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쏘다 - 이헌재가 전하는 대한민국 위기 극복 매뉴얼
이헌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무척 재미 있는 독서였다. 
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시야를 넓혀 주는데 좋은 책이었다.

그의 이미지는 칼이다.
칼은 매섭고 자칫하면 베인다. 그래서 귀기가 흐르기에 가진 사람이 평정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칼은 여러 용도로 쓰인다. 특히 아픈 곳을 잘라내 환자를 살릴 때 칼의 효용은 매우 크다. 이헌재는 아이엠에프 직후의 한국 금융시장에서 의사의 칼 역할을 한다.
경제관료로서 그  칼은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고 냉정했다.

그는 원래 튀는 천재였다.
경기고도 1등 졸업, 행정고시도 1등이었다.
공부도 잘 했지만 자기 말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오죽 하면 선생님과 다투다 고교 졸업장이 분실될 정도였다.
대학에서도 데모를 하다가 유학길이 막혀서 아쉬움도 있었지만 고시로 방향을 틀어 관료가 되었다. 단 6개월 공부해서 1등하는 걸 보면 시험의 달인이었나 보다. 예상문제 적중율이 높았다고 자평하는 대목도 재미있었다.

재정부에서도 짧은 기간에 놀라운 성적을 보였다. 의도를 간파하고 집중해서 역량을 발휘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일하면서도 톡톡 튀고 승진도 앞으로 가다보니 친구는 적고 적은 많았다
그러다가 먼저 넘어졌다.
유신정권이 끝나고 자기를 끌어주던 라인이 무너지니 집중 공격을 받았다.
그는 관계를 떠나 야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무려 20년 동안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많은 걸 경험한다
세상의 틀을 짜는 일을 하다가 그 세상 속으로 들어와 틀 안에서 움직이는 건 낯설지만 유익한 경험이었다.
대우 김우중 회장 수행비서로도 지내보고 계열사 사장을 하는 등 여러가지 일에 몸담아 보았다. 세계경영이 어떻게 구현되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요령 좋게 난관을 돌파해가는지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헌재는 크게 보고 호령할 때 가장 빛나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저런 일들도 그의 역량을 모두 쓰지는 못했다.
이렇게 한 세상 뜻 다 펼치지 못하고 가는가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가 다시 무대에 올라서게 된 건 김용환 의원과의 인연 덕분이다.
대선 때 이회창 캠프에 있었지만 능력을 높이 사서 임시로 만들어진
하지만 매우 중요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바로 은행을 살리고 죽이는 살생부를 작성하는 곳이다.
한명회가 도입해서 유명해진 그 살생부 말이다.
시세가 워낙 급박한 데 아주 냉정하게 일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에 
공로도 연고도 희박한 상태에서 그는 발탁되었다. 기대에 맞도록 그는 매우 매우 냉정하고 사심 적게 일을 처리했다.

냉정함과 유능함이 모두 필요한 자리가 바로 그에게 최적이었다.
그는 문제를 빨리 보고 판단도 빨랐다.
정통 관료적이지 않고 야인생활을 오래 경험한 덕에 그는 다양한 경험을 가졌다. 관료들은 대체로 일을 하던데로 주변과 함께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 기질은 큰 조직에서 1년 단위로 차분하게 일  할 때는 맞다. 반면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투 상황에서는 성과가 떨어진다.
이헌재는 민간의 의사결정구조를 같이 경험해보았기에 보다 빠른 속도로 일을 할 숭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고가 적었다. 돌보고 봐 줄 사람이 적었기에 제대로 일 할 수 있었다.
아이엠에프 시절에 협의 등을 가지고 임창열 부총리가 잠깐 반짝했었다. 하지만 그도 퇴출은행 로비에 엮여서 오명을 남겼다. 공로도 있고 능력도 있었지만 관계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헌재는 꽤 적절한 인사였다. 정권에서도 이방인이었기에 누구를 봐준다고 다시 덕볼 가능성이 없었고 그렇게 차별화된 자세로 자기 역할을 한다.

그의 성과는 어떠했을까?
급박한 전쟁시에 했던 일을 놓고 평시에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 자기 목이 걸린 은행들이 허둥지둥 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자율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보여준다.
이권을 끌어 안고 있는 관으로 똥파리가 꼬이는 것도 흔하다.
외국에서 돈 가져오겠다고 브로커들이 오갔다.
지금이야 돈이 넘쳐난다. 한국 국채를 사겠다고 전세계 중앙은행들까지 나선다.
참 격세지감이지만 그 때는 정말 돈이 없었고 기껐달려드는 건 말 그대로 벌쳐들이었다. 이런 저런 연고를 물고 와서 돈 자랑하면서 이권 노리는 브로커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다 까발린다면 그런 브로커들을 소개해준 정치인들이나 친구들에게 모욕이 될 것이다. 
그래도 몇 가지 일화를 통해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당시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장 상처를 받은 분들은 대우였다.
지금 현대차를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세계를 향해 놀랍게 뻗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놀랍지만 이 기업들이 당시에 재무적으로 간들간들했던 것을 기억해보면 그것 또한 놀랍다.
대우조선,두산인프라,대우종합상사 등 대우 출신 기업들의 현재 성과는 대단하다. 
삼성,현대의 세계 일류로의 도약도 기적이지만 대우의 급속한 회생 또한 기적이다.
특히 지엠대우의 매각은 아쉬움 자체다. 어떻게든 깍아서 후려치려는 지엠의 전략에 휘말려 무너지고 만 대우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많이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런 대우에 대해서도 감정을 안 상하려고 김우중 회장에게 받은 혜택을 여러가지 늘어 놓는다.
여유 없는 퇴직 관료의 입장에서 솔직하게 도와달라고 머리 숙인 점, 한번 보기 위해 뉴욕까지 똥차 몰고 위험스러운 장거리 운전한 점 등이 일화로 나온다. 그렇지만 중요한 순간에 그는 매정한 편이었다.

책의 의도는 솔직히 앞으로도 쉬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자기 변명이 많다
잘은 모르지만 사적인 면에서 완전히 투명하지는 않은 듯 보인다. 나쁘다는 의미 보다는 아주 말끔하지는 않은 듯 하다. 그렇다고 공을 덮을 정도는 아니고.

노무현 시절에 다시 소방수로 등장한 것도 그의 유능함 덕분일 것이다. 탄핵정국에서 경제가 혼란스러울 때 좀 설치면서도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나섰다. 
반면 등장하자마자 금리를 낮춰서 결국 부동산을 이용한 부양책을 취한 것은 잘못된 판단 아닐까? 경제야 어떻게든 살아나지만 걷 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부동산 버블은 다음 정권에 커다란 짐이 된다.
화폐 디노메이션도 마찬가지로 버블이 가속화된 상황에서 극약이 될 수 있는 처방이었다. 당시 부동산업계에서는 화폐까지 바꾸어서 부동산이 마구 오르고 한몫 단단히 챙길 것이라고 떠드는 판매상들이 많았다.
더 많은 불로소득이 만들어졌다면 더 많은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이 종합적으로 다루어지기 보다는 저자 자신의 입장 위주로 강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책에서 매우 이채로웠던 부분은 점에 대한 부분이다.
1979년 어느 모임에서 만난 점쟁이가 두 가지 예언을 한다.
하나는 박정희 정권이 곧 무너진다는 점.
다른 하나는 이헌재의 관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잘나가는 젊은 관료 앞에서 관이 떨어진다는 것은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들어 맞았다.
운의 부침이 큰 시대, 합리적이지 않은 시대에 점은 놀라운 역할을 한다.
그의 지침이 후일 이헌재의 삶에 나침반 같은 역할을 했다는 점이 놀라웠고 이를 공개적으로 신문에 내놓은 솔직함에서도 놀라웠다.

세상은 크고 삶은 다양한데 높은 곳과 낮은 곳 골고루 경험하며 큰 일을 해본 이헌재 장관의 이야기는 무척 재밌고 교훈이 풍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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