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이라는 정치 경제 공동체를 만들면서 벌어진 일 중의 하나에 각국의 역사학자들을 한데 모아 공동의 역사책을 만드는 작업이 있었다. 한 민족에게 영광을 안겨준 영웅이 다른 민족에게는 잊기 어려운 고통을 남겨준 침략자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시각의 불일치를 하나씩 교정해가면서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자는 것이 이 작업의 취지였다. 이제 한반도에서 열리고 있는 남북화해의 시대에도 그런 교정작업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현실을 지켜보는 중이라 유럽사회의 이와 같은 노력은 꽤 부러운 일이다.
그런 역사적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간에는 꽤 오랫동안 대립되어오던 해석의 문제 하나가 남아있다. 바로 잔다르크라는 여인이 만들어간 역사적 행위에 대한 부분이다.

잔다르크의 행위를 그냥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쭉 추적해본다면 사실들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한적한 농촌에서 평범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고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읽고 쓸 줄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무척 특이한 종교적 체험이 있었다.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으며 왕태자와 국민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왕태자가 머무르는 곳으로 왔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영국의 왕은 자신에게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며 프랑스에 들어와 파리 등 여러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군림하였다. 귀족이나 왕가의 결혼에 의해 국경의 모양새가 바뀌는 당시 풍토에서 이런 주장이 그리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었다. 원래 영국의 당시 왕가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 머물던 군사집단이 건너가서 정복을 해 세웠던 관계로 두 나라 사이에는 복잡한 영토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섬나라에서는 왕노릇하지만 바다 건너로는 신하의 모습을 하는 이중적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백년전쟁은 이런 식으로 왕과 왕의 부자연스럽고 긴장하던 관계를 가지던 양측이 결국은 무력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바다를 건너온 영국군은 숫자로도 1만5천 내외의 그리 많지 않은 수준이었고 출신도 대부분 기사의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경멸스러운 농부들이 많았다. 몇백년 전에는 프랑스의 기사들이 바다 건너가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했기에 귀족들이 가소롭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여전히 갑옷입고 말탄 기사들은 용감하고 충실히 싸웠지만 전쟁의 양상은 무척 바뀌었다. 영국의 시골 농부들에게 장궁이라는 무기를 쥐어주어 맨 앞의 대열에 배치했는데 이들은 150M 정도의 거리에서 자신에게 돌격해오는 기사들의 값비싼 갑옷을 꿰뚫어버렸다. 당시에 기사 하나를 완전히 무장시키기 위해서는 수십 마리의 말에 해당하는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귀한 존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땀흘려 농사짓는 농노의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게 바로 중세의 봉건사회였는데 이제 그런 귀한 존재들이 천하디 천한 농노 출신들이 날리는 화살에 마구 거꾸러지는 것이다. 도저히 체면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라 기사들은 분개했고 계속 더 큰 용기를 내어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전투 마다 많을 때는 1만명에 달하는 프랑스 군이 무모한 돌격으로 희생되었지만 전술을 바꾸는 지혜를 발휘한 것은 한참뒤였다.
하지만 영국군도 약점이 있었다. 영국이 원래 가난했고 군주의 권력이 강하지 못했기에 본국으로부터 충분한 보급을 받아서 전쟁을 유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원래 출신들이 농부였기에 정복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무차별적으로 약탈을 하고 다녔다. 그 장면의 하나가 바로 영화 처음에 나오는 잔다르크 마을의 학살이었다. 덕분에 농민들은 영국군이라면 이를 갈았고 종종 힘을 합쳐 봉기해가지고 후방을 습격했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용맹을 발휘할 공간과 정복자의 권리행사 정도로만 간주했던 당시의 한계였다. 그래서 영국군도 프랑스의 기사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농부들과 겨루고 싶지는 않았기에 물건을 빼앗는 자는 죽인다는 강력한 군율을 내세워서야 간신히 통제를 할 수 있었지만 이건 전쟁의 거의 막바지 이야기였다.

당시의 시대가 마지막 십자군 전쟁의 열광이 끝난지 얼마되지도 않았기에 사회는 종교적 분위기가 꽤 강했다. 물론 이런 열광은 종종 토속적인 미신과 혼합되어 기복적인 성격을 띄는 경우가 많았기에 여기저기서는 마녀사냥이 성행했고 교회는 이단 논쟁도 쉬지 않고 이어갔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그려내는 세계를 생각해보면 이 시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잔다르크가 처음 왕태자를 만나게 된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당시 궁정의 지도부는 백성들이 기적을 기대하는 분위기를 고려해 평시라면 있기 어려운 잔다르크의 접견 의뢰를 받아들였다. 당시 프랑스에게는 실은 상대를 물리칠 잠재력은 충분히 있었다. 전술적인 교정과 함께 새로운 군사들을 무장시켜 영국과 비슷한 방식의 싸움을 전개하며 상대의 보급을 끊는다면 본거지에서의 싸움은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도부의 자신감의 부족이었다.
당시 왕태자의 아버지 샤를 6세는 정신병자였고 어머니는 미모였지만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일반국민이나 왕태자 주변에서는 그가 정말 아버지의 아들인지를 의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와중에 이 여인은 어느날 본인의 입으로 왕태자는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공개적인 선언을 해버렸다. 사정이 이러하니 왕태자 자신도 항상 출신에 대해서 자신 없어 할 수 밖에 없었고 왕위를 둘러싼 피비린내나는 싸움에 별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잔다르크가 보인 몇가지 신기한 일도 인상적이다. 군중속에서 왕을 알아본 것이나 곧장 달려가 신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놀랍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궁정 카톨릭 사제들과의 논쟁이었다. 지식의 많고 적음을 놓고 씨름을 하려는 유식한 분들이 계속 무엇인가 놀라운 징표를 보여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여기에 대해 잔다르크는 딱 잘라서 “왜 내가 험난한 적진을 뚫고 무사히 이곳까지 온 것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유식한 여러분들은 왜 오를레앙의 시민들이 받는 고통을 외면한채 편안히 호의 호식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라는 답변을 던져버린다. 이는 예수가 당대의 바리새인들에게 대하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신앙을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형식으로 계속 이끌어던 제도권 교회에 대해서 내면의 믿음을 더욱 강조하며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개혁자의 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든 잔다르크는 오를레앙의 싸움터로 나간다. 당시 이 도시는 군주가 이미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는데 중세에는 이런 행위는 매우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포위전 또한 매우 치열했지만 왕태자는 그동안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벌인 잔다르크의 활약은 매우 대단했다. 영화는 그런 전투장면을 다양하게 재현시킨다. 여러 차례 놀라운 예지를 발휘하며 처음에는 시종 회의적이던 지휘관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며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덕분인지 요즈음 전쟁영화는 무척 사실적으로 바꿔 말하면 여과없이 잔인한 장면들을 내보인다. 목이 날라가고 팔이 잘리고 돌을 맞아 으깨지는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의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진 유머스러운 장면도 하나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긴팔을 가지고 있는 무기가 나온다. 트레부쉐라고 불리우는 이 무기는 성을 향해 돌을 날리는 도구로 긴팔만큼이나 꽤 먼 거리를 공격할 수 있다. 여기서 날라오는 돌을 지켜보던 성주의 부하가 돌이 날라옵니다, 그래 어디냐, 바로 여기요라고 말하는동안 벌써 돌은 성주의 머리 위 벽을 무너뜨린다. 한국의 어느 지방에서 “아버지 돌 굴러와유”하고 느릿 느릿 말하는 습성을 농담으로 만든 것들과 엇비슷하다.

오를레앙의 승리 다음으로는 내친김에 아예 랭스까지 손에 넣었다. 이 곳의 성당은 원래 대대로 카톨릭 교회가 프랑스의 왕들의 대관식을 거행하던 장소다. 그래서 더욱 정통성 싸움을 놓고 중요한 공간이 된 것이다.
여기서 성유가 들었던 병이 비자 자기 화장품에서 꺼내어 채우는 왕비의 말과 행동을 눈여겨보자 나중에 잔다르크를 사로잡은 부르군드 공도 자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당시 사회는 벌써 십자군 전쟁의 패배 후유증과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신의 지배를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달랐다.
겉으로 보면 무척 약해서 칼든 군인들에게 끌려가던 사제들도 대관식을 이끌어가는 모습은 무척 화려했다. 정말로 신이 그자리에서 왕을 축복하듯이 보였고 왕을 따라 여기까지 왔던 많은 신하들에게도 같은 감정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왕을 왕답게 만들었다면 이제 잔다르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물론 영국군을 남김없이 몰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중간 목적지까지 올라선 왕은 좀 더 차분하게 전쟁을 수행해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잔다르크를 계속 군사적인 영웅으로 만들 경우 발생할 사태 또한 염려했다. 그래서 더 이상 잔다르크에게 많은 군사를 주지 않았고 결과는 패배였으며 최종적으로는 잔다르크가 포로로 잡히게 된다.
잔다르크 자신도 이런 운명을 알았다고 전해진다. 항상 나에게는 수명이 일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다녔고 그래서 더욱 자신의 할일을 서둘렀다.
잔다르크를 잡아들인 부르군드 공은 꽤 많은 돈을 받고 그녀를 영국군에게 넘겨주었다. 이 과정에서 샤를 왕은 오늘의 자신을 있게 만들어준 잔다르크를 구하는데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대목에서 “배은망덕을 왕자들은 미덕으로 여겼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어쨌든 성녀인가 마녀인가를 놓고 재판을 벌이려는 영국군의 의도는 명백했다. 상대편에게 성녀가 있다면 자신들이 악마의 군대가 되기 때문에 이 싸움은 더 이상 끌어가기 힘들것이었다. 그렇지만 재판은 무척 길었다. 교육도 받은 바 없는 어린 처녀가 교회의 유식한 심문관들을 상대로 한 문답에서 놀라운 답변들을 하는 것에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일부 내용들이 나오지만 즉흥적인 답변을 그렇게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한번 예수가 수많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 보여주었던 놀라운 지혜가 보이는 듯 했다.
어쨌든 결론은 심문관들의 트릭속에서 잔다르크는 한번 자신을 유죄라고 시인하고 목숨을 구원받았다가 다음날 이를 철회한다. 그리고 화형에 처해진다. 이 장면은 아주 짧고 간략하게 영상처리된다.
잔다르크가 죽고나서도 전쟁은 계속 되었다. 많은 전쟁영웅들이 나타나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은 무엇보다 잔다르크의 선행 행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년 남짓의 활동만으로도 그녀는 역사의 진로에 커다란 변화를 주는 엄청난 기적을 발휘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왜 이렇게 기적이 없습니까”하고 묻는 사람에게 카톨릭의 신부는 “겸손히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에게 결코 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잔다르크가 들은 목소리가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왔는지를 과학으로 입증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여지는 것만 믿으려 하는 현실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이루어낸 일을 부정하며 역사를 바라볼 수는 없다.
만약 그녀가 평범한 농부의 딸로 돌아가 여생을 다 보내고 행복하게 마무리했다면 후대인들이 그녀를 아쉬워했을까 생각해보자. 거기에 죽음이 있었기에 그 삶이 더 극적인 것 아니었을까? 결국 예수, 베드로, 바울이 걸어갔던 순교자의 길을 다시 한번 발견했기에 인상적인 것이다. 보이는 대로 믿는답시고 이들을 목수, 어부, 무두질쟁이라고만 보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마찬가지로 잔다르크를 농부의 딸로만 보려한다면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역사속에서 자기 확신을 가진 존재가 얼마나 위대해지는가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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