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일 차 우체국에 갔다가 손님이 많아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던 중 모 여성지를 훑게 되었다. 이런 저런 화제 거리들을 넘기다가 류승완 감독이 큰딸을 대안학교에 보낸 ‘이유’에 시선이 멎었다.

 

‘성적비관으로 자살한 학생수가 8000명인데, 그 숫자는 베트남전쟁에서 사망한 한국인 군인 수(5000명)보다 많다는 것에 충격을 먹었어요.’

 

나도 얼마 전 신문에서 성적비관으로 자살하는 학생 수의 연도별 통계를 보고 무척 충격을 받았기에 그 심정 충분히 이해되었다.

 

아래는 얼마 전 신문에서 본 성적비관으로 자살한 10대들의 각기 연도별 사망자 수이다.



2000년.................. 264명

2003년.................. 297명

2005년.................. 279명

2006년.................. 233명

 

너무 많다. 통계의 기간을 몇 십 년 길게 통산하면 8000명이 충분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마어마한 통계완 달리, 한해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알게 되는 성적비관 자살자수는 서너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해마다 입시철 언저리에 접하는 성적비관 청소년 자살은 언제 부터인가 명절 언저리의 명절증후군 기사만큼이나 의례 나오는 기사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 기사가 뜨면 한 며칠은 안타까워하며 입시 제도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듯 하나 며칠 못가고 스리슬쩍 새로운 뉴스에 묻혀 유야무야  되고 만다. 마치 명절 증후군에 대한 기사가 명절 지나면 사라지듯이 성적비관자살 청소년에 대한 기사도 그렇게 사라진다. 괜히 자꾸 떠들다가 가만있는 청소년들 자극할라 나름 속으로 핑계도 대면서.

 

그러나 우리가 저마다 침묵하고, 그저 내 아이가 아니라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아이들은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갔던 것이다. 통계에 비추자면 매달 20여명의 아이들이 성적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일진대, 성적이 얼마나 압박하기에 하나 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내 놓는 것일까.

 

모의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쪽지시험. 시험, 시험, 시험.... 기사들을 보면, 수능성적을 비관하여 목숨을 버리기도 하지만 중간고사, 모의고사 잘 못 본 것을 비관하여 아직 새파란, 입시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중학생마저 또는, 고3도 아닌 고1 마저 아파트 창문을 뛰어내렸다.

 

뿐인가. 매번 일등 하던 학생이 어쩌다 한번 미끄러진 일을 가지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성적이 무엇이 관대 목숨보다 중요하게끔 느끼도록 우리 기성세대들은 아이들을 닦달한단 말인가.

 

막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맛을 아나. 아이들이 자기목숨으로 배수진치고 공부하고 있음을 통계가 확인시켜주면 우리사회, 우리 부모들도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텐데  왜 우리부모들은 ‘그래도 내 아이는 아니야’ 생 까고 있는 것일까.

 

내 아이가 아니면 단가. 내 아이가 아니고 남의 아이라도 해마다 2,3백 명의 학생들이 목숨을 버린다면 내 돈으로 내 아이 사교육 하는 일도 자제해야 마땅한 것이다. 교과부 장관, 시도교육감들은 이런 생목숨이 날아가는 데도 잠이 오는가 모르겠다.

 

아이들이 이토록 압박감을 느껴도 갈수록 사교육은 더 극성이 되어가고 있다. 국제 중은 거기다 기름을 부었다. 며칠 전에 보니 우리 국민들이 올 상반기에 쏟아 부은 사교육비가 15조랬나. 너무 어마어마해서 얼마나 큰돈인지 가늠이 안 간다.

 

게다가 그것은 전 년에 비해 10%인가 는 것이라는데, 결론적으로, 그렇게 사교육에 돈을 쏟아 붙는 만큼 그에 비례해 학생들이 느끼는 정신적 공황감은 더 세어질 것이다.

 

사이비 종교에만 ‘집단 최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학부모야 말로 ‘사교육교’의 맹신자들이다. 도대체 이 집단 최면엔 무슨 충격을 주어야 제 정신이 번쩍 들까. 학생들이 좀 더 뛰어내려 줘야 하니?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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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집에 있던 화분들이다. 예전에 일렬로 쭉 늘어 놓았을 때는 그냥 무덤덤 했는데
이번에 이렇게 정리된 것을 보니 참 예뻤다.
가만 보니 화초만 예쁜 것이 아니라 꽃그릇도 예뻤다.

 우리집 화분으로 말하자면 대개가 짝퉁 청화백자(?)가 대세인데 친구의 화분들엔 청화백자가 없었다.
대신 저마다 모양과 크기를 달리하는 단  하나뿐일것 같은 화분들만 있었다.
이꽃 저꽃, 이그릇 저그릇 , 어느 하나 버릴것 없이 다 예쁘구나 감상하던중,


문득, 꽃그릇도 주인을 따라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내가 촌스럽듯이 내 화분들도 가만보니 다들
촌스러웠구나 하는 생각이..ㅎㅎ. 말이 좋아 청화백자지 아기자기한 맛이 전혀없는 모양새들.

물론 나름 변명거리는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외모보다  내면과 내실이 중요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항상 이런 변명으로 나의 약점을 연명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나의 꽃들에게도

후줄그레한 옷들을 입히고 말았다. 옷이 중요한게 아니라 무럭무럭 자라는
튼튼한 이파리와 줄기, 뿌리가 중요하다면서...ㅎㅎ.  

물론 보답하듯 나의 화초들은 튼튼하다.
그러니, 그렇기 때문이야 말로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쁜 옷(화분)을 입혀줘도 좋으련만...


난 너무 무심하고 심지어는 몇년의 세월이 흘러 엄청 커버린 화초에게도 여전히
몇년전의 옷을 입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옷 갈아입히기 싫어서 새로산 화초의 경우 아예 처음부터 미래를 생각하며 큼지막한
옷을 입히기도 했다.


반성한다. (그러나 반성이 행동으로 옮겨지기에는 수년이 걸리지 싶다.^^)

하여간 친구의 꽃들과 꽃그릇들은 너모 예뻤다.
마찬가지로 친구의 옷 또한 집에서 입는 월남치마나 운동복 조차 예쁘다.


나는 외출복도 딱히 없고 집에서나 밖에서나 만년 청바지에 면티하나로  개긴다.
나야 말로 내 화분 만이 아닌 내 몸에 걸친 옷도 그러고 보니 '청화백자'에 다름 아니었네.ㅋㅋ

(아래는 분위기 없는 내 화분.. ㅠㅠ )



친구네와 비교되는 내 화분. 지인 들은 위의 벤자민을 볼때마다 키에 맞고 좀 어울리는 것으로 화분을

바꿔 주라는데 나는 늘 건성으로만 알았다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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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의 글을 너무 자주 퍼오는 것 같아 안 퍼오고 싶어도 아조 가려운데를 긁어주니 아니 풀수가 엄써~~~

즐감하시길~~

이명박의 쇼생크 탈출
 - 대한민국 거대한 몰락의 서두에서 길을 묻다

(달마강원 / 김동렬 / 2008-9-3)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모건 프리먼의 가출옥 심사 장면을 회상하기다. 모건 프리먼은 자신이 훌륭하게 교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심사관들에 의해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왜? 눈빛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설득은 먹히지 않는다. 삶에 대한 의지가 남아있는 한 다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감옥 안에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초점 잃은 노숙자의 눈빛을 보일 때라야 가석방은 허용된다.

그렇다. 희망이 문제다. 이명박 경제는 경마장 경제다. 경마꾼들은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설사 한 두 번 고배당을 맞더라도 잃어버린 돈이 만회될 리는 없다. 그런데 왜? 희망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학습본능이 있다. 학습 유전인자가 문제다. 학습 유전인자가 희망 호르몬을 생산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그 호르몬의 작용이 문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원초적인 약점이다.

경마장에서 배팅요령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시장에서 말을 관찰한다든지, 목요일 새벽조교를 관찰한다든지, 기수의 기승능력과 주로전개를 추론한다든지, 특정한 말의 기록을 추적한다든지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모든 경우의 수에 있어서 골고루 실패를 맛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학습본능이 발동하여 자신이 아직 실천해 보지 않은 미지의 배팅방법을 찾아 끝없이 주변을 배회한다.

모든 방법에서 실패하고 더 이상 실패를 학습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 달관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진짜 게임이 시작된다는 데 있다. 완벽하게 절망했다면 비로소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또 다른 희망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어느 순간 돈이 돈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생이 허무해진다. 그때부터 자신의 성격을 개조한다. 평생 남에게 돈 빌려달라는 소리 한번 못해본 소심한 사람이 갑자기 호탕한 성격의 대인배로 변신한다.

가까운 친척부터 먼 학교동창까지 찾아내어 돈을 빌려대기 시작한다. 성격을 바꾸고 동선을 바꾸면 신천지가 열린다. 끝없는 탐구와 모험과 학습은 계속된다. 끝내 경마장이라는 지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명박은 이미 달관한듯하다. 눈빛이 풀렸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대운하로 망하고, 환율조작으로 망하고, 주가폭락으로 망하고, 고물가로 망하고, 747로 망하고, 촛불로 망하고, 그는 골고루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아직 부동산 투기 조장이라는 신천지 개척의 꿈이 남아있다. 일본이 거품경제로 망해 먹고 미국이 모기지론 사태로 망해 먹었다는 그 화려한 몰락의 세계. 초절정 고수들만이 맛볼 수 있다는 꿈의 세계가 남아있다.

줄 끊어진 번지점프의 짜릿한 모험을 그는 아직 해보지 않은 것이다. 지금 입이 헤벌어졌다. 꿈의 나래가 막 펼쳐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예고편이었다. 하여간 경마꾼 몰락의 5단계는 이렇다.

1) 초심자의 행운을 노리는 단계
2) 다양한 배팅방법의 조합을 탐색하는 단계
3) 고수를 찾아다니고 끼리끼리 인맥 만들며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는 단계
4) 자기 성격을 뜯어고치고 뻔뻔해져서 집안을 통째로 말아먹는 단계
5)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를 깨닫는 노숙체험의 단계

이명박 경제의 몰락 코스는 아직 2단계에 와 있을 뿐이다. 지하층 밑에 지하 2층 있고 그 밑에 더 큰 지옥문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는 끝장을 보고도 한 번 더 보아야 오르가즘을 느낄 위인이다.

주가가 폭락한다. 충분히 폭락했는데도 폭락은 계속된다. 왜? 희망 때문이다. 개미들의 희망이 살아있는 한 주가는 결코 상승하지 않는다. 개미들이 손실을 복구하기 위해 치고 빠지기를 거듭하며 장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큰손들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개미들이 손을 털고 완전히 시장을 떠날 때까지 장난질을 멈추지 않는다. 개미들이 완전히 이탈해야 큰손들의 장악은 가능해지고 그들이 시장을 장악해야 주가는 탄력을 받는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얗게 표백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마지막 남은 한 가닥 꿈을 하얗게 불태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내지 않으면 안 된다. 순수한 제로가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번번이 실패해서 완벽하게 길이 막혔다 해도 여전히 우회하는 방법은 두엇 남아있다는 거다. 완전히 탕진해서 알거지가 되었다 해도 또 그를 경마장으로 유인하는 무언가가 있다.

폐인의 코스는 멀기만 하다. 김영삼의 절대 나락으로 부족해서 이명박의 완벽 탕진으로 재실험 하고 그것으로 부족해서 어리버리 정몽준 카드와 겉멋들이 박근혜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정신 차리려면 멀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의 전국정당화를 주문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해찬, 유시민이 가세한들 민주당이 되살아날까? 그럴 리 없다. 민주당의 정체성 혼란을 심화시킬 뿐이다.

민주당 역시 거덜나지 않았다. 그들의 거덜나기 실험은 계속된다. 민주당은 알거지 5단계 중에서 지금 3단계의 실험에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두 번 쯤 더 망해보아야 태도를 바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 민주당은 잘해봤자 DJ시절 자민련 역할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정치에서 발을 빼는 방법으로 커다란 정치의 공백을 조성하고 있다. 그 빈 공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 빈 공간의 크기만큼 나중 다시 뭉칠 때 가속도의 크기가 결정된다. 희망이 문제다. 그들은 거대한 몰락을 꿈꾸고 우리는 거대한 반전을 꿈꾼다. 갈 때까지 가보는 거다. 주인공이 다 죽어야 끝나는 드라마 아니겠는가.


※ 출처 - http://www.drkimz.com/bbs/view.php?id=notice&no=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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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번의 데이트 세계일주 - 이프 여성경험총서 6
제니퍼 콕스 지음, 권희정.류숙렬 옮김 / 이프(if)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제니퍼 콕스. 영국 여성(여행 당시 38세). <80번의 데이트 세계일주>(도서출판 이프)의 저자이다. 

유명 여행전문 출판사 기자를 거쳐 여행전문 방송인이 된 저자는 제목 그대로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러 세계 일주를 떠났다. 세계 곳곳에 포진해 있는 인맥들에게 괜찮은 남자 한 명씩만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추려 채워진 인원이 80명이었나 보았다.

그러나 의문. 우리나라처럼 나이들수록 이성을 만나기 어려운 구조도 아닌데 생활 주변에서 찾지, 뭔 남의 나라까지 원정가고 난리랴? 게다가 이분의 직업과 인맥으로 보자면 영혼의 동반자는 구해도 벌써 구하고도 남을 견적인데 너무 많아서 오히려 존재가치가 희박해서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

아무튼, 이분은 영혼의 동반자를 구하러 세계여행을 떠났다. 이 책은 그 떠남의 기록이다. 북유럽의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를 시작으로 해서 서남 유럽, 미국, 호주, 일본, 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 만남을 가졌다. 참으로 팔자 한 번 늘어졌다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막상 이 책을 읽어 나갈수록 그렇게 상상대로 장밋빛 여정이지만은 않았다.

 '남자가 한명도 아니고 80명 씩이나 줄서 있으니 월매나 좋으까?'

땡! 실상은 무척 피로하고 괴로운 날의 연속일 때가 더 많았다. 
 
하긴 각기 다른 80명의 인물과 데이트 한다는 것 자체가 전무후무한 시도 아닌가. 한 번쯤 꿈 꿀 수는 있어도 이렇게 옹골차게 정해진 기간 안에 실행한 사람은 아마 저자가 단연 으뜸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말이 좋아 데이트 여행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렸다. 물건 사는 일이야 이것저것 만져보고 안사면 그만이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은 물건 사기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이지만 80번의 데이트(예정은 80번이었으나 실지는 76번으로 쫑 냄) 중 호감이 가는 축보다 호감도 안가고 공감대도 형성 안 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때문에 저자는 그만 여정을 중도에 작파할까 회의도 많았으나 다시 용기를 내고, 또 내고 하면서 여정을 소화했다. 그러다 총 데이트 여정의 3분의 2 지점인 55번째에서 꿈에 그리던 영혼의 동반자를 만났다. 시애틀에 사는 미국남자였다.(내 눈엔 별로^^)

동반자를 만나고도 형식적 완주를 위하여 계속 데이트 여행을 하던 중 76번째에서 55번 남자에 버금가는 매력을 발견하고 심히 ‘흔들’렸다. 그러나, 처음으로 ‘전기’를 느꼈던 55번 남자와 잘 해보기로 하고 애써 미련을 떨쳤다. 그리고 이미 영혼의 동반자를 만난 상태에서 더 이상의 데이트 여행은 명분이 없다 생각하고 나머지 77, 78, 79, 80번 여정은 취소하였다.

과거 연애사를 당당히 밝혀도 되는 사회가 부러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저자가 자신의 ‘연애 이력’을 하나도 숨김없이 까발린 것이었다. 30대 후반인 저자는 책 앞부분에 그 동안의 삶에서 만난 이성 관계를 요약 정리하였는 바.

첫사랑, 첫 동거의 남자부터 시작하여, 결혼, 일시적 관계, 동료관계의 남자까지 빠짐없이 소개하였는데 총 8명이었다. 8명 하니까 생각나는데 선진 외국 사람들은 일생 몇 명의 이성과 관계를 맺을까.

인즉슨, 며칠 전에 본 <선데이 나이트 섹스 쇼>라는 ‘슈 조핸슨’ 할머니 성 상담가의 상담방송에서 언뜻 비춰준 통계에 의하면 캐나다의 성인은 평균적으로 일생 14명(?)의 이성과 관계를 맺는다고 하였다. 미국은 12명 호주는 10명이었나 그랬다. 그에 비하면 영국은 순위에 언급 되지 않은 걸로 보아 위 나라들 보다 소박할 것이라 추측.(웃음)

아무튼, 여자의 ‘변신’은 무죄이나 여자의 ‘과거’는 무죄가 아닌 세상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다른 무엇보다 저자의 소위 ‘관계 이력서’라는 것이 눈에 들었다. 뿐인가. 총 76번의 데이트 중 나름 선방한 남성들과는 죄다 사진을 찍어 올렸는데 그 또한 마음에 들었다. 우리네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렇듯 과거든, 현재든 이성관계의 이력을 대놓고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제 짝 찾기가 훨씬 수월할 텐데. 예전엔 남자의 과거쯤은 무죄였으나 요즘은 남자의 과거도 그리 당당하지 못한 듯한데. 남자고 여자고 피차 과거를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웃음)

나아가, 결혼을 생각할 만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한번 살아보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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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이 깊은 곳에 분쟁이 있더라. 고로 모두들 나이롱 신자가 되면 분쟁도

줄어들지 않을까.ㅋㅋ  불교신자들의 집회는 이해하지만 오체투지는 거두소서.

왜 그렇게 몸을 상해야 하는가. 오체투지 한다고 들어줄 위인들도 아니고 개신교의 회개는 아직 너무 먼 희망이다.

개신교는 물론 천주교 불교 그리고 각종 소수종교들의 쪽수가 팍 줄어들때 우리나라는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물론 어제 불자들의 행동은 타당하다 생각..^^ 그러나, 개신교가 '우리는 너들 보다 더 모은다'자리펼까 걱정, 자리만 펴는 것이 아니라 통성기도 까정 한다면.... 오우, 지저스!

  

그럼 즐감하시길~~~

이명박이 불교를 차별했나?

 

사찰의 대규모 불사라든가 국립공원의 문화재 관람료 징수 문제 등으로 권력측에 약점이 잡혀 있는 불교계가 들고 일어난 것은 상당히 의외다. 이명박 정권이 불교를 차별한다고 하는데 과연 차별을 했는지 의문이다.

 

지도 사이트에 사찰정보가 누락된 건이나 교회 행사에 어청수 경찰청장의 사진이 붙은 건이나 조계종 총무원장을 검문한 것이 불교차별의 방증은 되겠으나 직접증거로 보기에는 약하다.

 

실무차원의 잘못이 있었지만 정권이 조직적으로 차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표면에서의 구실이 그러할 뿐 이면에서의 본질은 따로 있다.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아니다.

 

표면과 이면이 있다. 이전의 황우석 문제나 심형래 소동이나 다 마찬가지다. 황우석 개인의 비리나 심형래의 애국심 마케팅 따위는 시비를 걸기 위한 표면의 구실일 뿐 본질은 이 사회의 계급갈등이다.

 

대중을 통제하려는 지식인의 욕망과 지식인을 통제하려는 대중의 욕망이 충돌한 사건이다. 쇠고기 사태도 마찬가지다. 미국 쇠고기가 과연 안전한지의 과학적 사실여부는 애초에 다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이 대중의 여론에 의해 통제되는 민주정권인가 아니면 통제불가능의 독재정권이냐다. 독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의 여론과 시민사회의 공론이 반영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독재다.

 

광우병 쇠고기보다 폭주하는 이명박 정권의 통제불가능성이 더 무섭다. 대중이 어떤 방법으로도 이명박 정권을 용이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촛불로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좌절감의 표현이다.

 

흔히 소통이 막혔다고들 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말이 막힌 것이 아니다. 말은 충분히 오가고 있다. 지금 정부나 시민단체나 뻔한 사실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동문서답을 한다.

 

말이 막힌 것이 아니라 소의 코뚜레가 끊어졌고, 개의 목줄이 끊어졌고, 말의 재갈이 사라진 것이다. 속된 말로 '생까면 그만'인 상황이 벌어진 거다. 말로 소통하는 수준은 넘었다. 물리적 충돌은 필연적이다.

 

까놓고 이야기하자. 이명박 정권이 특별히 불교를 차별한 것이 아니라 대선 전후로 보수 기독교계가 이명박 정권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선과정에서 기독교계가 우리 사회의 묵시적인 룰을 어기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이며 불교계의 누적된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다.

 

'팽배한 반지성주의가 만인대 만인의 진흙탕 개싸움으로 발전했다'

 

이명박 정권과 불교의 충돌이 아니라 얼키고 설킨 우리 사회의 전방위적 갈등이 노사갈등, 이념갈등, 세대갈등, 지역갈등을 넘어 이제 종교갈등으로도 터져나온 것이다. 새로운 메뉴 하나 추가다.

 

불교가 겉으로는 이명박 정권을 비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독교계를 비난하고 있다. 타 종교와의 수평적 공존을 거부하고 힘을 믿고 위세를 부린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다. 매는 기독교가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명박 정권이 불교계에 사과를 한다고 해서 해결될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드러나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과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다. 사과는 이명박이 아니라 기독교계가 해야 한다.

 

일부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자정노력이 있어야 한다. 내부에서 걸러내지 못하면 외부에서 따귀 날아온다. 그리고 참회는 불교계 내부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모든 종교가 감시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종교가 쇠퇴할 조짐이라 생각한다. 과거 어려운 시절에 종교는 약하고 힘없는 자를 격려하는 일을 했다. 이제 사회가 발전하니 종교가 돈은 벌었는데 역할이 없어졌다. 종교가 사회에서 역할이 없어지니 정치에 개입해서 무리하게 역할을 만들려고 한다.

 

지금 종교의 근본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신도가 늘고 헌금이 늘어 대궐같은 건물이나 지어봤자 사회적 역할이 사라지면 존경받지 못하게 된다. 더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그대로 휴거된다.

 

스님 신돈이 정치에 개입하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다. 기독교가 정치에 개입하자 나라가 거덜날 판이다. 역사가 일천한 기독교가 그동안 사회에 기여한 것에 비해 너무 큰 힘을 가졌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불교가 기독교에 맞설 힘이 없으니 우회적으로 정부를 때리는 것이다.

 

사회는 무수한 밸런스들의 집적에 의해 유지된다. 그 밸런스가 무너졌다. 노사의 충돌, 빈부의 충돌, 좌우의 충돌, 세대의 충돌, 지역의 충돌이 벌어진다. 종교갈등도 그 무수한 충돌의 한 파편에 불과하다.

 

지금 전방위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정치가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정치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나서는 정치인도 없다. 이명박 정권의 잘못을 깨우쳐줄 야당의 인물도 없다.

 

해방이후 50년 간 독재자의 철혈에 의해 유지되던 사회가 지난 10년 간은 민주정권의 도덕적 권위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제 정권의 도덕적 권위마저 사라져 버렸다. 권위라고는 없는 순수한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사회가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이명박의 실용주의란 것이 무엇일까? 민주적으로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민주적으로 하면? 당연히 목청 큰 쪽이 이긴다. 말 많은 쪽이 이긴다.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긴다. 떼 쓰는 쪽이 이긴다. 돈 많은 자가 이기고 반칙하는 자가 이긴다. 천하대란에 빠져버린다.

 

사회에 최소한의 질서는 있어야 한다. 그 질서는 독재자의 총칼에서 나와서 안 되고, 조폭의 주먹에서 나와서 안 되고, 재벌의 돈에서 나와서 안 되고, 조중동의 배후조종에서 나와서도 안 된다. 민주정부의 도덕적 권위와, 전문가 집단의 양심과, 과학의 생산성에서 나와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오해하고 있다. 다수가 힘으로 밀어붙이는게 민주주의는 아니다. 승자가 독식하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가 만능은 아니다. 여러 사회주의적 가치들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보장은 넓히고 경쟁은 좁혀야 한다. 모든 형태의 경쟁은 감시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아직도 멀다.

 

한국인들은 왜 이명박을 찍었을까? 애초에 이런 난장판을 원했던 것이다. 노태우의 중간평가 공약이 먹힌 예와 같다. 2라운드가 벌어진다면 거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함부로 표를 던진다. 흠결있는 약체 대통령이 뽑혔다. 기다리던 2라운드가 벌어졌다. 당신들은 처음부터 이런 게임을 원했다.

 

1라운드가 대선이면 2라운드는 난장판 개싸움이다. 좌파와 우파가 거리에서 대결하고, 기독교와 불교가 세과시로 대결하고, 노동자는 파업으로 재벌은 폐업으로 힘대결을 벌인다. 기성세대와 젊은세대가 인터넷에서 악플로 대결하고, 수도권과 지방이 김문수 놓고 대결한다.

 

존경받는 스승이 없는 사회다. 마지막 양심의 보루 노무현 세력 몰아내고 팽배한 반지성주의가 만인대 만인의 진흙탕 개싸움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인의 자업자득이다. 대란으로 대치에 이른다 했다. 대란이 일어났으니 대치가 나올 것인가?




ⓒ 김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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