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디자인이다
권삼윤 지음 / 김영사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이야기의 시작은 어느 한 곳이다.

저자는 중국음식을 이야기하면서 넓은 국토에서 다양한 기법으로 각기
발전하다보니 광동요리, 북경요리, 상해요리 등이 다 다르다고 말한다. 다시 화제는 돼지로 간다.
양이 아니라 돼지를 키우는 것은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고 유목적 삶이 아니라 농경적 삶의 한가운데
자리매김한다고 한다. 한자로 집가家의 가운데에 돼지를 뜻하는 시豕가 놓인다는 해석으로 넘어간다.
중국 사람들은 돼지는 먹돼 소의 젖은 먹지 않다보니 이를 분해하는 효소가 나오지 않는데
유목적 삶과의 대비는 만리장성을 경계로 삼아 이루어진다고 한다.
북경 조금 위의 장성에서 남과 북을 바라보며 찬찬히 의미를 짚어보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는
이제 두 문명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내려간다.

이렇게 화제는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전세계를 오간다.
지중해의 생선이 왜 맛이 없는지는 그 바다가 파도가 적고 물이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주고 다시 밖으로 넘어와서 이슬람인들의 해상 개척이 중국으로 가서는 정화의 원정이
되고 포르투갈을 만나서는 인도에 이르는 길잡이가 되었다고 한다.
지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이를 따라가다보면 우리의 인식도 넓어진다.

여행은 하나의 기술인지 모른다. 낯선 곳을 방문하고 그 삶에 놀라고 다시 서서히 적응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게된다. 떠나서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나와 내 주변이 새롭게 보인다.
이러기를 수십년, 다닌 곳은 지구 곳곳의 문명에서 오지까지 포괄하다 보니 그의 여행은 이제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론을 이야기할 정도로 발전해버렸다.

여행 시작은 낯선 것의 발견이다. 나아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의미를 찾는 해석이 된다.
그리고 각자의 삶을 서로 비교하면서 모두에게 통할 수 있는 공통된 가치를 찾는 통찰이되어간다.

여행가의 문명론,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오고 무언가 우리가 배운 것과는 다르다는 느낌도 가지게
된다. 전문학자의 책들이 대부분 투박한 글로 교과서적인 공부를 시키려드는 데 비해서
여행가의 글은 매끄럽게 경이를 담아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 공부 또한 책상물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막의 모래바람을 이기며 높은 산에서
고산병과 싸우며 만들어졌기에 가치가 더욱 귀하다.

저자에게 부러운 점은 먼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다음 기초를 닦기위해 차분하게 준비했으며
이를 꾸준히 실천했다는 점이다. 수십년간 꾸준하게 한 길을 팠다.
작가의 초기 저작들을 읽어보면 글의 매끄러움이나 화제의 폭이 지금 보다는 많이 좁다.
하지만 점점 더 나은 것을 찾으려고 하는 탐구정신을 잃지 않았기에 계속 더 좋은 것을
선보이고 있다.
여행은 결코 시선의 머뭄이 아니다. 풍경을 담아오는 사진첩도 아니다.
사람의 발견이고 이는 겉이 아니라 속을 제대로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여행과 여행 사이의 시간은 그렇게 한 사회의 배경을 탐구하면서 왜를 물어가고
깨달음을 모으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가끔 삶이 지루하게 반복될 때 이 책을 펼쳐들고 여행에 빠져든다. 문구 하나 하나를 읽어가며
내가 이 여행에 갔을 때 이만큼의 해석을 해낼 수 있을까 물어본다. 답은 한참 멀었다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노력하려고 한다.

고된 여행을 수행하고 귀한 깨달음을 주변에 나눠주는 작가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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