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족은 원래 터키의 동부에 거주하던 유목집단이었다. 비슷한 생활을 하던 셀주크 제국은 그보다 앞서 제국을 건설했지만 이들이 몽고족에게 격파되자 오스만족에게는 기회가 주어졌다. 빠른 속도로 주변을 정복해나간 이들은 곧 대제국을 건설하게되었다. 헝가리의 귀족을 격멸시킨 바예지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메메드 등의 업적도 크지만 무엇보다 대제라고 불리우게된 술레이만이 남긴 업적에 주목해야한다.
그가 남긴 군사적 승리들도 경이롭지만 기독교인들로부터 가장 기사다운 이교도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공정하고 합리적인 태도 또한 주목받아야한다.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고 패자를 모욕하지 않았던 그의 인품은 대외적인 교섭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프랑스왕과는 동맹을 맺어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했고 폴란드의 군주는 직접 조공을 하러 왔다. 오스트리아가 맺은 조약의 내용을 보면 스스로를 속국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대업을 이루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우선 무적에 가까웠던 군사력을 꼽아야할 것이다. 제국의 초기 정복시대에는 진자라는 유목민 출신 기병이 주력이었다. 종교로 단결된 정신력과 성과물의 공정한 배분이라는 합리적 가치과 결합되어 이들은 정복전쟁에 몸을 던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엄청난 폭발력은 제국을 성립시키고 확장하게 만든다. 하지만 제국이 어느정도 부피가 생긴 다음에는 초기의 열정만으로 유지할 수는 없다.
유목시절에는 거의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던 귀족층이 왕조에 도전하게 되고 정복전쟁에 몸을 바쳤던 부족원들의 후손들은 결코 예전처럼 용맹하지도 적극적이지도 못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복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제국의 구성원 중에서 동족의 비율이 급격히 낮아지게 된다. 이때 정복 제국은 첫번째 위기를 맞게된다.
이 단계에서 대부분의 유목국가는 외부의 새로운 도전세력에 의해 자리를 양보하거나 내부의 도전으로 붕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꾸준하게 확대되었고 유능한 행정관료들은 새로운 제도를 창안해서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게 된다. 당시 아랍사회의 학문과 지식이 서구보다 나은 편이었고 이들의 대규모 참여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는 그 시점에서 매우 뛰어난 합리성을 발휘하였다.
오스만이 만들어낸 제도 중 매력적인 것은 예니체리였다. 7-8세의 기독교 소년들을 뽑아 개종과 함께 교육을 시켜 행정관도 뽑고 군사력으로 길러낸 이 제도는 매우 독특한 창안물이다. 결혼을 할 수 없지만 하루 한끼의 식사는 황제가 내리는 특식을 받았던 이들은 개인적인 관계로 술탄과 맺어지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서구의 기독교 세계가 아직 기사와 용병의 합으로 이루어진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을 때 근대적 의미의 상비군 역할을 하는 예니체리는 무적의 군사력을 발휘하게된다.
여기에 보완적으로 사하피라는 급료를 받는 지방기병을 유지하였고 다양한 분야에서 징집병도 동원해서 거대한 무력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기술적 발전으로 대포가 활용되게 된 것 또한 새로운 유목민의 도전을 막아낼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유목제국은 종교적권위를 통한 새로운 가지 창출과 막강한 물리력을 통해 생명력을 지속할 수 있게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게 된다. 청왕조는 이전의 어느 유목민족보다 오랫동안 큰 문제 없이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이들 또한 유교와 과거라는 중국제국의 기본요소를 잘 흡수하였고 여러가지 보완적인 제도를 만들어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다. 대포는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위력을 발휘해서 유목민들을 제압하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해양민족이 원래 아니다보니 우수한 배를 만들어 바다를 누비기 보다는 필요한 때마다 해적을 고용하는 방법을 취했다. 원래 해군은 나름대로 경험과 기술이 필요한데 무작정 용감한 육군을 배에 태워 내보내는 방식으로는 노련한 기독교 해군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육지만큼 바다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안정화된 제국도 여전히 쇠퇴를 만들어내는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 물리력을 동원한 정복은 결코 무한정 뻗어나갈 수는 없었다. 로도스라는 작은 섬 하나를 공략하는데도 5만명 이상의 군사들이 희생된 것을 보면 당시는 아직 대포를 비롯한 공성무기가 성을 중심으로한 방어 진용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따라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촘촘이 건설해놓은 수많은 성들을 모조리 점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소모가 따른다. 즉 확장의 한계효용은 계속 감소하게 되고 따라서 제국은 더 이상 과거의 모델로 발전해가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오던 예니체리와 같은 물리력들이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어 국내정치에 개입하게 된다. 이는 러시아의 귀족으로 만들어진 황실근위대가 제위계승에 꾸준히 간섭했던 것이나 로마의 황제근위대가 제멋대로 황제를 폐위시켰던 것과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결국 예니체리의 완전한 해체를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했다.
오스만 제국의 경제력은 상당부분 동방과 서방의 교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과정에서 이탈리아의 여러 상업도시들과는 악어와 악어새같은 의미의 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동방항로와 신대륙을 발견해서 새로운 국부를 획득해가자 상업도시와 제국은 동시에 타격을 입게된다.

전제국가의 약점은 군주에게 있다. 유능한 군주가 등장해서 과업을 수행할 때는 제국의 발전이 많았지만 무능한 군주는 전쟁터보다는 할렘을 좋아했고 의심이 많아 친족을 죽이고 재상을 노예 취급하며 마구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토인비 식으로 말하면 창조력의 쇠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제국은 톱카피 궁전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남겼고 할렘의 문화는 지금도 터키탕이라는 야릇한 이름의 문화를 변방까지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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