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 고종실록 - 쇄국의 길, 개화의 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종실록

 

고종이라는 임금은 늘 논란 속에 있다.

뛰어난 아비와 아내에 가려 어리석은 임금을 뜻하는 혼주로 불렸다.

하긴 망국의 역사에는 늘 어리석음이 강조된다. 의자왕의 3천 궁녀 이야기나, 신라왕들의 포석정 놀이 등이 다 그렇다.

고종에 대해서도 변호의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머리가 좋았고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정치적 수완이 좋았다는 등의 주장이 여럿 있다. 그의 도전을 높이 사는 이들도 있다. 조선 최초로 중국에서 벗어난 자립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만든 점이 자주적이라는 것이다.

여러 논란에도 이 시대는 한반도에 사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대였다. 근대화는 따라오지 않는 이들에게 강제력을 부과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자원은 수탈되면서 사람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과거의 문명국이었던 인도,중국도 매한가지로 시련을 겪었다.

조선은?

훨씬 어려운 문제를 부딪혔는데도 불구하고 리더들은 혼미했다.

대원군은 과단성과 현실감각을 가지고 평화롭게 정권에 진입하면서 군주 중심의 주요 과제를 실현해낸 점은 인정한다. 반면 서원을 없애면서 반대로 궁궐을 크게 짓는 것은 왼쪽 주머니의 물건을 오른쪽으로 옮기는 수준의 개혁이었다. 광해군의 몰락에 궁궐조영이 큰 기여를 했던 일이 반복된다. 또한 그는 복고적 이상주의자였다는 점이 개화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한 두번의 해안 전투를 이겨낸 점으로 척화비가 만들어졌지만 그 기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해양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하면서 일본은 태평양을 넘어가는 길목에 편입된다. 증기선의 항해에 석탄과 물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멀리 마르코 폴로의 책에도 언급되는 황금의 나라였기에 매력이 많았다. 반면 조선은? 그냥 가볍게 찔러 보았는데 반응이 영 신통치 않으니 놔두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일본이 치고 들어온다. 일본은 중고선 사들여 편대를 만들고 해안에 포격 실험 몇 번하니 조선은 과거의 양이와는 비교가 안되는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세계관이 이제 역전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원군은 이 흐름을 잠시 막아 보려했던 착오자일 뿐이었다.

책을 통해 민비를 좀 더 알게 되었다. 명성황후라는 오페라를 통해 보여주는 삶의 비극성은 이미 잘 알 것이다. 사실 비극이 아니면 오페라나 소설의 주인공이 잘 안된다. 왕자와 공주 스타일의 희극은 어렸을 때 읽으면 된다.

민비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녀가 근대 문물을 기피했거나 아니면 보안의식이 철저해서 사진의 위험성을 잘 알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근대 문물과 맞지 않았다는 점은 그녀가 굿을 엄청나게 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나라 예산의 상당수가 들어갔다고 하니 황당한 일이다. 그리고 그녀의 친족이 조선의 대지주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나 엄청난 매관매직을 한 것 등은 조선을 사분오열 시킨 악행이었다.

끝이 안타깝다고 해서 모든 일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청년들은 갈 길을 잃어 모험주의로 빠져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구식 군인들은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해 란을 일으키고

이때다 해서 외국군대가 진입해 좌지우지 하고

정치인들은 교묘히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등 조선은 빠른 속도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남은 일은 누가 이 과실을 욕 덜 먹고 낚아 채느냐 일 뿐이었다.

 

고종,대원군,민비 모두 다 역사의 냉정한 심판을 받을 이들이다. 개성과 스타일은 달랐지만 난세의 지도자로는 다 함량 미달인 것이다. 지배층이었던 양반 계급 또한 그 동반자였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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