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우리말 바로쓰기에 대한 그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자주 추천이 되는 고 이오덕 선생의 책도 아직 읽지 않았다. 왜냐면 알면서 실천 안 하기는 뭣해서 버텨보는 중이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을까봐 무서워서 못 보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지역의 언어(지방언어, 토박이말, 혹은 폄하해 사투리)를 좋아한다. 내 지역 언어뿐만 아니라 타지역 말도 매력 있어 한다. 표준어는 뭔가 재미가 모자란다. 경우에 따라서는 토박이말을 화끈하게(?) 써 줘야 쓰는 맛도 있고, 듣는 맛도 있고, 읽고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조정래 선생이 그의 역작들을,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서울말로 썼다고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밥맛이다. 그렇다고 표준어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표준어는 표준어 나름대로 존재의의가 있다. 각 지역 말을 이쪽저쪽으로 통역해주는 공통분모 말로써 말이다.

 

특정 전라도 말을 강원도 말로 통역해주면 강원도 사람만이 알아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표준어로 통역해주면 모든 지역사람들이 다 알아먹는다. 하여간 표준어고 지역 말이고 다 있어야 되고 표준어, 지역어는 둘 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만든 '한글(훈민정음)'이 변화 발전하여 오늘에 이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5백 년 동안 지배층들이 한문을 숭상하며 지속적으로 한글을 배척했는데도 오늘날까지 가열차게 살아남은 한글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감동스럽다. 내가 이 한글에 대한 느꺼움을 가슴깊이 새기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어를 배우면서이다.

 

십여 년 전, 일본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문득 '내가 한국인임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라는, 나도 모르게 내 주제를 그리고 주체를 파악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러한 가운데 떠오른 것이 다음이다.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 신라면, 그리고 한글.

 

한글 빼고는 죄다 먹는 것이라 오로지 먹기 위해 사는 인간 같아 뭐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위 여섯 가지는 이미 내 몸속에 ‘인’이 박혀 씻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내가 아무리 이탈리아 국수와 빈대떡을 좋아해도 이탈리아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부모를 바꿀 수 없듯이 내가 한국인임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서류상으로 바꿀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한국인이란 게 싫었냐고요? 천만에. 예전엔 내가 한국 사람임에도 별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말을 배워보니 나는 정말 한국인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서방세계 사람들은 당연한 듯 우리가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쓰는 줄 안다는데 그게 아님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우리말이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아일랜드처럼 독립은 했는데 말을 다 잃어버렸다면 그 원통함을 어찌했을 것인가. 헌법상에만 아일랜드어가 명시되어 있고, 실지로는 모두가 영어를 쓰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싶다. 그런 만큼 우리말을 지켜온 선조들이 고맙다.

 

너무도 오염된 한국어

 

그런데 요즘 활자로 된 글이 건 방송에서의 말이건 우리말이 분명히 있는데도 외국어를 마구 끌어다 쓰는 것을 볼 때면 아찔하다.  외래어야 할 수 없다 쳐도 신종 외국어를 마구 남발하는 것은 뭔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그러한 말들은 누가 퍼트리는가 생각해보니 범인은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먹물'들이 외국어를 많이 끌어다 쓰는 것 같다. 프랑스 갔다 온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독일어권에서 배운 사람들은 독일어를, 미국 갔다 온 사람들은 미국말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요새는 우리말이 버젓이 있는데도 예사롭게 남의 나라말을 걸림 없이 쓰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포도주: 요샌 활자화 된 글을 읽을 때면 '포도주'라는 말을 눈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죄다 '와인'이라 한다. 포도주 대신 와인이라 하면 맛이 더 '땡기'시는가. 나는 다른 신문도 아닌 <한겨레>에서 '와인'이라는 말을 수시로 발견할 때면 소름이 끼친다.

 

상표·상품(명): 요샌 이 말도 안 보인다. 역시 신문이고 방송이고 모두들 '브랜드'라고 한다. 새 브랜드를 출시했네 어쩌내 하면서.

 

깨끗한 선거: 내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인데 시민 단체들은 그동안 '매니페스토 운동'을 펼쳤다. 나 참, 이말 처음 나왔을 땐 뭔 말인가 싶어서 인터넷에 뜻을 물었다. 그냥 '구체적인 예산과 추진 일정을 갖춘 선거 공약'이라고 하면 5천만이 알아먹을 것인데, 40대인 나도 모르는 것을 나보다 나이 많은 윗세대들은 어찌 알 것인가.

 

어린이: 요샌 이 말도 간당간당하다. 학교 앞은 스쿨존이요, 어린이옷은 키즈 룩이다. 우리 동네 어린이집 이름에는 '노블 키즈'가 있고 놀이터로는 '키즈 정글'이 있고 학원으로는 '키즈 영어'학원이 있다.

 

고상한 분들이 주로 쓰는 말들도 한번 볼까. '노마드', '멘토', '트라우마'.

 

멘토와 트라우마는 몇 년 전부터 부쩍 쓰더니 요샌 '조언자'라고 하면 조언이 안 되고 '트라우마’라고 하지 않으면 깊은 '내적 상처'가 표현이 안되시는가.  그리고 '노마드'라 하지 말고 '유목민'이라 해도 충분히 자유가 느껴지는데 왜 이런 한글 잡아먹는 '신종마약'들을 퍼트리는지. 

 

이런 마약들은 너무 많다. '문화와 아비투스(습관)', '디아스포라(이산자, 떠돌이)의 눈', '볼런티어(자원봉사) 활동', '웜비즈(따뜻한옷)', '쿨비즈(시원한옷)'등등 신문 한 장 펴들고 이 잡듯이 형광색으로 물들이자면 수도 없이 나온다. 우리말이 없어서 그냥 쓰는 말이라면 할 수 없지만 읽어보면 우리말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애써 '새파란' 영어를 끌어 쓰고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보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똘레랑스'는 홍세화씨가 책임(?)지세요.)

 

만고의 진리, 우리말을 살려 써야 외국어도 잘한다

 

나는 우리말만 잘났고 외국어는 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말이 아름다운 만큼 비교할 수 없이 다른 나라 말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어 히라가나의 흘러내림을 보라. 그냥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이 물결치는 것 같다. 한자를 보라. 어떻게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어도 저렇게 예쁘게 만들었을까. 뜻을 모아 또 다른 말을 파생시키는데도 어찌 저리 철학적으로 만들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영어도 마찬가지. 영화 속 멋진 배우가 혀를 도르르 말아가며 의미 있는 대사를 읊조리면 정말이지 '영어의 바다에 빠지고 싶다.' 이들 말 뿐 아니라 내가 모르는 무수한 다른 나라말들도 아마 한글이 가진 역사성만큼이나 오랜 풍화작용 끝에 살아남았을 것이기에 존중하고 싶다.

 

백기완 선생은 그토록 보편적으로 쓰이던 '서클'이라는 말을 '동아리'로 산뜻하게 바꿔 놓았다. 때문에 요샌 대학에 동아리는 있어도 서클은 없다. 서클이라는 말의 존재를 모르는 새내기들도 많을 것이다. 선생이 퍼트린 '동아리'와 '새내기'처럼 지식분자들이 생각 없이 외국어를 끌어들이지 말고 작심하고 우리말을 살려 쓴다면 제2, 제3의 동아리, 새내기는 무수히 새끼 칠 수 있을 것이다.   

 

또, 작가 장정일씨는 어느 글에서 <한겨레>에 독자투고를 하면 자신이 쓴 말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감쪽같이' 바른 우리말 문장으로 바꿔줌에 찬사를 보내었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수년전 독자투고 글이 좀 길어 조금 줄이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내가 쓴 군더더기 말들을 솎아 내고 정말 감쪽같이 깨끗한 문장으로 만들어 주었다.

 

해서 <한겨레> 기자가 달리 <한겨레> 기자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자 다 어디로 갔는지. 외래어는 그렇다 쳐도, 외국어들이 너무 난무한다. 아주 외국어들을 외래어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나마 우리말을 살려 쓴다 맹세한 신문까지 이러니 다른 신문들은 오죽하랴.

 

물론 나도 반성한다. '브로크백 쓰나미'란 말을 쓴 적이 있고 '금요일 밤, 세 감독의 아우라' 어쩌고도 했고 그리고 '어감'이라는 말 대신 '뉘앙스'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제부터는 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한두 번 썩어 쓸지언정 글로는 위의 말들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이미 쓰여 지는 외래어라면 몰라도 새로 끼어드는 외국어는 사양하겠다.

 

하여간, 대운하 없기를 바라는 만큼, 우리말이 오염되는 것 또한 반대한다. 대운하가 우리에게 줄 피해만 큰 게 아니라, 외국어(특히 영어)가 우리 말(영혼)에 주는 피해도 심각하다. 제발, 너도나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우리말 살려 썼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