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서 한참을 울게되었다. 스토리는 거의 알고 있었고 진행 또한 느릿느릿해서 급한 성격과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물이 나왔다. 무엇보다 부모님 세대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 보게 되니 언뜻 앤서니 홉킨스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던 작품 <남아있는 나날들>과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주인공은 철도와 함께 한평생을 보냈다. 기관차에 석탄을 부어넣는 화부에서 출발해서 운전을 하다가 승진해서 역장으로 한참을 보내고 이제 막 정년을 앞두고 있다. 맡은 일에 너무나도 충실하게만 살아온 사람이다.
철로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만큼 큰 자유를 허용할까? 프랑스에서 인상파 화가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철도가 있었다고 한다. 화가들이 기차를 타고 도심을 벗어나 자연을 바라보니 빠르게 스치는 풍경을 느끼며 전통과는 다른 터치를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행동반경을 넓혀주는 철도였지만 종사자들에게도 똑 같은 자유가 주어졌을까?
그 보다는 꽉 짜여진 틀이라는 개념이 더 들어맞을 것 같다. 워낙 빨리 달리다보니 길의 일부분만 흐트려져도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기차운행은 종사자들을 매우 엄격한 규율속에 생활하도록 만든다. 다양한 수신호를 주고 받으며 점검하고 또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삶을 조금 확대해보면 그대로 우리가 요즘 이야기하는 공장굴뚝의 시대가 느껴지지 않을까? 한번 들어가면 평생을 머물게되는 직장, 엄격한 연공서열, 자신의 일은 정말로 자신이 사명을 다해서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 등 일본 내지 한국식의 사회구조를 잘 나타내는 셋트가 바로 철도가 아니였을까?

그가 책임을 맡고 머무르는 역 자체가 더 이상 기차가 나아가지 않는 종착역이다. 꽉 짜인 틀에서 주어진 일에 너무나도 충실하게 사느라 자신의 소박한 욕구도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주인공이다.

결혼 17년만에 아이가 생겼어도 그는 아내를 포옹하며 같이 기뻐해주지도 못했다. 그저 공적인 업무시간에 사적인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원칙만 되풀이 할 뿐이다. 이렇게 고지식한 남편을 나 말고 누가 돌볼수 있을까하는 고운 심성을 가진 아내가 옆에 있다. 하지만 그 아내도 급성 폐렴에 걸려 생사가 걸린 자식의 병원길에 동행해주지도 못하고 제때 큰병원으로 옮기지 못해서 마침내 싸늘하게 식어버린 자식의 몸뚱이를 안고 오는 아내가 탄 기차를 평소와 다름없이 수신호와 구호로 맞이하는 남편에게는 정말 한없는 원망을 쏟아내고 싶었다. 마침내 병약하던 아내도 기차를 타고 병원길을 가게된다. 역시 교대근무자가 없기에 혼자 보낼 수 밖에 없지만 이번만은 그도 그냥 보내기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역에서 몇분을 더 끌어보았지만 그래도 기차는 떠나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내마자 돌아오지 못하는 객이 되고 말았다. 홀로남아 지키는 역은 쓸쓸했다.

그렇게 열심히 앞만보고 주어진 일에 충실했지만 사회는 빠르게 변모하고 만다. 인정과 배려보다는 돈의 효용에 따른 합리성이 더 중시되는 모습으로 바뀌어간다. 새파랗게 젊은 자식뻘의 아이가 벌써 조직의 상층부에서 자신을 컨트롤하는 지위에 올라가있다. 그리고 매우 유감스럽지만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는 조직의 뜻을 전달한다. 지금 머무르는 집도 비워야 할 것이다.

이제 정말로 정년을 얼마남기지 않은 날에 철도원 생활을 같이 시작했던 동료가 기차를 타고 왔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일들을 회고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일본판 포레스트 검프라고나 할까? 짤막한 배경장면들을 활용해서 일본사회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느라 겪어야 했던 힘들었던 집단적 잠재의식을 개인의 시선으로 보여나간다.
회사의 이익에 맞서서 동료들이 단합해가지고 취업열차를 운행하게 했던 점은 가슴 뿌듯한 추억이다. 이제 막 취업하러가게 된 어린 고교생들을 싣고 가면서 고향에 대한 좋은 기억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기적소리를 울려줄 정도로 자상한 마음가짐들이었다. 그 뒷면에는 전원취업을 기뻐하며 도회지에 나가서는 모두 열심히 먹고 살아라는 격려를 하면서 만세 삼창을 하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모두가 힘을 합쳐 잘 살아 보자는 소망은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서울역과 미아리에서 보듯이 그렇게 도회로 나간 소년 소녀들 중에는 힘에겨운 일에 눌려서 옆으로 삐져나가 술집의 매춘부로 도심의 부랑인으로 살아가게된 존재들도 꽤 있을 것이다. 씁쓸했던 부분을 옆으로 젖혀놓고서라도 고생을 추억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시간이다.
탄광촌이 지금은 노인밖에 없는 소멸해가는 공간이지만 과거에는 엄청난 달러를 벌어와 전체 국민을 먹여살렸던 그야말로 효자산업이었다는 회고도 담겨있다. 그러다 보니 아이 하나 데리고 달랑 왔다가 탄광사고로 목숨을 잃은 어떤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난다. 한국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눈물겨운 사연들이다. 사진 한장 변변한 것이 없어서 아이가 어린 마음으로 그려낸 아버지의 영정은 바로 산업현장에서 고유의 인격이라기 보다 대체될 수 있는 그리고 소모되는 기계의 부품으로 취급되며 살아가다 짓눌려버린 우리의 아버지들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부모가 없어진 아이를 보면서 집에 자손이 없기에 거두어 대를 잇게하고도 싶었지만 아내의 건강이 염려되어 포기했는데 되돌아보니 너무도 아쉽다.
그러던 중에 조그마한 아이가 역앞에 나타나서 왔다갔다하다가 옛날 인형을 놓고 갔다. 한밤중에는 다시 그 아이의 언니가 와서 재롱을 떨다간다. 정말로 귀여운 아이였다. 따끈한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더니 눈을 감게하고 입에 뽀뽀를 하는 그런 사랑이 담뿍안기는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이아이도 여전히 인형을 놓아두고 갔다. 다음날 정말로 묘하게 자신의 아내와 닮은 제법 큰 아이가 나타났다. 상당히 구닥다리 교복을 입은 이 아이를 보면서 너무도 아름답다고 느낀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맛있게 요리를 해놓고 같이 먹자고 한다. 잠시 여러이야기를 하면서 참 이쁘다고 생각하는 때에 전화가 한통화 온다. 현실이 너의 행복은 환영이라고 깨우쳐주려는 것이다. “아 이제야 알겠다. 너야 말로 나의 아름다운 딸,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줄 알았던 너가 이렇게 커서 나에게 왔구나.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사회에서 조금만이라도 출세 했다면 도회지에서 근무할 수 있었겠지. 그랬다면 감기 정도 걸린 것으로 작디작은 너를 싸늘하게 식혀서 땅에 묻지는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먼저 간 사람들 중에 보고 싶던 얼굴이 나타나게 되면 그건 다음 차례가 자신이라는 메시지라고 했던가? 딸은 떠나가면서 인형은 들고 갔지만 아직도 식탁에는 보글거리는 찌게가 남아있다. 꿈일까 생시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단지 눈발을 헤치고 달려온 제설차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을 따름이다. 한참을 달려와보니 눈에 뒤덮인 역에 쓰러져 조용히 누워있는 우리의 주인공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 철도원의 삶의 매듭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영화는 매듭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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