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를 보고나서 우선 머리에 떠오른 것은 작품들이 미국인의 시각을 뚜렷이 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퓰리처상의 다른 부문에는 "가급적 미국적 주제를 담은 최고의 소설", "애국심을 주제로 한 최상의 전기 또는 자서전" 등이 있을 정도니까 보도 분야 또한 창설자의 이런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퓰리처상에 보도사진 부문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42년이라고 한다. 이때는 2차대전의 중반 무렵으로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 병사들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장면들을 담은 사진이 전시회의 시작을 장식하고 있다. 어쨌든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올라서서 냉전의 한축을 유지하게 된다. 나라밖으로 볼 때 국가의 위신이 크게 올라갔지만 산업화와 성장의 그늘은 있게 마련이다. 전시회의 시작 부분에 놓여있는 또 다른 사진 하나는 포드사에서 벌어졌던 파업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행되던 폭력을 담고있었다. 산업사회의 풍요를 표현하는 예로서 전국민에게 차한대씩을 주게 만든 포드사의 위업이 종종 거론된다. 그 이면에는 이렇게 치열한 노와 사간의 갈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한 사회의 수준을 넘어서서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곧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사진들은 이제 막 종결되려는 2차대전에 이어서 발생하는 한국전쟁을 담는다.

부서진 다리에 피란민이 가득 매달려 있는 사진이 하나 걸려있었다. 밑에는 평양 대동강이라는 사진 찍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전쟁의 비극은 무엇보다 모두가 생존의 문제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등에 봇짐을 지고 손에 아이를 붙들고 하나는 또 등에 업고 그렇게 그 험난한 길을 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그리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의 고민은 전쟁이 남긴 비극에 대해서만 머무를 수는 없다. 사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컷이다. 매우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이 사진을 보면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한쪽 편에 서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한컷으로 표현되는 사진을 통해 얼마나 공정한 입장을 견지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때도 있기 마련이다.

같은 시기에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미군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미군병사들이 한국양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이와 관련해 여러 증언을 취합한 기록물도 나와있다. 이 그림은 한폭의 화면에 작가의 기준에 따라 간명한 주장을 상징이라는 형식을 통해 담고 있다. 전쟁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똑 같은 시기에 전쟁의 미군측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아버지의 기도라는 감동적인 내용의 기도문을 만들어냈다. 이 문장들을 읽어보면 진실로 아들을 사랑하고 신앞에서 겸손한 인간의 애원이 절실히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똑 같은 인간 맥아더는 중국 본토의 여러 도시에 핵폭탄을 사용할 것을 여러 차례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파면되었다. 당시 그의 핵투하 주장 또한 기도문을 만들던 것과 같은 심성에서 나왔을 것이다.
한 생명을 위한 더할나와이 없는 진지함과 수백만의 목숨을 끊는 단호한 결정과의 모순은 없었을까?

이러한 모순은 2차대전을 통해 절대강자로 올라선 미국사회 전반이 고스란히 안고 있었던 것이다. 밋밋한 사진 한장이 이런 복합적인 문제까지 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모순에의 탐구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지게 된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사회가 벌인 전쟁 중에서 국민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했던 최초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2차대전이나 한국전쟁에 관한 보도가 일방적인 자국민 중심의 것이었다면 베트남전쟁이나 그 이후의 전쟁들에 대해서는 자기비판적인 보도가 병행해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피난민이나 참전군인들의 고충에 대한 사진은 이전의 전쟁과 다들바 없지만 여기에 더해서 보도는 전쟁터보다는 홍역을 앓고 있는 국내의 사회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 당시는 직접 전쟁에 참전해야하는 젊은 대학생들의 반발이 가장 강했다. 사진에 나온 코넬대의 시위대는 직접 총을 들고 농성에 들어갔고 또 다른 사진에서는 켄트대에서는 군인들이 직접 총을 쏘아 4명의 시위대가 사망하는 사건이 담겨있다.

반면 전쟁에서 돌아온 귀향군인들의 아픔도 적지 않았다. 기념일에 쓿쓿이 앉아있는 한 흑인 부상병의 모습도 애처롭고 더해서 한 귀향군인과 가족에 대한 사진이 무척 인상적이다. 정복을 입고 걸어오는 귀향포로를 맞이하기위해 가족이 환한 표정으로 뛰어오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 실은 매우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다. 무려 5년 동안 고된 포로 생활을 했고 그 사이 가정은 아내의 불륜으로 파탄직전에 놓여 있었던 상태에서 누가 얼굴을 활짝 필수있을까? 기껏해야 <25시>에 나오는 안쏘니 퀸의 얼굴 정도가 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작가는 그의 얼굴을 가린채 뒤에서 앵글을 잡게되었고 결국 환히 웃는 가족들의 모습만 보도되었다.

이 당시 클린턴은 교묘한 수단으로 ROTC 징집을 기피하였고 나중에 대통령 선거 당시 크게 논란이 되었다. 원래 미국사람들은 세금을 빼먹거나 병역의무를 기피했다고 하면 무조건 탈락시키는 것이 투표관행이었다. 하지만 이 때 클린턴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투표성향을 보였던 것은 매우 이례적인 행동으로 이를 통해 우리가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사회의 사후평가를 알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클린턴이 보여준 이중적인 태도는 통치기간 중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임기 초반에 소말리아의 내전을 해결하고자 직접 투입했던 군부대가 공격을 받아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때 소말리아의 성난 군중들은 미군시체를 줄에 묶어 거리를 끌고 다녔는데 이 장면을 잡은 사진이 크게 보도되었다. 자기는 베트남에 나가지 않아놓고 마찬가지로 그리 큰 명분이 없는 전쟁에 젊은이들을 내보내는 행동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 것은 물론이다. 결국 이 보도는 미군의 조기철수를 유도해내었다.
얼마전 프랑스 외인부대에 대한 특집기사가 <한겨레21>에 실린적이 있다. 프랑스 같은 선진국이 굳이 외인부대를 두는 이유도 국내여론과 무관하게 위험지역에 군사적 개입을 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베트남전에 대한 긴 보도가 만들어내는 논란과 더불어 미국의 국내문제도 많은 양의 사진과 보도, 논란을 만들어내었다. 특히 흑백차별은 미국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퓰리처상도 여기에 대해서 적지 않은 할애가 있었다. 시작은 법률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는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흑인미식축구 선수가 경기장에서 의도적인 폭력으로 불구가 되는 모습을 드러낸 사진이 첫작품이고 조금 지나면 흑백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도보행진을 하던 흑인젊은이가 거리에서 총을 맞는 모습이 그 다음이었다. 미시시피 주 최초의 흑인대학생이었다는 이 젊은이는 비록 쓰러져서 계속 걸음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그가 내딛은 첫발은 곧 마르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수많은 인권운동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었다. 부당한 차별에 대한 저항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백인사회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백인들은 자신의 피부색말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차별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학교가는 버스에 흑백 어린이들을 같이 태우자는 정부의 결정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경찰이 직접 개입해서야 질서가 잡혔지만 전국 어느 곳에서나 흑과백 사이의 긴장은 이어졌다. 보스톤에서 발생한 한 흑인 변호사에 대한 백인들의 집단린치를 담은 사진은 이런 단면을 잘 드러내 준 작품이었다. 특히 손에 자유를 상징하는 성조기가 달린 깃대로 흑인에게 폭행을 가하는 백인 젊은이의 모습은 뭔가 묘한 모순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투쟁은 순교자를 만들기 마련이다. 루터킹 목사의 장례식에 대한 사진을 통해 우리는 흑인들이 분노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같은 의지를 보게된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통해 사회는 한발씩 움직여간다. 서구사회는 개인대 개인의 문제를 약속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계약을 통해 해결해나간다. 기독교의 모태가 되는 유태교에서도 신과 인간의 관계가 일방통행적인 아니었으니까 이런 방식의 해결은 꽤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들을 통해 계속 차별을 금지하는 정책들이 정당성을 갖게되면서 미국사회는 오늘의 모습으로 변화해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흑과백의 문제 말고도 소외와 가난에 대한 보도도 제법 많았다.
한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여자 노동자의 지친 모습은 아무리 일해도 그날의 삶을 연명하는 것이외에 돌아오는 것 없는 애처로운 장면이다. 그럼에도 기회의 땅 미국으로 넘어오기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는 멕시코 노동자의 모습은 묘한 대조를 보여준다.
장면이 조금 바뀌어 필라델피아의 홈리스(집없는 사람들)들이 사진에 나온다. 한남자가 따뜻한 가게안에서 식사를 하다가 창밖을 보니 길거리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앉아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 창을 사이에 놓고 서로 마주치는 두사람의 시선을 보면서 묘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외에도 값싼 마약에 푹빠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진도 사회적으로 마약퇴치 운동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보도는 종종 윤리의 문제를 야기시키곤 한다.
수단의 기아를 다룬 사진 중에 인상적인 것으로 굶주린 어린아이가 쓰러지려 하는 것을 한발짝 떨어진 곳에서 대머리 독수리가 기다리는 장면이었다. 작가는 사진 촬영을 하고 아이를 구했다고 한다. 이때 보다 극적인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일정 시간을 지체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아이를 구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나 하는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여류 사진작가였던 당시 수상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비슷한 우려가 드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쿠데타와 혁명에 대한 보도다. 보통 이런 보도사진에 담긴 처형장면들은 대부분 이를 자행하는 사람들의 야만성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전쟁이 두 주체가 맞서서 치열하게 싸우는 공간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양쪽 모두에게서 저질러질 수 있는 폭력을 어느 한쪽의 것만 끄집어내 공개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될수 있을 것이다. 이란혁명 이나 엘살바도르 등에 대한 보도들은 이런 우려를 가지게 만든다.

미국적인 관행 덕분에 사진 중에서 유럽에 대한 것은 거의 없었다.
뚱뚱한 옐친이 락밴드와 같이 춤추면서 지어낸 듯한 웃음을 보이는 것이나 무너진 동상에 모여있는 동구권 사람들의 모습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작가들 중에 아마추어도 꽤 많았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고 꼭 전문가들에게만 이를 포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 중에 일본 사람이 몇 있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자기 나라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보도 이외에도 멀리 베트남의 밀림을 누비다가 포화의 와중에서 희생되었던 작가도 있었다 한다. 물론 한국사람은 없다. 오랜 식민지 생활에 눌려있다 잘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한민족에게는 아직 세계인들의 보편적 가치에 호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만한 여유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여기 나왔던 작품들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에는 역시 영화라는 텍스트가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올리버 스톤이 만들어낸 일련의 작품들은 사진이 가진 한사람의 시각이라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것이다. 다른 작품을 젖혀놓고도 최소한 <7월4일생>과 <살바도르>, <하늘과 땅>은 꼭 보아야할 작품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진들이 담고 있는 갈등, 생각, 욕망들이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포드사의 노동자가 두들겨 맞는 장면이 노사정위원회가 깨져나가려는 지금 이순간의 우리사회와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닐것이다. 흑백의 처절한 갈등도 외면적인 봉합으로 이끌어내는 미국인들의 정치기술은 동서간의 치열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민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동서화합도 못하고 남북통일을 꿈꾼다는 것이 우스운 것처럼 남과북이 함께하지 않고서야 공멸을 맞을 것이라는 것도 자명한 이치다. 그런 상념들을 안고서 천천히 전시장에서 발길을 돌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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