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씨를 주의 깊게 보았다.
이유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영화애호가로서 감상을 말하자면
스토리의 탄탄함이 부족하다.

같은 감독의 이전 작품인 올드보이를 보면
일본만화를 기반으로 외디푸스 컴플렉스라는 그리스 비극의 개념을
첨가시켜 한층 발전시킨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서양적 고전 해석을 포함시켰기에 해외관객과 평론의 호평을 받으며 상을 타게 된 계기다.

반면 금자씨에서 그런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까?
기독교의 성경에서 얼마간 코드를 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서로 연결하기 위한 스토리의 탄탄함이 없다.

복수. 과연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만한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인간은 기독교적 의미로 보면 누구나 죄인이기에 그 권리를
절대자인 하나님께 유보하고 현세에서는 용서하고 심지어 다른 쪽 뺨까지 내놔야 한다.
금자가 줄기차게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복수를 성공시키고
돌아왔을 때 눈 앞에 나타난 존재는 자신도 공범이었던 유괴된 아이의 영혼이었다.
그 아이에게 미안이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금자의 입은 재갈로 막힌다.
아이의 입을 막았던 재갈? 아니면 얼마전 최민식의 입을 막았던 재갈일까?
미안하다고요 하면서 씩 웃으며 나타나는 소년의 성장한 모습은 실제로는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금자의 공범 행위가 없었다면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앞에서 죄인은 변명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입을 다물어야 한다.
다시 묻건데 누가 누구를 정죄할 권리가 있을까? 모두가 죄인인 마당에.

이렇게 모순되고 가치고 모호한 세상이라면 절대악을 설정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올드보이의 매력 중 하나가 복수의 방향이 서로 바뀐다는 점이었다.
최민식의 복수가 갑자기 유지태의 복수로 바뀌는 점이 바로 그런 모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금자씨는 그게 없다. 금자 한사람의 단선적인 복수가 갑자기 형식이 바뀌어 여러
사람의 복수로 바뀔 따름이다. 특히 인간의 속물 근성을 보이기 위한 여러가지
장면들은 한층 주제를 흐리게 할 뿐이다.
최민식의 피를 받아 빨간 무스케익을 만들어 나누어 먹지만 너무 길게 편집된 내용들일뿐이다.

금자, 한국 영화가 지속적으로 뻗어나가기 보다는 성장의 한계를 맞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작품이다. 다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충고는 우선 스토리를 더 탄탄하게 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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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5-08-1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스토리, 특히 중반부 이후의 스토리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얽힌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좀 바닥에 발을 딛지 못하고 둥둥 떠나니는 듯한... 그리고 그 빨간 무스케익이 그건지 처음 알았습니다... ^^

사마천 2005-08-1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부분은 양론이 있습니다. 그게 피가 아니라는 말을 감독이 했다고도 하고 다시 그렇게도 볼 수도 있겠네요 라고도 감독이 다시 언급했다고 합니다. 실제 피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윤리의 문제가 나오죠. 인간이 인간을 먹는다는. 그래서 혼동의 여운속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넌지시 띄운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