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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현의 노래
서기 500년 이후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끊이는 날이 드물었다. 각기 구석에서 한반도를 나누던 여러 나라들이 이제 직접 힘을 다해 부딪혀간다.
그 근저에는 철기술의 발달이 있었다. 특히 철기술의 발달은 소를 이용한 밭갈이에도 힘을 보탰다.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땅 속 깊이 파들어가는 우경牛耕의 도입은 땅에서의 생산을 늘렸다. 늘어난 곡식은 더 많은 사람을 먹이고 특히 생산 없이는 만들어 질 수 없는 군사의 숫자를 늘렸다.
국가란 원래 제사의 공동체로서 그 안전은 무기에 의해 보장되어진다.
가야 철기술의 상징은 야장 야로가 맡고 있다. 오랜 전통을 가진 기술로 그는 무기를 만들었는데 현대의 무기상처럼 양편을 왔다 갔다 한다. 그의 손에 의해 한층 발전된 무기에 의해 전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덕분에 이곳 저곳에서 소리가 난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그 쇠에 의해 병사들의 군장이 점점 무거워지고 군장들은 서로 서로를 겨누며 소리를 낸다. 사람이 쇠에 부딪혀 지르는 외마디 비명은 다시 지른 이의 가슴에 꽃히는 날카로운 칼날에 의해 잠재워진다.
철제 무기는 계속 다듬어져 갔다. 원래 가야의 철기술은 놀라운 수준이어서 멀리 일본에까지 인기를 끌었다. 근본은 지상에서 바로 캘 수 있는 노출된 철광이 가야 땅에 존재 한 덕분이었다.
가야 연합을 이룬 소국가들은 철의 힘을 기초로 성립되었고 번성하였다.
그들의 위세는 거대한 봉분에 나타난다.
많은 백성을 동원해 만들어진 어마어마하게 큰 봉분을 보면 자체로도 놀라게 된다. 더욱 놀라게 되는 그 안에서 벌어진 순장이었다. 때는 사람의 목숨의 가치가 서로 다른 세상이었다.
선민들은 각종 설화를 만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있었다 혹은 바다 건너온 귀한 천손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다른 존재라는 우월성을 부각시켰다.
핏줄의 구분은 매우 중요했기에 김춘추의 아이를 밴 동생을 보다 못해 김유신은 불태워죽이겠다고 시위를 벌인다. 6두품에 머무는 한을 못 이겨 최치원은 속세를 떠나 선계를 찾아나선다.
어쨌든 그렇게 고귀한 피를 가진 왕후장상은 높은 존재였고 그들에게 피정복된 땅의 백성들은 가벼운 존재였다. 심지어 왕의 죽음에까지 동참하는 순장에 뽑힘도 영광으로 여기고 감사해야만 하는 가볍디 가벼운 깃털 같은 존재였다.
가야 궁정의 왕은 곧 죽음을 맞게 된다. 천손이든 왕이든 이데올로기가 담긴 말은 싫다. 자세히 들어다보면 세포의 재생 기능도 사라져 하나 하나 죽어가는 검은 피부의 노인이요 그 역한 냄새는 가까운 자손도 다가가기 어렵게 한다. 몸 아래 구멍으로 때를 가리지 않고 나오는 오물은 또 무엇이냐?
그 노인은 이제 신성한 행위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바로 거대한 무덤에 묻히고 철을 깔고 눕고 옆에 산 백성을 두는 것이다. 저 세상에서도 오래 오래 지상의 영광을 누리려는 욕망의 모습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불로장생의 꿈을 가졌던 군주에 대해 차가운 비판이 겨누어진다. 진을 세우고 망하게 한 진시황은 물론이야 당대 자신의 생사여탈을 쥐었던 한무제에 대해서도 헛된 욕망에 의해 백성이 질 수 밖에 없던 고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여기 김훈의 손에 의해 묘사된 당대 가야 백성의 모습 또한 엇비슷하다. 무덤에 들어가는 힘 없는 민초들이 마지막으로 내는 소리는 제관들에게는 불경의 소리다. 더구나 부모와 함꼐 가는 갓 태어난 아이라면 어떨까? 소리가 밖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고장 사람들의 마음도 함꼐 울린다. 그 소리를 마음에 느끼고 달래기 위해 나누는 현의 소리는 어떠할까? 마음 깊이 품었던 연민, 몸의 애욕을 나눈 정인을 잃음에 따른 상실감, 왕의 배려에 대한 아쉬움 모든 것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소리는 애잔하다.
이제 국경 곳곳은 무너져 내려 간다. 신라는 교묘하게 밀어 들어 온다. 한편으로는 화친을 내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비로 기회를 잡아 고을을 접수해간다. 그렇게 강역이 좁혀질수록 예법에 대해 강조하려고 들지만 이는 헛발질이다. 신라의 지증왕은 벌써 한참 전에 순장을 금했고 우경을 도입하는 개혁을 이루어냈다. 황남대총에 놓인 황금관과 순장의 모습은 이제 옛 모습이 되어가고 아낀 민력으로 키워낸 군사들이 모여지고 있다.
신라의 행태는 냉혹한 국제 관계 및 정치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 땅을 빼앗더니 갑자기 돌변해 백제의 땅까지 마저 먹어들어간다. 가야와 국혼을 하더니 삽시간에 가야땅으로 밀고 온다.
싸움은 피로 땅을 적시게 한다. 힘이 부치게 되면 싸움은 잦아들지만 반대편에서 소리는 길게 남는다. 우륵은 바로 그 소리의 보전자였다. 위로는 왕의 소리에서 아래로는 무덤의 소리까지 고루 담았다. 특히 봉분을 여인의 젖가슴으로 비유하고 떄로는 가랑이 사이에서 나오는 쉿 소리까지 잘 새겨들었다. 여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가랑이에서 힘을 주어 아이를 만들지는 못하는 것인가? 그 아이에 의해 다시 삶이 이어져 감이야말로 소중함일지다. 어찌 차가운 무덤 한 구석에 몸을 놓아야 할 당위성이 있단 말인가?
고을은 고을대로 이어져간다. 군주가 짓밟혀도 고을은 이어져간다. 그것이 생명력이다.
하지만 군주의 후손에게는 그런 여유로운 허락이 주어지지 않는다.
월광이라는 인물은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아비의 나라 가야에 어미의 나라 신라의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지만 결국 포로의 신세가 되어 승려로서 세상을 등지게 된 망국의 왕자였다.
월광이 마지막으로 들어서게 된 공간은 절이었다.
절은 부처의 공간이다. 부처는 깨달음을 세상에 나누었다. 인간은 끝없이 윤회한다고. 오늘의 왕후장상이 다음 생에서는 천민의 자리에 놓일수도 있고 심지어 인간의 틀을 벗어나 버러지로 날수도 있다고 한다.
나만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다가 이제는 가까이 있는 모든 것에 겸손을 가지게 된다. 선조들이자신만을 위해 거대한 봉분 쌓고 순장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음인지 알게 되고 그 업보가 오늘의 가야땅의 몰락인 것을 깨닫게 되어간다. 이제 월광은 죽음을 어리석음을 따라가야만 했던 소리 없던 죽음을 위무한다.
이제 인간은 서로를 좀 더 존중하며 사는 세상으로 넘어갔고 그것이 진보요 발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