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9일은 4·19혁명일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결혼기념일이었다. 특히나 올해 사일구는 그 결혼이 만 10년 되는 날이었다. 10년 전 4월, 4월에 결혼하기로 하고서 네 번의 일요일 중 거침없이 19일을 택한 것은 그날이 '4.19혁명일'이었기 때문이었다. 

30여년 전 이날엔 민주주의를 위해 젊은 넋들이 꽃 같은 자기 목숨을 버리기 까지 했는데, 겨우 두 사람의 마음 합치는 것을 힘겨워 한다면 '말이 안 되지'하며 사일구의 역사성에 기대 보기로 했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의미를 두어서 그런지 몰라도 확실히 '4·19 효과'는 있는(?) 것 같다. 궁금하면 내년 '사일구'에 결혼들 해보시라. 

하여간 그때나 지금이나 결혼기념일이 '사일구'인 것은 생각만 해도 그냥 기분이 좋다. 소소하게는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릴 일이 없어서 좋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 중에는 4·19가 무슨 날인지조차 모르는 학생들도 많다는데 적어도 내 아이들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이다.

아무튼, 남들의 혼자 살줄 알았다는 직감을 부수고 결혼을 했고 무탈하게 10년씩이나 살게 되어 이래저래 감사하고 감회롭다. 5,6년도 아니고 8,9년도 아닌 10년이라는 햇수에 느낌이 더 새롭다. 산이 있다면 일단 큰 산 하나는 넘은 기분이다. 물론 앞으로도 나름 큰 산들이 버티고 있겠지만 일단, 아이들을 웬만큼 키웠다는 것이 안심되고 수지맞는 장사를 한 것 같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지나고 보니 세월이 유수 같다는 옛사람 말이 실감난다. 결혼이 5, 6년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는 언제 10년이 되나 했는데 이렇게 결혼 10년을 맞고 보니 지난 3650일이 한 10초로 축약되어서 느껴진다. 10초가 무에냐? 찰나처럼 느껴진다. 혹은 마치 그런 과거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친정엄마는 여든이 되었을 때 말하기를, 지난 세월이 '한순간' 같다고 하였었다. '엊그제'같다고도 하였었다. 결혼 20, 30년 된 사람들에게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정말이지 엄마가 느꼈던 그 '한순간'을 나도 느꼈다.

하여간, 앞으로 10년 또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빠르게 흐르는 만큼 그 순간들이 지루하지도 않을 것 같다. 애들도 크고 어느 정도 자유로우니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지난 10년을 살면서 나름의 지혜가 생겼을 것이기에 앞으로 10년은 이 지혜의 양식을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헐어 쓰면 될 테니 유비무환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기념일에 발견한 새로운 취미

그런데, 결혼 10년 되던 지난 사일구에는 웬일인지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갔다. 결혼 자축은 저녁을 밖에서 먹는 것으로 일치감치 합의 봤는데 그래서 그랬나, 시간이 너무 안 갔다. 오전 내내 집에서 뭉개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인근 대학가 농구장에 가서 규칙무시하고 무조건 넣기만 하면 되는 농구를 하였다. 

농구를 하다가 좀 쉬면서 보니 스쿼시 벽이 눈에 띄었다. 눈에 띄기만 한 게 아니라 그 무심한 벽에 순간, 느낌이 확 왔다. 테니스는 같이 해야 되는 것이 부담이라 당기지 않았는데 스쿼시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갑자기 매력으로 다가왔다.

뭔가 늘 한 가지에 미칠 것을 발견해야 사는 맛이 나는데, '영화' 약발이 떨어져가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으나 찾지 못하였는데, 스쿼시 벽을 보자 '심봤다'는 기분이었다. 당장 테니스채를 사러가자 하니 남편과 아이들은 '배드민턴이나 재대로 치고 그 다음에 스쿼시를 하든지'하였다.

3:1이라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 하며 한발 물러섰으나 내 마음을 이미 스쿼시가 점령하고 있었다. 스쿼시가 점령하고 있었기에 우겨서 스쿼시가 더 폼 난다 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어 그냥 배드민턴에 한 표 더 주는 척했다.

아무튼, 농구를 하고 '스쿼시'라는 올해의 '산삼'을 발견하고 집에 와서 조금 쉰 후 치즈오븐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둘째가 다 못 먹겠다고 해서 얼씨구나 반절을 대신 먹어주고, 가누기 힘든 몸으로 밖으로 나오니, 열 번째 맞는 결혼기념일의 하루가 서쪽 하늘을 물들이며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부록: 결혼생활의 지혜

1. 부부는 항상 함께 해야 된다는 생각을 버리자. 따로 놀고 싶을 땐 따로 놀면서, 서로를 '응원'이 안 되면 '묵인'해 주자.

2. 따로 놀다보면 같이 놀 일도 생기고, 따로 놀면서 발견한 재미들은 어느 순간부터 함께 즐기게 된다.

3.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말은 같이 놓든가, 같이 높이든가, 좌우지간 높이를 '통일'하자.

4. 상대에게 자기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요하지 말자. 도리? 도리 다 하려다 중간에 나가  떨어진다. 항시 명심하기를 우리가 잘 살아주는 것이 효도의 처음이라 생각하고 부모님에게는 필요이상의 기대를 주지말자. 자식만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되는 게 아니라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정신적으로)독립해야 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kleinsusun 2008-04-2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설님, 결혼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어머님의 "한 순간"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짜~안합니다.
앞으로 결혼 20주년, 30주년....금혼식....
세월이 갈수록 더더욱 많이 감사하고 행복하세요!^^

폭설 2008-04-27 18: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 대박나세요~~~~

hnine 2008-04-25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 10주년이라서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축하드리고, 마지막 부록, 전부 공감입니다 ^^

폭설 2008-04-27 18:19   좋아요 0 | URL
님의 결혼 10주년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10년 또한 행복하게
사시길~~~
 

아줌마와 아가씨의 차이는 흔히들 말하는 지하철 빈자리 먼저 차지하기에서도 구분 되지만 커피 한 잔에서도 패가 갈린다. 물론 요즘 아줌마들은 옛날 아줌마들과 달리 애만 옆에 붙이고 있지 않으면 과년한 비혼인지 아줌마인지 분간이 안 가기도 하나, 나는 여러모로 아줌마다. 
 
그러나 마음은 내가 아줌마라는 것을 잊고 사는데 얼마 전 간만에 내가 '아짐'임을 절실히 느꼈다. 오랜만에 젊은 조카들과 조조영화를 보고 난 후, 배가 고파 근처 분식집에서 요기를 하였다. 좀 더 걸어서 밥도 먹고 후식도 주는데 갔으면 그럴 일이 없었을 텐데 나 말고 두 젊은 처자들이 배고프다고 난리여서 가까운 데로 간 것이 사단이었다.

마침 우리가 간 분식집에서는 주말이라 그런지 그날따라 손님이 많아 밥을 먹고는 곧장 일어나야 했다. 하여, 그곳을 나와서 푹신한 의자를 떠올리며 인근의 한 커피 점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커피숍에 와본지 그 얼마만이냐. 분위기 좋고, 음악 좋고, 커피 맛 좋을 것이고….'

"뭐 마시지?"

"음, 나는 카페라테."

"나도 카페라테."

 

"그냥 커피가 아니고?"

"요샌 그냥 커피 안 마신다."

"왜?"

"카페라테가 맛있거든. 함 먹어봐."

"달면 싫은데…."

"싫을 정도로 달지는 않아."

"그래, 그러면 나도 같은 걸로."

그리하여 슈퍼에서 파는 것이 아닌, '수제' 카페라테를 처음으로 먹어보게 되는 찰나였다. 그런데 가격표를 보고 놀랐다. 

"뭣이라? 한잔에 3500원?"

"참내, 누가 아줌마 아니랄까봐. 요새 커피 값 다 이렇게 해. 4000원 하는데도 있어."

"하긴, 커피 값이랑 자장면 값이랑 예전부터 같았지만 오랜만에 보니 놀라워서 진정이 안 되네."

앞으로는 반드시 밥도 주고 후식도 주는 그런 데서 먹기로 합의(?)를 하고 비싼 카페라테를 먹었다. 그런데 고것이 비싼 값을 하는지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혀끝에 그 달콤함이 맴돌았다. 내가 함 만들어봐? 

마침 냉장고에 우유가 잔뜩 밀려있기에 내친김에 실험정신을 발휘해 보기로 하였다. 우유 한 팩을 냄비에 붓고 끓이면서 설탕과 커피는 간(맛)을 봐가며 조금씩 더 넣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우유200ml +커피와 설탕 각각 두 찻숟가락을 넣고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까지 거품기로 저어준다. 이때 거품기를 빠르게 많이 저을수록 찻잔에 담아도 거품이 쉬이 꺼지지 않는다'이다.

 







  
우유 한 팩에 커피와 설탕을 각각 두 숟가락 씩 넣는다.
 
카페라테







  
천천히 젓다가 우유 가장 자리에 보글보글 기포가 생기면 빨리 휘젓는다.
 
커피







  
넘치기 직전에 불을 끈다.^^
 
커피







  
완성된 카페라테
 
커피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요즘은 카페라테 만들어 먹느라 우유가 남아 돌 새가 없다. 이전엔 우유가 밀리면 떠먹는 요구르트를 만들곤 했는데 요새는 카페라테 때문에 떠먹는 요구르트 제조기는 당분간 푹 쉬어야 될 것 같다.(웃음)

우유가 자꾸 밀리는데 달리 소비 방법이 없다면 카페라테에 한번 도전해 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몇 년 전 아주 화초에 미쳤던 적이 있었다. 꽃집이란 꽃집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항상 구경을 했고 이름 모를 화초를 발견하면 집에 와서 책을 뒤졌다. 책에도 없으면 사진을 찍어 꽃에 관한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에 문의하기까지 하였다.

지금은? 내게 언제 그런 시절도 있었나 싶게 화초에 덤덤하다. 화초 이름도 반절은 까먹어 버렸다. 그런가 하면 지난 겨울엔 베란다에서 벌벌 떨고 있는 화초들에게 아무런 ‘방한복’도 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통고하였다.

“너희들, 이번 겨울에 알아서 살아남으면 내년 봄에도 거둬주고 스스로 못 살아남으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여. 알겄냐?”

화초고 사람이고 강하게 키워야 살아남는지, 한 해 더 전에는 보온을 해줘도 죽더니만 지난 겨울에는 아무런 조치를 해주지 않아도 다들 살아주어서 보호자로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화초에 대한 이즈음의 내 마음은 그냥 10년 묵은 친구처럼 새로울 것은 없고 그저 덤덤하였다. 없으면 안 되나 떨림 증상은 전혀 없었다. 그랬는데, 아이들 방에 놓을 화초가 없어 간만에 꽃집엘 들렀다가 다시금 내 마음에 불을 댕기는 풀을 발견하고 말았으니. 

 


  
▲ 스파티 필름 잎이 얼마나 넓은지 우아하기 이를데 없어...^^
 
스파티 필름

아, 바람(?)이 이렇게 해서 나는 것일까? ‘더 이상의 떨림은 없어’ 마음이 확고했는데, 눈앞에서 너울거리는 넓고 푸른 잎을 가진, 같은 화초 수십 개를 동시에 바라보자니 '쌔앵~' 잠자던 바람기가 확 도졌다.

자세히 보니 신품종 ‘스파티 필름’이었다. 기존에 봐 왔던 스파티 필름은 잎이 좁았고 좀  넓은 것이 있기는 했으나 이처럼 넓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이 봄 꽃집의 여왕이라면 단연 이 스파티 필름이 아닐까 싶은데, 내 눈에만 그런가?

 


  
▲ 스파티 필름 가격은 7천원이었다.^^
 
스파티필름

하여간 이 스파티 필름 덕분에 스파티 필름 뿐 만 아니라 다른 화초들까지 다시금 좋아졌다. 해서 수시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주고받는다. ‘어여, 내 마음이 느껴지니?’ 하면서.(웃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홍세화. 한 때의 이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고 모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홍세화. 누군가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하고 친숙한 이름이지만 짐작컨대 이 이름을 두고 아직도 '듣느니 처음이오'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가방끈 짧은 오십대 우리 언니 세대의 아짐들이 홍세화란 이름을 생소해 한다면 이해하겠다. 가방끈도 남들만큼은 되고 먹고 사는 일도 나름 풍족하기에 도통 세상사 관심 없고 나 한 몸 때 빼고 광내고 살면 그만이라는 젊은 세대라면 홍세화를 몰라도 또, 이해하겠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적어도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면 '홍세화' 이름 석 자 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을까. 그것도 초자 선생님도 아니고 '일급 정교사' 연수 자격을 가진 선생님들이라면 말이다. 다음은 초등교사인 한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이십대 후반인 지인은 지난해 교직경력 만 4년을 넘어, 겨울 방학을 맞아 '일급 정교사'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 일정표의 맨 마지막에는 ‘교원단체’에 대해 배우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은 교원단체에서 직접 나와 자기들 교원단체의 현황과 하는 일 등을 교사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는데 알다시피 우리나라에는 ‘전교조’와 ‘한국교총’이라는 굵직한 두 개의 교원단체가 있다.

 

아무튼, 이 두 교원 단체 중 한국교총에서는 교총의 상근 선생님이 일일 강사로 나와서 교총에서 하는 일 등을 홍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전교조에서는 상근선생님 대신 외부 인사를 초빙해서 강사로 내 보냈는데, 그 초빙강사가 다름 아닌 홍세화씨였다고 한다.

 

평소 홍세화씨를 좋아하고 그의 책도 사보곤 하던 지인은 ‘살다보니 이런 행운이!’ 하며  홍세화씨의 강연을 기대했다고 한다. 지인은 내심 홍세화씨가 연단에 오르면 ‘와아!’ 함성이 터지지 않을까, 여차하면 자신도 휘파람을 불고 손바닥이 불이 나게 박수를 쳐야지 하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지인의 상상은 단지 상상 이었을 뿐, 막상 홍세화씨가 연단에 올랐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아무도 ‘오늘의 강사’ 이상으로 홍세화씨를 보는 선생님들이 없었다고 한다.

 

지인은 괜히 미안해서 열심히 듣고 받아 적으며 귀 기울였는데 뭔가 분위기가 너무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에, 모두들 다음날 있을 일급 연수 최종 시험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고.

 

건성으로 홍세화씨의 강연을 듣는 척 하면서 무릎위에는 죄다 내일 칠 시험의 최종 정리 본을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물론 안 그런 사람도 많았겠지만 지인의 주변은 모두).

 

강연하는 사람은 청중과 소통이 됨을 느껴야 강연을 해도 신바람이 나고 하고자 하는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아닌 우리 아이들의 장래를 책임지는 선생님들이 ‘니는 지껄여라’ 우리는 내일 보는 시험이 더 중요하다는 뜻을 온몸으로 보여줬으니 홍세화씨는 그 강연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인은 동료교사들을 대신해 일당백으로 열심히 듣고, 적고, 강연이 끝났을 때는 강연 잘 들었다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사인도 받고 팔짱끼고 사진도 찍는 등 갖은 호들갑을 떨며 나름의 사과의 몸짓을 날렸다고 하였다. 지인처럼 호들갑은 떨지 않았지만 사인을 받으려 몰려든 교사는 여남은 명 정도 되었다고 하였다.

 

그날, 홍세화씨의 강연을 들은 교사는 족히 3~4백 명은 되었다는데 친필 사인을 받고자 연단 앞으로 모여든 교사는 겨우 여남은 명 뿐이었던 것이다. 맥이 빠졌던 홍세화씨는 그나마 수백명중 여남은 명이라도 자신이 말한 교육에 관한 여러 문제의식들을 공감해주니 다행이라 생각했을까.

 

그런데 그 강연의 절정을 장식한 사람들이 또 있었으니, 다름 아닌 지인 친구 교사들의 반응이었다.

 

“니 저사람 아나? 왜 그리 친한 척 하는데?”

“저 분, 홍세화씨고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와 <빨간 신호등>의 저자인데 들어본 적 없나?”

“모르겠는데.... 그런 책도 있었나?”

“그래... 아무튼, 유명한 사람이야. 후후.”

 

결론은, 홍세화씨의 강연시간에도 굳세게 공부했던 지인의 친구들은 다음날 일급 정교사 자격시험에서 만점이거나 한 개 틀리는 선에서, 무사히, 우수한 성적으로 일급정교사 연수를 마쳤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아직 우리말 바로쓰기에 대한 그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자주 추천이 되는 고 이오덕 선생의 책도 아직 읽지 않았다. 왜냐면 알면서 실천 안 하기는 뭣해서 버텨보는 중이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을까봐 무서워서 못 보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지역의 언어(지방언어, 토박이말, 혹은 폄하해 사투리)를 좋아한다. 내 지역 언어뿐만 아니라 타지역 말도 매력 있어 한다. 표준어는 뭔가 재미가 모자란다. 경우에 따라서는 토박이말을 화끈하게(?) 써 줘야 쓰는 맛도 있고, 듣는 맛도 있고, 읽고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조정래 선생이 그의 역작들을,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서울말로 썼다고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밥맛이다. 그렇다고 표준어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표준어는 표준어 나름대로 존재의의가 있다. 각 지역 말을 이쪽저쪽으로 통역해주는 공통분모 말로써 말이다.

 

특정 전라도 말을 강원도 말로 통역해주면 강원도 사람만이 알아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표준어로 통역해주면 모든 지역사람들이 다 알아먹는다. 하여간 표준어고 지역 말이고 다 있어야 되고 표준어, 지역어는 둘 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만든 '한글(훈민정음)'이 변화 발전하여 오늘에 이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5백 년 동안 지배층들이 한문을 숭상하며 지속적으로 한글을 배척했는데도 오늘날까지 가열차게 살아남은 한글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감동스럽다. 내가 이 한글에 대한 느꺼움을 가슴깊이 새기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어를 배우면서이다.

 

십여 년 전, 일본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문득 '내가 한국인임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라는, 나도 모르게 내 주제를 그리고 주체를 파악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러한 가운데 떠오른 것이 다음이다.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 신라면, 그리고 한글.

 

한글 빼고는 죄다 먹는 것이라 오로지 먹기 위해 사는 인간 같아 뭐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위 여섯 가지는 이미 내 몸속에 ‘인’이 박혀 씻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내가 아무리 이탈리아 국수와 빈대떡을 좋아해도 이탈리아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부모를 바꿀 수 없듯이 내가 한국인임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서류상으로 바꿀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한국인이란 게 싫었냐고요? 천만에. 예전엔 내가 한국 사람임에도 별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말을 배워보니 나는 정말 한국인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서방세계 사람들은 당연한 듯 우리가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쓰는 줄 안다는데 그게 아님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우리말이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아일랜드처럼 독립은 했는데 말을 다 잃어버렸다면 그 원통함을 어찌했을 것인가. 헌법상에만 아일랜드어가 명시되어 있고, 실지로는 모두가 영어를 쓰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싶다. 그런 만큼 우리말을 지켜온 선조들이 고맙다.

 

너무도 오염된 한국어

 

그런데 요즘 활자로 된 글이 건 방송에서의 말이건 우리말이 분명히 있는데도 외국어를 마구 끌어다 쓰는 것을 볼 때면 아찔하다.  외래어야 할 수 없다 쳐도 신종 외국어를 마구 남발하는 것은 뭔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그러한 말들은 누가 퍼트리는가 생각해보니 범인은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먹물'들이 외국어를 많이 끌어다 쓰는 것 같다. 프랑스 갔다 온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독일어권에서 배운 사람들은 독일어를, 미국 갔다 온 사람들은 미국말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요새는 우리말이 버젓이 있는데도 예사롭게 남의 나라말을 걸림 없이 쓰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포도주: 요샌 활자화 된 글을 읽을 때면 '포도주'라는 말을 눈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죄다 '와인'이라 한다. 포도주 대신 와인이라 하면 맛이 더 '땡기'시는가. 나는 다른 신문도 아닌 <한겨레>에서 '와인'이라는 말을 수시로 발견할 때면 소름이 끼친다.

 

상표·상품(명): 요샌 이 말도 안 보인다. 역시 신문이고 방송이고 모두들 '브랜드'라고 한다. 새 브랜드를 출시했네 어쩌내 하면서.

 

깨끗한 선거: 내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인데 시민 단체들은 그동안 '매니페스토 운동'을 펼쳤다. 나 참, 이말 처음 나왔을 땐 뭔 말인가 싶어서 인터넷에 뜻을 물었다. 그냥 '구체적인 예산과 추진 일정을 갖춘 선거 공약'이라고 하면 5천만이 알아먹을 것인데, 40대인 나도 모르는 것을 나보다 나이 많은 윗세대들은 어찌 알 것인가.

 

어린이: 요샌 이 말도 간당간당하다. 학교 앞은 스쿨존이요, 어린이옷은 키즈 룩이다. 우리 동네 어린이집 이름에는 '노블 키즈'가 있고 놀이터로는 '키즈 정글'이 있고 학원으로는 '키즈 영어'학원이 있다.

 

고상한 분들이 주로 쓰는 말들도 한번 볼까. '노마드', '멘토', '트라우마'.

 

멘토와 트라우마는 몇 년 전부터 부쩍 쓰더니 요샌 '조언자'라고 하면 조언이 안 되고 '트라우마’라고 하지 않으면 깊은 '내적 상처'가 표현이 안되시는가.  그리고 '노마드'라 하지 말고 '유목민'이라 해도 충분히 자유가 느껴지는데 왜 이런 한글 잡아먹는 '신종마약'들을 퍼트리는지. 

 

이런 마약들은 너무 많다. '문화와 아비투스(습관)', '디아스포라(이산자, 떠돌이)의 눈', '볼런티어(자원봉사) 활동', '웜비즈(따뜻한옷)', '쿨비즈(시원한옷)'등등 신문 한 장 펴들고 이 잡듯이 형광색으로 물들이자면 수도 없이 나온다. 우리말이 없어서 그냥 쓰는 말이라면 할 수 없지만 읽어보면 우리말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애써 '새파란' 영어를 끌어 쓰고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보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똘레랑스'는 홍세화씨가 책임(?)지세요.)

 

만고의 진리, 우리말을 살려 써야 외국어도 잘한다

 

나는 우리말만 잘났고 외국어는 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말이 아름다운 만큼 비교할 수 없이 다른 나라 말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어 히라가나의 흘러내림을 보라. 그냥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이 물결치는 것 같다. 한자를 보라. 어떻게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어도 저렇게 예쁘게 만들었을까. 뜻을 모아 또 다른 말을 파생시키는데도 어찌 저리 철학적으로 만들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영어도 마찬가지. 영화 속 멋진 배우가 혀를 도르르 말아가며 의미 있는 대사를 읊조리면 정말이지 '영어의 바다에 빠지고 싶다.' 이들 말 뿐 아니라 내가 모르는 무수한 다른 나라말들도 아마 한글이 가진 역사성만큼이나 오랜 풍화작용 끝에 살아남았을 것이기에 존중하고 싶다.

 

백기완 선생은 그토록 보편적으로 쓰이던 '서클'이라는 말을 '동아리'로 산뜻하게 바꿔 놓았다. 때문에 요샌 대학에 동아리는 있어도 서클은 없다. 서클이라는 말의 존재를 모르는 새내기들도 많을 것이다. 선생이 퍼트린 '동아리'와 '새내기'처럼 지식분자들이 생각 없이 외국어를 끌어들이지 말고 작심하고 우리말을 살려 쓴다면 제2, 제3의 동아리, 새내기는 무수히 새끼 칠 수 있을 것이다.   

 

또, 작가 장정일씨는 어느 글에서 <한겨레>에 독자투고를 하면 자신이 쓴 말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감쪽같이' 바른 우리말 문장으로 바꿔줌에 찬사를 보내었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수년전 독자투고 글이 좀 길어 조금 줄이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내가 쓴 군더더기 말들을 솎아 내고 정말 감쪽같이 깨끗한 문장으로 만들어 주었다.

 

해서 <한겨레> 기자가 달리 <한겨레> 기자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자 다 어디로 갔는지. 외래어는 그렇다 쳐도, 외국어들이 너무 난무한다. 아주 외국어들을 외래어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나마 우리말을 살려 쓴다 맹세한 신문까지 이러니 다른 신문들은 오죽하랴.

 

물론 나도 반성한다. '브로크백 쓰나미'란 말을 쓴 적이 있고 '금요일 밤, 세 감독의 아우라' 어쩌고도 했고 그리고 '어감'이라는 말 대신 '뉘앙스'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제부터는 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한두 번 썩어 쓸지언정 글로는 위의 말들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이미 쓰여 지는 외래어라면 몰라도 새로 끼어드는 외국어는 사양하겠다.

 

하여간, 대운하 없기를 바라는 만큼, 우리말이 오염되는 것 또한 반대한다. 대운하가 우리에게 줄 피해만 큰 게 아니라, 외국어(특히 영어)가 우리 말(영혼)에 주는 피해도 심각하다. 제발, 너도나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우리말 살려 썼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