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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칼의 노래
여기 역사적 장면이 하나 있다. 양측에서 서로 사나운 군대가 나와서 서로 기싸움을 다하다가 힘을 다해 부딪혀 승패가 갈린다. 산자는 살고 죽은자는 주검으로 남는다. 그의 머리는 잘리우거나 코가 떨어져 상대의 전리품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긴 하루가 끝나고 나면 산자들은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면서 불운 한 자기편을 애도하고 다시 주린배를 채우며 쓴 술로 고단한 하루를 마감한다. 오딧세이의 부하들이 한 번의 고비를 넘길 때 마다 슬퍼하다가 잠이 들 듯이 말이다. 싸움의 승패는 싸움 중간에도 알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지를 고민하지는 않느다. 그냥 오늘 하루 살아남기만을 바라고 눈 앞의 적에게 무기를 휘두를 따름이다.
그들의 하루가 세월의 파도를 맞다가 속에 담긴 빛을 발하여 역사의 한장을 장식하게 만드는 것은 먼 후대 사람들의 일이다.
가까이서 보면 전쟁이란 그냥 죽고 죽이는 사람들의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라쇼몽에 나온 싸움이 실제로는 화려하고 엄숙한 결투가 아니라 개싸움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전쟁의 장면을 색다른 각도로 접근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던 영화가 있다.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작품이 바로 그 것이다. 살점이 툭 튀어나가고 서 있던 사람이 주검이 되고 어디에도 총알을 피할 구석이 안보이는 그런 공간으로 관객이 뛰어들게 되면 갑자기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어진다. 우리가 보려고 했던 것은 패튼의 대전차군단이 행군하는 모습이었는데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런 전쟁은 사실 멀리서 롱샷으로 바라볼 때만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거기다가 스필버그는 하나의 주석을 더 붙여준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면 소년병을 마구 학살하는 모습 포로의 생명을 아무렇게나 다루는 미군의 모습을 잘 드러내준다. 실제 전쟁은 절대로 절대로 아름답지 않고 선악의 구분 또한 결코 쉽지 않다. 그저 살아가야 한다는 생물체로서 각자가 가지는 숙명 내지 자연의 법칙이 지배적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김훈이 그려낸 임진란 동안의 조선반도도 유사한 상황이었다. 전쟁영웅은 먼 훗날 그가 모든 전쟁을 이기고 아름답게 죽고 난 다음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당대의 이순신은 자신의 령이 지켜지지 않으면 부하 장수든 군사든 백성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죽여야만 하는 그런 잔인한 군신이었을 뿐이다. 바깥에 두려움을 주는데 상대방인 일본까지도 그의 위명에 놀랐던 점은 조선에게는 큰 복이었다. 하지만 부하의 명성이 올라가면 두려움을 겪게 되는 존재들이 있다. 선조와 권율 두 사람이 그런 존재였다. 왜냐고? 역사에 보면 전승의 장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아버린 사례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이성계가 바로 그런 존재 아니었나? 삼국지의 조조를 비롯해 예라면 무수히 나올 것이고 덕분에 임금은 고민에 빠진다. 현대로 온다면 이 원리는 피터의 법칙이라고 해서 자신 보다 유능한 부하를 바로 아래 두지 않는다는 비정한 사회법칙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선조가 이순신 하나만 미워한 것은 아니다. 명나라에게 급히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이 오자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 빨리 공리공론인 성리학을 때려치우고 실용적인 양명학을 배우라고 사상교육을 시킨다. 하지만 선조는 완강히 거부해서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든다. 다음으로 그들은 차라리 이 참에 무능한 선조 대신에 유능한 아들 광해군을 세우자고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이제 선조는 한때 분조를 이끌며 백성을 회유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광해군을 주적으로 경계하기에 이른다.
왕이란 국가의 수장이기 이전에 가문의 대표다. 일족에게 영달을 제공하고 조상이 만들어준 자산인 국가를 지키는 왕조의 책임자다. 그러기에 모두를 의심하면서라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그의 기본 존재의의를 나타내준다.
그런 왕에 비해서 백성들은 어떠한 존재인가? 백성들 하나 하나가 자신의 생명 그리고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가장 먼저 걱정한다고 꼭 비난해야 만 할까? 배 하나에 쌀 몇섬을 훔쳐 딸을 떠나보내려다가 적발되어 목숨을 차례로 잃게 되는 사공의 항변은 어떠한가? 나라 배를 훔쳤다고 질책하는 군인들에게 그 배가 원래 소인의 것으로 나라님에게 잠시 빌려 드린 것입니다라는 그의 목소리를 과연 도덕으로 법으로 권위로 냉정히 처벌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잠시 장자의 이야기 중 한 대목을 끄집어내보자. 나무 하나가 못 생겼고 쓸모 없다고 나뭇꾼이 투덜대었다. 그날 꿈에 나무가 나타나서 너도 하나의 미물이고 피조물인데 어찌 남을 평가하려고 드느냐 내가 오래 오래 존재할 수 있는 큰 이유가 바로 너 같은 인간에게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질책한다.
그날 법은 칼을 든 군관에 의해 시행되지만 그 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제발로 경계를 넘어 일본으로 가겠다면 굳이 막아낼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그 선물로 주변의 정세를 끌고 가든 아니면 지리적 정보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심수관 지금 꽤 유명해진 조선 출신의 도공이 제발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기술자로 일가를 이룰 정도로 대우 받게 되는 사회가 그에게는 더 나은 기회가 될 것이다.
실제 일제 시대 초기에 일본에 협력한 집단은 중인 계층이 많았고 화척과 같은 천민의 경우 일본의 지배를 환영한 측면도 많았다. 영화 청연을 놓고 친일 논쟁이 많았지만 가난한 여자가 최첨단 기술의 비행기까지 탈 수 있었던 것은 근대의 성과였다.
사공의 투덜거림은 측은해 보이는데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그는 다시 나타난다. 소설 남한산성에서 나루를 건네주었다가 곡식 받지 못했다고 혼잣말 주절거리다가 김상헌의 칼에 베어져간다. 그의 사고가 꼭 문제가 되어야 만 할까? 가장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난리통에도 가족을 살리는 것이고 핵심은 곡식을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역사는 승자를 중심으로 기록을 남긴다. 기록을 남기는 자도 지식인이고 기록을 남기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통치행위였다. 하지만 기록에 남지 않은 인생들 특히 이렇게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서 사라져야만 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은 너무나 고달프고 안쓰러운 모습들이었던 것이다.
김훈의 글은 잘 압축되었기에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더욱 높이 사야 할 것은 시야의 현실감으로 보인다.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로 우리를 뛰어들게 만드는 그의 솜씨에 놀라움을 금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