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광해 보다가 역사적 배경 몇 개가 더 생각나서 적어 보았다.

1. 대동법 이야기
광해군의 주요 업적으로 대동법의 물꼬를 텄다는 점이 거론된다.
한국사 자체만으로 보면 백성들을 위한 중요한 진전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도 아시아권으로 넓혀보면 상당히 뒤쳐진 모습이다.

당시 중국은 은경제가 매우 활발했다. 
병사들의 급여 등 각종 전쟁비용이 은으로 지급되었고 이를 노리는 군납업자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어 같이 움직이는 형태였다.
조선에 들어와 그들은 은을 떼어주고 소 등 고기를 가져가려 했으나 은이 유통되지 않은 조선에서는 백성들과 불화가 일어났다.
이를 본 명의 장군들은 조선에게 은광을 개발하고 화폐로 유통시키라고 권했지만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또한 전쟁의 반대편이었던 일본도 은경제가 매우 활발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각지의 금과 은광을 개발하고 중국돈을 가져다가 활발히 유통시켰다. 돈이 돌면서 기현상이 발생하는데 적지를 갈 때 모든 물자를 가져가지 않고 돈만 가져가서 현지에서 물자와 노동력을 조달한다. 적의 백성과 백성의 식량을 내것으로 아주 편리하게 끌어다 쓰는 개념이다. 이렇게 돈과 서비스가 교환되면서 서로 간의 유혈충돌은 적어지고 이어서 정복지의 통합도 쉽게 이루어진다.

중국,일본 양쪽이 이런 사회적 진화를 이룬 반면에 조선은 어떠했는가? 여전히 관료와 결탁한 방납업자들의 수탈이 거셌고 이를 유지하려는 로비 등이 커서 무고한 백성들은 등이 휘어지게 되었다.

광해가 대동법을 주도했느니, 미흡했느니 하는 논쟁도 있지만 시야를 넓혀서 
중국과 일본에 비해 왜 뒤떨어졌는지에 대해 고민해봄이 더 의미 있다고 본다.

2. 은은 어떻게 도는가?
은이 오가는 과정에서는 몇가지 계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대규모 은광의 개발이다. 남미 대륙의 발견으로 스페인을 통해 은이 쏟아져 들어왔고 일본도 자체 은광 개발에 성공했다. 은과 반대로 산물이 쏟아져 나오는 원천은 중국이었다. 차,비단,도자기 등 다양한 수출품을 내주고 은을 받아서 이를 내부적으로 활용함으로 중국은 대호황을 누렸다.
일본이 은을 내주고 주로 도입한 것은 무기류가 있었다.
총이 다네가시마라는 큐슈 남쪽 섬을 통해 처음 도입되었는데 대량 확보를 위해서, 또 특히 화약류의 도입을 위해서 은이 큰 역할을 했다.
이때 은 제련 기술의 진보를 가져온 사람이 바로 조선에서 넘어간 기술자였다. 검동이라고 하던가?

나중에 일본 은이 줄어들자 대체품으로 개발한 것이 도자기였다.
그 도자기의 개발은 잘 아시는대로 조선의 도공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의 교훈은 자명하다. 
기술의 흐름을 막기는 어렵다. 기술을 잘 쓰면 사회가 진보한다.
그래서 눈과 귀를 열고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개방정신이 중요하다.
반대로 우리 기술자를 제대로 대우 해야 한다.

3. 지배층 교체 불발

패전은 보통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 이는 기존의 무능한 지배층을 일소하는 효과다.

무능해져서 패전을 가져왔고 그 결과 다시 지배층이 뒤집어지거나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

고려가 왜 단숨에 무너져내렸는지를 살펴 보면 당대 지배층이 원과 결탁해서 인척관계로 성장한 집안이 다수 차지했기 때문이다. 연고로 성장한 사람들은 무능하다.

그들이 막대한 장원을 가졌지만 무능했기 때문에 이성계를 필두로 한 신진세력의 공격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숙청되었다.

이는 한나라 여태후의 사망 이후 친족들이 몰살당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런데 임란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이 지배층이 유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울에서 지배층이 빠져나갈 때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는 등 사회혁명이 역역했지만 전쟁의 양상이 바뀌면서 이런 개혁 노력은 이어지지 못했다. 

전세가 유리해지자 선조가 주안점을 둔 점은 의병장들의 고문과 축출이었다. 지방 세력화하는 걸 경계해서 이들을 중점적으로 견제했다. 

다시 중국과 비교해보면 황건적의 난 토벌 이후 그 주도 세력들이 나중에 난세의 영웅으로 성장한 예와 비교 될 수 있다.


그 결과 조선의 임금과 사대부들은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기술이 왜 중요한지, 사회제도가 왜 중요한지를 알게 되고 이를 실마리로 앞날을 풀어야 하는데 그런 진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4. 이 시대는 참 안타까운 일이 많았다.

수업료를 냈으면 배우기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그 논란은 또 다른 전쟁을 불러 정말 참담한 패전 속에서 조선이 후퇴하고

신민이 고초를 겪으며 나중에는 역사의 퇴보로 이어지게 된다.

더 치열한 논쟁 속에서 공부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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