 일단 자식이 있다면 시간을 두고 냉정하게 여러 가지를 고려해보고 주변의 충고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바야흐로 ‘인생 이모작, 삼모작’의 시대에 굳이 어린 자녀들을 불안에 떨게 하며까지 사랑에 빠질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다면 적어도 15~20년은 서로 합심해서 자녀교육이라는 프로젝트를 잘 완성하고 그다음에 당사자들의 인생을 생각하는 것이 최선책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은, 한원수의 말대로 ‘나이 사십, 애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것’들에게 찾아온 바람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그 결말이 자못 궁금하다. 더불어 소 읽고 외양간 고치기보다 우리사회에 불고 있는 위험수위에 이른 가족해체의 위기에 대해 나름의 처방전들도 좀 내어 주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