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계 色戒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장소는 채석장의 깊은 골짜기이고 그 앞 여러 남녀 청년들이 꿇어 앉혀져 있다. 총을 겨눈 병사들이 등 뒤에 보이고 구제될 길이 없어 보인다. 이들 청년들이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되는 죄목은 애국 애족 바꾸어 말하면 일본과 괴뢰 정부에 반했다는 것이다. 관객의 한명으로서 청년들을 보면서 안타까움, 동정, 애처로움 등의 감정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복합되어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묻게 된다. 저들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저들의 짧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色이란 말과 戒란 말은 왜 쓰이고 있는 것일까? 사람의 목숨을 걸게 하는 거창한 미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적 배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의 시각으로 보면 선과 악은 단호히 나뉘어진다. 1930년 전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여 무단 점거하였고 이들에 빌 붙은 친일 매국노, 소위 한간들에 대해 중국의 대중들이 느끼는 분노는 매우 컸다. 후일 남경 대학살로 대표되는 전쟁 중 일본의 악행 이전에도 일본은 여러가지 잔혹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고 중국 대중들은 끊임 없이 반감을 키워갔다. 중국으로서는 수천 년간 동아시아라는 세계에서 유력한 중심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최근 몇십년 사이에 급히 서구화되었다고 뿌듯해 하며 자신들을 따르라고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는 일본의 모습이 아니꼬 왔다. 중국을 대 놓고 착취하는 모습에 더 더욱 분노를 가졌는데 한 예로 일본에 유학 왔던 의학도 노신은 영화관에서 일본인이 중국인을 목 베는 장면을 보고 공부를 때려쳐버렸다. 이런 시대 환경에서 뜻을 품은 청년이었던 영화속 주인공들은 당대의 부정과 불평등을 보면서 가만히 책상에 머무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대학생의 신분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 사회 참여를 결심했다. 출신과 배경은 달라도 그들은 연극을 하면서 항일정신을 고취하다가 그 의지를 무대에서만 머물게 하지 않았다. 연극속의 시나리오가 그대로 삶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덕분에 우연히 마련된 계기에 직접 한간을 처단하려고 나섰지만 현실에서의 싸움은 아마추어의 솜씨로 바로 끝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계획의 중심에는 저격의 대상이 될 남자를 유혹하는 막부인 바로 탕웨이가 놓이게 된다. 첫번째 시도에서 꽤 성공에 근접했지만 결과는 아쉽게도 실패였다. 시간은 흘러 이(양조위)는 더욱 승진했고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른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지 않기 때문에 더 더욱 의심이 많아진 인간 李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연극은 필수였다. 그 주역으로 탕웨이가 다시 한번 선택되었다. 그녀의 마음은 처음 올곧게 출발했지만 수년에 걸친 오랜 투쟁은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시 한번 의무를 떠안게 되었는데 상대의 성장 만큼이나 과제의 난이도도 올라갔고 길어질수록 마음의 동요도 커져간다. 주인공으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그녀는 연극을 해야 하는데 그 연극에 몰입할수록 진실은 모호해진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다다르게 되면 자신의 연극에 감동한 양조위의 사랑에 스스로 빠져버려서 임무를 놓쳐버린다. 탕웨이 입장에서 진실은 사랑에 있는지, 임무에 있는지 모호해져버렸고 또 양조위의 경우도 사랑이 무엇인지 임무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되어버렸다. 원래 연극은 인생에서 나왔다. 모방을 통해 생의 가치를 찾아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거꾸로 말해 인생 또한 하나의 연극이고 세상 자체도 하나의 무대로 간주될 수 있다. 극에 참여하는 배우들은 삶과 극 둘 사이에서 이중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면 그 중 어느 쪽이 진실일까? 이쪽일까 아니면 저쪽일까? 우리를 궁금하게 한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꾸준하게 보여주는 것은 삶에서 진실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먼저 주인공 남자들이 탕웨이에게 당당하게 외치는 약속들은 대부분은 지켜지지 않았다. 혁명가들이 탕웨이에게 “너에게 절대 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또 일이 잘 풀리면 영국으로 보내준다고 호언장담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탕웨이가 아버지에게 보내달라는 편지조차 즉석에서 태워버리고 모른체 해버린다. 공작의 대상이었던 李는 또 어떠한가?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누가 해치려고 하면 내가 지켜주겠다”라는 더 할 나위 없는 약속을 하지만 죽음의 위기에 놓인 탕웨이에게는 그냥 공염불이 된다 이렇게 속고 속이는 세상속에서 무엇이 진실이였을까? 마치 장자가 꾼 꿈처럼 나비가 인간이 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나비가 된 것인지 모호할 따름이다. 오히려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색의 영역들이다. 두 주인공이 색에 몰두했을 때 서로는 서로를 더 깊이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를 탕웨이는 마음을 파고들어 어찌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순간이지만 그런 색은 점점 서로를 동화시키는데 그 감정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색이라는 상징은 넓게 보면 밥과도 통한다. 모든 인간은 먹어야 살고 아름다움을 보면 감탄하고 자기 짝을 찾아나가는 공통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굳이 비율로 표시하자면 인간은 99%는 비슷한 존재다. 아주 약간 아주 미세한 수준에서 서로 차이가 날 뿐이다. 이념은 그 약간의 차이를 더욱 크게 벌어지도록 만들어 놓는다. 특정한 공간,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다름을 확인하고 치열하게 갈등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멀어지고 공간이 떨어진 상태에서 그들의 갈등을 쳐다본다면 과연 그만큼 커다란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마 의외로 그 차이를 크게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수백년전에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싸웠던 서구인들이나 동서 분당으로 쟁투하였던 조선의 당인들, 멀리 멀리 이슬람과 기독교를 놓고 싸웠던 싸움들의 차이를 제대로 구별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시간을 많이 많이 흘려보낼수록 차이에 대해 적게 느끼게 된다. 윤봉길 의사는 딱 24년 6개월을 살다가 떠나갔다. 아마 자폭까지 감행하는 테러리스트에 40대 이상 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목숨을 거는 일 자체가 젊음의 권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공과 실패에 대해 큰 차이를 두기도 어렵다. 성공해서 이름을 오래 오래 남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더 추앙 받아야 할까? 그러면 반대로 폭탄 투척에 실패한 이봉창 의사라고 덜 추앙 받아야 할까? 관객으로서 아주 멀리서 떨어져 쳐다보면 그 차이는 실제로는 그렇게 크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시점을 지구 저 멀리로 옮겨 버리면 이편이던 저편이던 그 차이보다 인간 그 자체의 모습이 나올 것이다. 그 보다 똑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점에서의 색이 더 공통점으로 부각될 것이다. 보통 사람의 차이는 순간에 나타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이념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색은 戒의 대상이다. 마치 움베르코 에코의 걸작 <장미의 이름>에서 웃음을 경계해서 연쇄 살인이 일어 나듯이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아도 혁명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긴장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한다. 이 영화를 보고 중국정부가 상영 금지를 시켰다는데 충분히 이해가 간다. 혁명열사를 모독했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거창했다. 왜냐하면 중국정부는 바로 이념의 토대 위에서 무수한 인간의 피에 의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념을 비웃는 듯한 색을 강조하는 영화라면 체제를 위협한다고 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실일까? 중국 자체가 이미 등소평의 개혁개방을 통해 색의 시대로 들어와버린 상황에서 진실을 고집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인간은 순간적으로는 이념에 경도되어 진실을 그 안에서 머물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크게 보면 보다 큰 진리가 우리를 죄어온다. 인간이 먹고 싸고 놀아야 하는 매우 비속한 존재라는 진리 말이다. 또 그렇다고 진실에 푹 빠져 목숨을 걸었던 젊은 영혼들을 모독할 수는 없다. 세상은 그런 모험가들에 의해서만 한 단계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상을 향해 달려간 존재를 영웅으로 떠 받들어 이상화하지만 모두 다 영웅이 될 수 없다는 점도 엄연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