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이제 이해도 마지막이네... 참으로 사연많은 한해였다.
나라밖은 밖대로 안은 안대로....

개인적으로 올 한해는 '살다 살다 주식에 흥미를 느낀'  뜻밖의 해였다.
시작은 삼양라면 주식을 사면 찌라시 박멸에 도움이 될수 있다고 해서,
게으르고 소심한 내가 할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동참했는데,
동참하고 보니 뜻밖에도 그 세상이 너무 흥미로웠다.

해서 호기심 충족차원에서 한국경제티비를 시청하게 되었다.
이전엔 뭐 저런 채널도 다 있나하며 단 몇초도 머물기 힘들었던 곳을 매일 한두차례씩 들렀다.
예전엔 '대박타임' 어쩌고 하는 프로 제목을 보고는 '제목 한번 상스럽기는...'
'대박은 커녕 쪽박이나 차지마라'하면서
지나쳤는데 세상에 내가 한때나마 그프로 애청자가 될줄이야.

뿐인가, 서점엘 가면 예전에 역시 경멸하며 지나치던 주식으로 몇억벌었어요, 하는 류의
책들을 막 펼쳐보고는 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거기까지.
나의 주식공부는 구구단 졸업하고 사칙연산 수준에서
흥미를 잃고 만 단계라고나 할까. ㅎㅎ

여고시절, 쌍곡선 배울때 열심히 했으면  좀더 그래프들이 흥미로울 수 있었을까.
수학적으로 무딘 나,
엘리엇 파동이니, 볼린저 벤드니 , 양초모양이 거꾸로니 옳게니...
그리고 별 매력적이지 못한 각종 용어들....아 머리아퍼...ㅋㅋ

때문에 주식세상은 그냥 영화보듯이 구경만 하기로 하였다.
몇해전, 영화에 빠졌을때, 영화를 자주보다 보니 자동으로 나름 체계적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었던바.

감독별로, 배우별로, 혹은 연대별로, 장르별로....또는 나라별로.... 그렇게 영화를 보면
뭔가 정리가 되고 영화에 대한 시야가 일목요연 트이는 느낌이어서 좋았는데,

그 경험을 주식을 구경하면서도 써먹었다.
현대가의 주식들은 가격이 이렇고 엘지가의 주식들은 저렇구나.
부품을 만드는 회사의 주가들은 이렇고,
식품을 만드는 회사의 주가들은 저렇구나.
....
세상만 넓은게 아니라 주식시장도 넓구나.

그리고, 예전엔 '개미들 곡소리 난다.'는 표현의 의미에 그렇게 무수한 사연이
있는 줄 몰랐는데 경제티비의 주식상담 코너를 보니 사연들은 다들 왜그렇게 절절한지...

노후자금을 몽땅 넣었다가 반을 까먹었네.
자식이 벌어다 준 돈 관리하던 엄마, 은행이자보다 더 번다해서 역시 몽땅 투자했는데
손해를 봐, 잠을 못자는데.. 자식은, 남편은 이 사실을 모르네....알면 난리나네...ㅠㅠ.
.
.
.
결론은,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하듯, 주식으로 흥한자 주식으로 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칼든 자, 칼로 다 망하고 주식든 자 주식으로 다 망하면 무슨 재미로 살아가나...
칼을 들어도 의사처럼 들면 사람을 살리듯이
주식을 든자도 투자할 회사의 장래성을 면밀히 따진다거나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줄 안다면 삶의 활력소가 될것이니.

그러나, 산 높은것만 알았지 골 깊은것 미쳐 생각 못하기 쉬운것이 인간임에랴.

하여간 흥미로운 세계였다.

처음엔 아주 살짝,'나도 한탕?'하는 생각을 한적도 있었으나,
사는 연습 몇번 , 파는 연습 몇번 해보니 이것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해서 원래의 목적대로 라면주만 계속 갖고 있기로 했다.
내주제에 주식이 웬말이냐?

그저 주식의 세계가 얼마나 '비정'한지 구경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뿐이다.

....
하여간, 2008년 한해가 저문다.
내년엔 또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비관적 전망들을 보면 무섭다.

그러나, 매일 매일 떠오르는 저 태양처럼 무수한 절망속에 희망또한 하나쯤은 떠오르리라.

모두들,
가는 해 마무리 잘 하시고,오는 해 좋은 일 많이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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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8-12-2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리없이 내리는 눈처럼 님의 서재를 들렀다 갔답니다.
처음 인사드리네요.
눈에 파묻혀 오도가도 못하고 갇혀버리는 세상,
저도 꿈꾼답니다.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지으시고 받으시길..._()_

폭설 2008-12-29 16: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9년이 어떻게 전개 될지 참 걱정이네요.
 

며칠전 '한겨레 21'제734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경제위기가 오면 서민들이 문제지 부자들이 무슨 문제 인가가 평소의 생각이었던바...그도 그럴것이 10년전 그때, 서민들은 공포에 휩싸이는데 부자들은 '이대로 영원히'를외쳤다기에 이번에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나는 그들은 모두 전 모 우원처럼 발빠른 정보로

치고 빠지기 잘하는줄 알았다. 아, 그런데... 부자들은 욕심의 정도도 서민과는

급이 달랐다. 삼십후반 어느 분은80억 빌딩을 담보로 20억 대출을 받아 펀드에 투자 해서 막대한 손해를 내고 있다고..

그런가 하면 어느 중산층은 30평대 4억5천아파트에 살다가  보다 좋은 지역의 역시 같은 평대의

아파트 8억5천 짜리를 친척돈과 은행대출로 사려고 계약했다. 그와중 대출 받은 돈2억 5천으로

모두 주식투자를 했다는데 주식값이 알다시피 반토막 났다. 그러니 이분은 어떻게 해야?

순식간에 원금 다 까먹고 카드로 돌려막고 잔금도 못치르고...

나는 이런 분들이 극소수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위와 같은 식으로 집을 늘리기도 하고

대출을 받아 아무 거리낌없이 주식투자를 하기도 하나 보았다.

그러니...... 아래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거품이 꺼지고 그 후유증의 한가운데서 허우적 거리던 시절이었을 1996년의 일본.

당시 나는 커피숍에서 알바를 했는데 주변의 상가들이 대부분 저녁 6시부터 영업을

시작하기에 선진국은 어렵다하면서도 10시간씩 장사하지는 않는구나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장사가 안되도 문 열어 놓고 한사람이라도 더 받을려고 노력하는데...이들은 그렇지 않구나 쩝...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다저녁에 문 여는 이유를 요즘 알게 되었다.

즉, 요즘 우리동네 가게 들이 어느순간부터 저녁장사만 하는 집들이 는 것이다. 낮에 문 열어봐야

오는 사람도 없고 사람만 축나고 인건비도 못 건지니 그런 것이었다. 물론 칼국수 집이야

낮에도 열지만 삼겹살집들은 대부분....

우리나라가 일본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되가는 꼴을 보면 안 따라간다는 보장도

못할터... 난, 이참에 사람들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좀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배부른 돼지 좀 고만하고 물질보다 정신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그러면 이런 부동산 투기도 필요없고 임대 아파트에서도 아무런 불편없이 살것이다.

실지로 임대 30평이나, 강남 30평이나 별 차이없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나무 식탁에서

밥먹고 강남은 대리석 식탁에서 밥먹을 뿐이다. 나는 방바닥에 요 깔고 자고 강남은

5백만원, 천만원(너무 적게 불렀나?)침대에서 잘 뿐이다. 부수적인 차이들 뿐이다.

우린 너무 비 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다가 이꼴이 된것 같다.

김구 선생님 말씀. 문화강국. 이것이 이 난국에도 꼭 필요한 화두 같다.

그럼 즐감하시길~~~글이 길다. 그러나 꼭 읽어볼 만한 글이다. 아래글을 쓰신

아고라의 sde님께 존경과 감사를~~~

 


  • 경제토론 일본 버블경제의 역사 : 무섭게 똑같은 당시 일본과 현재 한국 [805]


전번에 악속했던 일본의 버블 경제에 관한 글 입니다.

주요 자료들은 1982녀 부터 2002년 까지의 데이터들을 사용하였으며 자료 찾기가 어려운 부분은 구굴링으로 그래프 긁어 왔습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재 경제위기를 맞아 이명박 정부의 정책과 버블 경제 붕괴 당시 이를 막으려고 했던 일본의 정책이 무섭도록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본 버블 붕괴시기, 일본도 한국과 똑같은 외환위기를 맞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외환위기를 맞지 않았고, 한국은 겪었습니다. 그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 드립니다.

 

1. 버블의 발생 직전

1980년대 초 일본은 제 2 차 석유위기라고 불리던 스테그플레이션 상황에서 경제는 고전을 계속했습니다. 더 이상, 지난 60년대의 고도성장을 생각할 수 없게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재 할인율를 1981년에 무려 14%나 올립니다. 레이건 시대의 고금리 정책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달러가 고평가 되면서 미국은 1982년 2/4분기 부터 마침내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전까지 10%가 넘는 인플레이션)

 

그 댓가는 혹독해서 1983년 미국의 실업율은 10.8%까지 치솟고 산업은 공동화 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 시기, 일본의 대미 수출액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연평균 18.2%의 수출 증가세와 미국 전체 수입의 22.2%를 차지할 정도로 일본의 대미 수출이 증가하면서 일본은 2차 오일쇼크로 부터 발생한 불황에서 탈출 호황기에 들어 갑니다.

 

이렇게 되자 일본 기업들은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을 벌게 되고 당시 일본 은행들은 이러한 일본 기업의 잉여자금을 유치하여 더욱 돈을 벌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1984년 부터 국제금융계는 일본 은행들에게 국제 규범에 맞게 BIS 비율 8%를 맞출 것을 요구했는데 일본은 이를 최대한 늦추면서 1993년까지 BIS 비율을 8%에 맞추기로 합의 합니다. 당시 국제 금융계가 8%를 요구한 이유는 1980년대의 남미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남미 국가들에게 융자했던 미국,영국 은행들이 무더기로 도산하면서 얻은 교훈 때문인데, 자기자본이 8%가 넘는 은행들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않은 은행들은 위기 때 파산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은행들의 자기자본 확대를 위해 일본 대장성은 일본은행에 이른바 "투금계정"을 기업에게도 허용하는 조치를 내립니다. 원래 투금계정은 투신사들이 은행에 자금을 예치하고 투신 업무를 하기 위해 만든 계정인데 이것을 일반 기업들에게 확대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 버블 경제의 시작을 만들게 된 비극으 첫 단추였습니다.

 

2. 버블 경제의 시작

기업들이 은행에 투금계정을 놓을 수 있게 되자, 기업들은 이른바 "자이테크(재테크)"에 열중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업무용/비 업무용 부동산 구입 열풍이었습니다. 이 당시, 일본 은행들은 기업에 대출을할 때 부동산 담보 대출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더욱 기업들의 부동산 구매를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버블의 메카니즘은 이런 것이었는데

기업의 부동산 구매 -> 부동산 가격 상승 -> 상승된 가격의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은 기업에 더 많이 대출 -> 기업 부동산 구매  이런 식의 레버리지가 일어나면서 일본의 "버블 경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투금 계정과 스왑을 사용한 과잉 출자였는데, 당시 일본은 기업 금융에 대한 규제가 심해서 마음대로 회사채를 발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유럽에서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달러화 표시 채권으로 발행하고 이것을 일본 엔화 채권으로 스왑하여 자금을 조달할 수 잇게 된 것입니다. 원래, 기업은 이런 짓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은행의 투금계정을 통해 기업이 증권업과 비슷한 행위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투금계정을 통해 부동산 구입과 과잉출자가 가능해지자, 일본 기업들은 너도 나도 설비증설에 나섰는데 당시 경제성장의 67%가 이러한 설비증설에 의한 것이었고 일본 기업은 이를 통해 또한 부동산 담보가치를 게속 증가시킬 수 있으니까 일본 기업들은 다투어 재테크에 열중하기 시작합니다.

 

3. 1986년 플라자 합의

계속 늘어나는 무역적자에 고심하던 미국은 결국 미국, 일본을 비롯한 G7 재무장관 회담을 통해 일본 엔화의 평가절상에 합의 합니다. 즉, 그 때까지 1달러 259엔에서 150엔으로 합의했는데 이 때문에 수출이 위축되자 일본의 경제성장율은 1986년에 마이너스 0.5%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일본은 이자율을 네차례나 걸쳐 인하하여 3%로 떨어뜨리는데 당시 총통화증가율은 10%,그렇지만 엔화 강세로 물가가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이 때문에 자산 가격이 상승합니다.

(자산 가격의 상승은 자국 통화의 강세와 낮은 이자율로 발생, 2006년 한국의 경우와 동일)

 

마이너스 성장임에도 이 시기, 기업의 부동산 투기, 낮은 이자율, 은행의 자산 부풀리기등에 의해 1986년 닛케이지수 18,000으로 상승합니다. 여기에 일본은행은 1987년 금리 2.5%로 인하합니다.  이 당시, 일본인들은 경제학적인 원칙을 무시하고 재벌 상호출자가 주가를 더 높인다거나, 터무니 없는 대기업 맹신 신화등, 지금의 한국 부동산과 비슷한 말도 안되는 논리로 주식투기를 부추겼고....

 

주가상승과 풍부한 유동성으로 부동산 가격이 1985년 부터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말한 부동산 담보대출에 의한 자산 부풀리기 메카니즘이 본격 작동하면서 1985년 22조엔의 부동산담보대출이 1989년 80조엔으로 상승했고 담보 부동산 가치의 100~200% 대출이 성행합니다. 일본 샐러리맨이 100년 걸려야 집을 살 수 있을 정도였으며 마침내 1990년 일본 부동산 가치는 2000조엔이 넘어가 미국 전체 4배가 됩니다.



 

당시 NTT 빌딩의 3.3 평방미터의 가격은 1만달러 (지금 한화로 1200만원 싸네~~~~)

그리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에 1980년대 말부터 기업가치를 기술가치 보다 부동산 가치로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4. 버블의 절정 - 일본은행의 버블 꺼뜨리기

이 시기, 내부자 거래에, 정치인과의 결탁 심지어 야쿠자와의 결합으로 점차 부동산과 주식시장은 폭력적인 모습을 띄기 시작했고. 주가조작, 부동산 개발, 등에 불법적인 행위가 만연하기 시작합니다.

 

1989년 말 니케이 지수는 거의 4만에 도달했지만, 반면 배당수익률은 0.38%로 하락하면서 실질적 기업 가치에 의문이 발생합니다. "거품이다" 이런 인식이 퍼지기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자

1989년 일본은행 총재로 임명된 미에노 야스시로는 버블 경제를 치료하기 위해 금리인상에 착수합니다. 이때 니케이 지수는 1989년 12월20일 최고 점으로 4만 포인트에 다다릅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1990년 8월까지 5차례에 걸쳐 6%까지 금리 인상을 단행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주가는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90년에는 주가 지수가 2000포인트 하락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부터 주가 폭락이 시작된 후 1991년 부터 부동산 가격도 폭락 하기 시작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위의 차트와는 달리 일본의 6대 대도시 부동산 가격은 금리인상을 단행하기 전인 1989년 여름부터 주가보다 먼저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 부동산 하락은 한국과 비슷하게 정점에서 가격이 바로 하락하지 않고 어느 정도 가격이 조금씩 빠지다가 6대 대도시의 경우 단 1년만에 절반 정도의 가격이 하락합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완만히 가격이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일본 정부의 1차 대책 1990-1992 (2008년 한국과 너무나 유사)

주가가 하락하자, 대장성에서는 주가 다음 과 같이 부양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1. 1990년 2월 마진론 대출폭 확대하여 담보주식 30% 대출을 50%로 확대합니다. 

(2008년 한국의 LTV 확대와 DTI 규제 해제와 유사)

2, 4대 증권사 대표들에게 유상증자, BW 발행 금지를 명령합니다. 이때 주가는 3만으로 하락합니다

3. 마침내 2만 밑으로 하락하자 증권사에게 주식 매입 명령을 내리고

4. 보험회사들의 주식 매도 금지 명령내렸고

5, 연기금 및 우체국 예금까지 동원하여 주식매수를 시작합니다.

6. 동시에 금리인하를 단행합니다.  1991년 7월에 5.5%로 0.5% 인하, 그리고 1991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총 1.0% 인하하여 4.5%.  2008년 한국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1992년 8월 닛케이 지수는 1만 4309로, 60% 하락합니다.



 

6. 일본 금융시스템의 악화

주식 및 부동산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한 일본 대장성의 무리한 주식 부양으로 금융기관들의 실질적인 유동성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주식및 부동산 가격이 하락함에도 매도를 할 수 없어 실질 손실이 누적됨 회계 부정으로 이를 은폐하려 했고 대장성도 이를 묵인합니다.

그러나 결국, 쌓이고 쌓인 적폐는 터지기 마련 곧이어 연이은 금융스캔들이 발생합니다.

 

1990년 노무라, 니코 증권의 투금계정 회계부정 사건이 발생하고 이 때문에당시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 증권 회장 다무라 요시하라가 사임합니다. 곧이어 다이와 코스모 증권사가 자사의 손실을 고객에게 떠넘긴 회계부정 사건이 드러나 대표가 사표를 냅니다.

스미토모 은행 총재 이소다 이치로 총재는 과도한 부동산 대출이 부실화 되자 불법 주가조작 및 야쿠자 연관된 부동산 투기로 손실을 만회하려다 들통, 결국 20억 달러 규모의 손실이 드러나고 이에 이소다 총재가 사임합니다. (스키토모 은행 사건)

1991년 후지은행의 2600억엔의 CD 위조 사건 (CD를 위조 발행 후 은행에 자금 입금 후 위조 CD라 하여 출금 거부)이 발생하고 이어 오사카은행 위조 CD 사건이 발생합니다. 더 어이 없는 것은 당시 일본 산업은행은 위조 CD를 담보로 거액을 대출 했고 이 때문에 사건의 여파는 일파만파로 퍼지게 됩니다. (이철희 장영자 어음위조 사건과 비슷)

 

1992년에는 부동산 가격이 정점 대비 40% 하락하고... 마침내 일본 금융기관들도 견디지 못하고 손실을 일부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앞서 이야기한 스미토모 은행은 결국 1994년 부동산 대출 부실로 2800억엔 손실을 발표합니다. 이 당시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과 관련된 부실채권 액수는 약 60조엔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었습니다.

 

7. 일본 정부의 2차 대책

1990~1992년도의 증시 부양 대책이 완전 실패로 돌아가자, (2008년 한국과 너무나도 비슷했던..) 결국 일본 정부는 1992년 부터 강력한 경기 부양책을 사용합니다. (2009년부터 한국도 경기부양책을 사용할 예정임) 다음은 당시, 일본 정부의 경기 부양책에 사용되었던 예산 액수입니다.

1992년 8월 10.7조엔 (금리 3.25%로 인하)

1993년 4월 13.2조엔 (효과가 없자 추가 다음 회계년도에 추가, 금리 2.5%로 인하)

1993년 9월 8조엔 (그래도 효과가 없자 추경예산으로 편성, 금리 1.75%로 인하)

1994년 2월 15.3조엔 (그래도 효과가 없어 더 크게 편성) .... 총 37조 3천억엔

 



 

결국, 이러한 부양책이 실패하자, 일본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제로 금리 정책을 취합니다. 1995년 9월 일본 정부는 그 때까지 사상 최저의 금리인 0.5%로 금리를 내립니다.

그리고, 엔고로 인해, 위기에 빠진 일본 제조업체를 살리기 위해 1995년 8월 2일 미국, 일본, 독일은역 플라자에 합의하고 1995년 5월 26일 80엔대까지 떨어진 엔을 100엔대로 끌어 올리기로 합의 합니다.

 

이때까지 일본은 1991년 부터 1995년까지 엔고를 저지하기 위해 173회에 걸친 외환시장 개입을 했으나 결국 엔고를 저지하지 못했고 결국, 미국, 독일, 일본 3대국 재무장관이 환율을 다시 재조정하비는 것으로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시 세계 2 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장기침체가 세계 경제에 위험이 되며 그리고 엔의 이상 강세로 인해 달러 기축 체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미국과 일본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8. 무너지는 일본 금융

그러나 이러한 대책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일본 금융시스템에 금이 가면서 일본은 금융위기 상황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1995년 전후 최초로 은행 인출 사태 발생하여 도쿄 신협/코스모 신협이 뱅크런으로 파산합니다. 이어 오사카신협/효고은행이 파산합니다. 파산한 신협은 규모는 작았지만, 이런 식으로 주택금융신용조합들이 연쇄도산하자, 그 피해핵은  6조 4천억엔에 이르렀고 결국 일본 정부는 긴급구제로 이들 신협의 예금을 대지급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신협은 시작이었습니다.

 

이어 1996년 부동산 전문 대출 은행인 한와은행이 파산합니다. 다음해인 1997년 10월 산용증권이 일본 최초로 증권사로서는 처음으로 파산합니다.

 

그리고 일본 금융계에서는 마의 11월이라고 불리던 1997년 11월... 일본 10위권의 홋카이도 마규쇼쿠 은행이 파산하고 마침내 11월 23일에는 일본 2위 야마이치 증권이 파산합니다. 피해액은  3조 2천억엔으로서 일본 역사상 최대의 금융기관 파산이었습니다.

 

이 마의 11월은 한국과도 많은 관계가 있는데 금융기관의 연쇄 도산의 공포에 떨던 일본 은행들은 1997년 당시 한국에 빌려주었던 230억 달러 규모의 외채에 대한 일제 채권회수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종금사들이 파산했으며, 대기업 부도에다가 업친데 덥친 격으로 이런 식으로 일본 금융기관으로 부터 크레디트 라인이 닫히자 제일은행, 서울은행이 사실상 파산해 버립니다. 바로 한국의 1997년 IMF로 상징되는 금융공황이 닥친 것입니다. 

 

마의 11월 동안 일본 금융기관은 11월 1일부터 13일 까지 2주 동안 19억 달러를 회수했으며 12월까지 70억 달러를 회수해 가면서 한국은 한 때 가용 외환보유고가 14억 달러로 까지 떨어집니다. 그리고 한국은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철하게 됩니다.

 

9. 일본 경제 파산 위기 - 1998

1998년이 되자 연속되는 금융기관의 파산으로 일본 경제도 위험속에 빠져 듭니다.

한국에서는 잘 몰랐겠지만, (우리가 더 급했으니까) 일본도 1998년에는 경제위기가 온다는 예측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때문에 새로이 당시 전 수상이던 미야자와씨가 대장상으로 취임하고 곧바로 또 다시 경기부양책을 사용합니다. 

 

1998년 무리한 증시 부양의 실패와 주식가격 하락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인한 불황에 대응하기 위해 1998년 4월, 16조 7천억엔이나 되는 1차 경기부양책을 시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부양책이 시도 되던 때만 살짝 주가가 부양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듯 하더니 이내, 주가는 곤두박질 치고 부동산 가격은 게속 하락합니다. 1992년~1995년 경기 부양책의 실패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엔화가 속적 없이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110엔에서 120엔 정도를  왔다 갔다 하던 일본의 엔화는 1998년 4월의 경기부양책도 실패 조짐을 보이자 한국의 외환위기 때 처럼 그리고 2008년의 한국처럼 속절없이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일본의 부실채권액이 정부 발표한 5조엔이 아닌 150조엔으로 추정된다는 뉴스가 나오고, 120엔선이 이어 130엔선이 돌파되자 일본 경제계는 위기감에 쌓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환율 1300원이 깨지는 셈) 그리고 마침내 1998년 6월 1일140엔이 깨지면서 140.33 엔을 기록하자, 일본 경제계는 패닉에 휩쌓입니다. 그리고 이러다가는 "일본도 아르헨티나 처럼 된다" , 는 공포가 전 일본을 휩쓸어 버립니다. (워낙 낮은 금리, 경기부양책으로 엄청 풀린 돈, 그리고 엔화 추락으로 하이퍼 인플레의 공포가 엄습)

 

그런데

슬프게도 여기서 부터 한국과 일본은 다르게 됩니다.

일본의 마쓰나가 대장상과 사카키바라 재무관등은 급거 미국으로 날아가 당시 미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로렌스 섬머스 재무차관을 만나 일본 경제의 구원을 애걸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일본 경제는 무너진다. 제발 도와달라....

1998년 6월 15일, 한때 장중에서 1달러 150엔이 깨졌습니다. 그날의 종가는 1달러 147엔...

경제대국 일본이 외환위기에 휩쓸리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필사적이었습니다. 이때, 당시 한국의 외환위기로 인한 환율상승으로 경쟁력을 크게 잃어버린 중국에서 미국으로  중요한 메시지가 날아옵니다.

"만일 일본의 엔이 150엔을 지키지 못하면 중국 위안화도 환율을 조정할 수 밖에 없다"

 

당시 루빈 재무장관은, 회고록에서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운 결단 중 하나"로  이 결정을 꼽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1달러 150엔을 마지노선으로 강력하게 시장에 개입 엔화 하락을 막기로 한 것입니다.

 

IMF? , 고금리?, 고통스런 구조조정?

한국이 겪었던 가혹했던 정책들 하나 없이, 조건 없이 미국은 일본의 엔화 하락을 저지하기로 일본과 합의 합니다. 

 

그리고 150엔선이 위협 받을 때 마다 미국과 일본은 함께 시장에 개입하여 끝내 엔화를 안정시킵니다. (당시 환율 표 참조, 설명 부근을 살펴볼 것) 1998년 8월까지, 거의 두 달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환 협조 정책으로 일본 엔화는 폭락 직전에서 마침내 1998년 9월이 되자 130엔대로 밀리면서 일본의 외환위기는 지나갑니다.

 

10. 실패로 끝난 일본 사상 최대의 경기부양책

그리고 일본 엔화의 위기가 지나가자 1998년 11월 4월에 행했던 액수 만큼이나 거액의 추경예산이 편성되고 총 17조엔의 제 2 차 미야자와 플랜이 가동됩니다. 그러나 역시 효과는 없었습니다.

다시, 1999년 11월에는 17조엔의 경기부양책이, 2000년 10월에는 11조엔의 경기 부양책이 시도 되었으나 결국 일본 경제는 살아나지 못하고 4차에 걸친 일본 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은 무려 61조엔이나 투하 되었으나 일본 경제를 살리지 못합니다.

 

1992~1995 일본의 경기부양책 37조엔과 합치면 무려 98조엔의 경기부양책이 실패로 돌안 간 것입니다. 이로서 일본의 재정적자는 GDP의 140%로 까지 치솟게 되고 일본의 국채는 한때 짐바브웨 국채보다도 더 낮은 등급을 받게 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사실, 미야자와 대장상은 1999년이 되자 한국과 같은 금융재생 프로그램을 가동하려고 했습니다. 은해의 부실을 털어내고 부실채권을 정부 기관이 매입하여 금융부분을 재생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지금의 한국처럼, 이른바 "토건족" 이라는 건설-은행-정치인/관료의 3각 트라이 앵글이 형성되어 이 틀을 깰 수가 없었습니다. 즉, 은행은 파산 직전인 건설사에게 계속적으로 운전자금을 대 주고, 건설사는 이 돈의 일부를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으로 헌금하고 은행은 이로서 건설사가 망하게 될 경우 부실채권을 양산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정치인은 관료와 결탁, 거액의 은행 부실 채권을 눈감아 준 것입니다.

 

그래서 미야자와 대장상이 금융부실에 메스를 가하려 하자, 대장상 관료들이 격렬히 반대하여 결국 그는 재정적자 확대와 경기부양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납니다.

 

11. 마침내 금융부실에 손을 대다.

결국, 일본의 경기 침체는 그 이후로도 지속됩니다. 그러나 이웃 한국이 마침내 IMF 자금을 다 상환하고 계속되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경제를 확장해 나가는데 성공하자, 마침내 일본에서도 한국식 경제 회복을 벤치마킹 하자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납니다.

 

한때 한국의 경제정책을 격렬히 비난하던 오마에겐이치라는 일본의 보수 경제평론가도 이 때는 오히려 한국의 방식을 칭찬하며 일본도 한국과 같은 경제 구조 개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대장상과 은행-건설 이라는 트라이앵글이 있는 한, 은행부실은 은폐될 수 밖에 없었으며 개혁은 지지 부진했습니다.

 

이때 솔직히 저는 정말 싫어하는 일본의 보수 우익 꼴통 고이즈미가 나타납니다. 그는 꼴통 답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던 일본 대장성을 해체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되자, 드디어 일본 금융도 한국식 금융개혁에 드라이브를 걸 수 있게 됩니다.

 

2002년 10월 금융재생프로그램으로 대손충당금 기준 강화합니다. 그때까지, 일본은행들은 느슨한 규제를 통해 은행들의 부실채권 규모를 은폐했었는데, 이로서 대손 충당금을 훨씬 더 쌓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대손충당금을 쌓게 되자 한국과 마찬가지로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합니다. 이로서 국가가 은해으이 주요 대주주가 되는 동시에 부실채권을 상각할 수 있게 됩니다.

 

2003년 4월에는 한국 자산관리공사와 유사한 산업재생기구 창설로 금융권의 부실채권을 매입하여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본 은행들을 한국 처럼 부실 은행들은 우량한 은행에 합병 시키고 덩치를 키워 자본금을 확충하자, 바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2004년 마침내 일본은 2004년에서야 장기 불황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일본의 장기 불황 탈출은 저금리와 경기부양책으로 상징되는 단순한 케인즈 정책으로는 경제를 살릴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경제를 살리는 방법은 통화주의와 케인즈를 복합시키고 특히 금융 시스템을 건전화 시켰을 때 살려낼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다시 한번 한국 경제를 살리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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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tn.co.kr/_comm/pop_mov.php?s_mcd=0109&s_hcd=&key=200811031734283921
(위를 주소창에 부치세요, 동영상 있음)

어제의 미국 대선은 역사의 한장면을 보는것 같았다.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히 대박일 것이다. 아마, 지금쯤 헐리웃 어느 영화작가는

각본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아쓸아쓸하게 이긴게 아니고 압도적으로 이긴게 무척 고무적이었다.

이제야 말로 미국 흑인들에게도 햇살이 비춰지려나.....

 

그나저나, 박영선 의원 대단하다.

답변하는 한총리도 박영선 의원과는 '다른' 의미로 참 대단(?)~~~ 하시다. (내가 다 창피해 부러...)

문득, 한총리의 답변을 들으니 이해찬 전총리가 생각난다.

이해찬 전 총리는 한총리와 달리 또박또박  질문자(안택수)가 미쳐

인지하지 못한것 까지 설명해 주며 답변 했었는데.... 에고 통제...

 

아무튼, 이 동영상을 보고 박의원에게 후원금 한번 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영선 의원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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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아짐과 조조로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고 점심을 먹고

집으로 와서 경제티비를 틀었는데, 오마나, 세상에 '938'이 뭐니?

정말,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으렸다.

취임 8개월에 주가를 1000도 더 까먹다니... 이쯤되니 한달전쯤 1500선 붕괴

어쩌고 할때가 차라리 천국이었나싶다..

나참, 정말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대통령만 제대로 뽑았으면 아무리 내려도 1500 선은 방어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환율도 이런 식으로 뛰지 않고... 'ㅌ'으로 시작되는 말이 설마설마

회자 될까 했는데 어쩌면 정말 그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오늘 주가를 보고 들었다.

 

넉달전까지만해도 주식의 '주'자도 모르던 나였지만 ,

'삼양라면' 주식사기 운동에 동참하면서

자연스레 이따금씩 티비로 주식강연을 들었고,  

그 들은 풍월이 있어 이 사태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내 주식값 싸진것이야 아무래도 괜찮다.

(삼양이 망하지만 않으면 된다.)

처음시작을 돈벌이가 아닌 촛불의 전이로 봤기에 지금 3분의 1토막이 나도

괜찮다. 그러나, 촛불의 마음들이 훨훨 타오르기를 비는 마음에서

삼양만은 너무 미끄러지지 않았으면 싶다.

 

'맛있는 라면'이 할인점에서 라면들중 최고로 팔리고 있는 것을 할인점

누리집에서 보았는데 ... 사익을 떠나 잘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오늘은 코스피가 나에게 <아내가 결혼했다>보다 더한

충격을 주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대박 예감.

1처 2부제 하고 싶은 아짐들이 얼마나 많은지... 통상 주중 조조로 볼경우 열명 안팍으로

볼때가 많은데 <아내가....>는 족히 100명은 되었는듯....

속이 시원했다. 머지 않은 미래에 그런날이 오지 않을까?

1부 1처제보다

2부 1처제보다, 내생각엔 2부2처제가 딱이라는 생각이~~~ㅋㅋㅋ

......

몇년전 동명의 책제목을 접하고 도대체 무슨 내용이랴 했는데

충분히 말이 되었다.

 

그래도, 가장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공작부인>이다.

18세기로 돌아가고 싶다.^^영화는 실재 주인공 공작의 집에서도 촬영했다는데

넘 멋진 풍경들의 연속이었고, 그 시대로 잠입해보는 재미가 쏠찮았다. 

이 시월을 밝히는 단 한편의 영화를 뽑으라면 당근, <공작부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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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열쇠고리' 어디로 갔나? '키홀더'가 웬 말이냐!

 

얼마 전 드라마 <신의 저울> 재방송을 보고 난 후,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세종대왕께 너무 미안한 단어 하나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극 중 주인공 영주(김유미 분)가 연인 우빈(이상윤 분)에게 "오빠, 키홀더 찾았어"하며 전화로 소리쳤는데 나는 처음에는 그 소리가 뭔지 못 알아들었다.

 

모양은 '신의 저울' 모양의 열쇠고리로 보였는데, 이 드라마에서 그것은 중요한 단서인지라 두 남녀 주인공은 그것의 발견을 두고 서로 달뜬 목소리로 몇 번이고 '키홀더'를 반복했다.

 

'키홀더', 이렇게 쓰고 보면 영어를 접한 사람은 누구나 감이 오겠지만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발음으로 난생처음 키홀더란 소리를 들으니 언뜻 와 닿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니, 쟤들은 열쇠고리 같은 걸 두고 왜 키홀더라고 난리지?'하고 생각하다, 몇 초 더 흐르고 나서야 그게 그거구나 이해했다.

 

열쇠고리 살 일이 없다 보니 열쇠고리가 키홀더로 불리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열쇠고리는 아직 열쇠고리로 불리고, 다만 저 드라마에서만 유별나게 키홀더로 부르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해 보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어쨌든, 키홀더가 열쇠고리 대신 쓰이는 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쯧쯧"하는 낮은 탄식 음이 흘러나왔다.

 

[사례 2] 무빙워크? 아주 귀에 딱지가 생기려 하네

 

모 대형 할인점에 갔다가 역시나 나는 예의 그 반복되는 '무빙워크'라는 말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무빙워크에서는 어쩌고저쩌고 하지 마세요란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는데, 정작 그 '무빙워크'에서 어쩌고저쩌고 할 사람들은 대게 그 말뜻을 못 알아듣는다. 7살인 둘째가 촐랑대자 나는 안내방송을 통역해 줘야 했다.

 

'무빙워크'를 대체할 말이 없을까. 어쩌다 한 번씩 '그 길'에 설 때면 매번 그 길에 대한 명칭을 고민하게 된다. '자동길', '스스로길', '스르르길', '미끄럼길' 등 나름 표정을 일그러뜨려가며 궁리하다가도 그 길이 끝남과 동시에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다 오늘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이 무빙워크라 불리는 물건을 일러 '수평보행기'또는 '자동길'이라 하였고 국립국어원에서는 '자동길'로 부르길 권장하였다. 자동길, 좀 어색하긴 하지만 자꾸 부르면 입에 익지 않을까.

 

[사례 3] 지역축제는 '페스티벌'?

 

가끔 뉴스에서 지역축제의 이름 끝에 '페스티벌'이라는 말이 붙는 것을 볼 때면 마치 갓 쓰고 양복 입은 사람을 본 것처럼 어색했다. '영동 곶감페스티벌',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 '안동국제탈춤 페스티벌'.

 

곶감·고추·탈춤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인데 왜 이런 축제의 제목에 영어를 끌어다 써야 되는지. 온 나라가 영어 열풍이니 마치 대한민국 사람 다 영어를 알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50대 중후반 넘어가면 영어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알아도 알파벳과 간단한 단어는 알아도 페스티벌 같은 좀 긴 단어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외래어 충분히 우리말로 바꿀 수 있어

 

KBS <상상플러스>에서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꿔주는 꼭지가 있다. 선정된 외래어들을 보면 도무지 우리말이 없을 것 같고 짓기도 마땅찮아보이는데 결론을 보면 항상 진수성찬이다.

 

다음은 <상상플러스>에서 우리말로 바꾼 외래어중 몇 개를 옮겨 온 것이다. 

 

◈ '퀵서비스'를 우리말로 바꾸면?

1위-휙배달

2위-빠른건네미

3위-번개발

4위-늘찬배달

5위-날쌘전달

 

◈ '안티팬'을 우리말로 바꾸면?

1위-반대지기

2위-도리꾼

3위-가탈쟁이

4위-궂은벗

5위-게정꾼

 

◈ 내비게이션을 우리말로 바꾸면?

1위-길초롱

2위-길도우미

3위-길눈이

4위-전자길잡이

5위-척척길박사

 

◈ 마일리지를 우리말로 바꾸면?

1위-차곡돈

2위-되돌이씨앗

3위-이용실적점수

4위-씀씀이덤

5위-덧두리점수

 

위에서처럼, 누리꾼들이 만든 재치 있는 우리말들을 보자, 머리를 맞대면 마구잡이로 쓰이고 있는 외래어들을 충분히 우리말로 바꿀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니까 퀵서비스로 보내줘"보다 "급하니까 번개발로 보내줘"가 훨씬 정겹지 아니한가. "너는 마일리지가 얼마나 있니?"보다 "너는 되돌이씨앗이 얼마나 있니?"가 더 운치 있지 아니한가.

 

아무튼, 올해도 변함없이 한글날은 돌아왔다. 돌아왔는데, 한글 사랑의 온도는 자꾸만 낮아지는 것 같아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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