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시비돌이 > 진정한 자유주의자 고종석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고종석 시평집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절판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실망은 - 차라리 환멸은- 한동안 공적 발언에 대한 내 의욕을 납작하게 짓눌렀다. 글쓰기가 내게 허락된 유일한 생업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 키보드를 치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은근히 기대를 걸었던 공인의 정치적 파산은 내게 '사람됨 일반'에 대한 건강한 경계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그는 내게 환멸을 줌으로써 한편으론 은혜를 베푼 셈이다. 불혹지년을 한참 넘겨서, 나는 잠시 무엇에 홀렸었다. -4쪽

그러나 버핏에 대한 이 환호를 '나눔의 방식'에 대한 논점 하나를 흐려버릴 수 있다. 그것은 가난 퇴치가 부자들의 기부를 통해, 그들의 자선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기부에 바탕을 둔 자선사업을 선양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덜 혜택받은 사람들을 일종의 '구걸자'로 만드는 것이다. 자선의 아름다운 손길 뒤에는 음험한 위계 철학이 웅크리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너그러움과 친절에 기대어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부는 '환원'의 대상이 아니라 '분배'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분배의 엔진은 개인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공동체의 법이다. -18쪽

1등과 2등의 능력 차이는 아주 작을 수 있지만, 그들이 받는 보상의 차이는 터무니없이 크다. 그 차이를 줄여 사회 갈등을 눅이는 것이 세법이다.(중략) 버핏이 꿈꾼 '평평한 경기장'은 '부자의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더욱 기울어진 경기장' 보다는 정의로운 경기장이다. 그러나 더 정의로운 경기장은 '서민의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약간 기울어진 경기장'일 것이다. -20쪽

사회당 정권 아래 프랑스에서도 국가의 오른손이 왼손보다 힘이 셌다면, 신자유주의 해일 속에서 허우적대는 지금 한국에 국가의 왼손이 있기나 할까 하는 체념도 엉뚱하진 않다. 그래도 계급적 양극화의 긴장 속에서 경제국가로 치닫는 대한민국의 페이스메이커로서 국가의 왼손 비슷한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일 것이다. -52쪽

자유지상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념적 친화를 뜻하는가? 그럴 리는 없다. 개인의 선택을 절대시하는 자유지상주의와 집단을 물신화하는 국가주의는 물과 기름이다. 그 둘을 동시에 주장한다는 것은, 그 주장이 진심이 아니거나 주장자가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뜻이다.(중략) 이 범우파 블록 안에서 시간은 자유지상주의 편일 것이다. 세계화의 해일은 이내 국가주의자들의 기를 꺾어놓을 것이고, 분열증적 개인들의 내면에서도 자유지상주의는 국가주의를 이길 것이다. 국가 위세를 특별히 중시하는 초강대국이 아닌 나라에서, 동원된 애국심이 계속 자본에 맞먹는 결기를 유지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가보안법이 자본운동의 걸림돌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우익 진영의 폐지 반대 목소리는 쑥 들어갈 것이다. 자유지상주의는 한국의 전통적 수구기득권층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경쟁자들도 꽤 개종시켰다. 지금 한국에서 자유지상주의는 개혁의 이름으로 관철되고 있고, 여권의 주류는 총자본에 굴복한 듯 하다. -61쪽

자유지상주의의 범람은 세계화에 시큰둥한 유럽에서까지 목격되고 있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들에 맞먹는 경제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나라들이 두세 세대 전에 이룩한 복지시스템이 없는 한국에서 이것은 재앙이다. 서유럽과 달리 우리에게는 줄일 복지 자체가 없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시스템 구축과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연대를 핵심 가치로 삼는 좌파적 감수성이 우리 사회에 특히 긴요한 것은 그래서다. "부자에게는 세금을, 서민에게는 복지를"이라는 슬로건은 한 정당의 선거구호를 넘어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기술적 근본원리가 되어야 한다. 세법 손질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부자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좌파 세상이 왔다고 호들갑 떠는 야당과 우익언론이 민생을 얘기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다. 민생은 본디 좌파적 가치다. 우리 사회에는 좀 더 많은 좌파가 필요하다.-62쪽

강준만 교수의 새로운 글쓰기가 깊은 곳에서 현실정치와 소통하고, 그 큰 틀의 정치평론이 인터넷에서 그림자와 메아리를 얻는 표준적 규범텍스트가 되길 기대한다. 그는 아직도 지식인들의 지식인이고, 논평가들의 논평가다. -72쪽

시청 앞에서 인공기를 흔들어대는 것은 분명히 대다수 한국인들의 미감을 거스르고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철없음이나 유치함 자체를 형벌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시민적 자유의 밑바탕을 위협한다. 시청 앞에서 부시 당선을 위해 기도를 올리거나 히틀러 사진을 들고 있는 것 자체를 처벌하는 것이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80쪽

사실 이 정권은 출범 이후 지지자들 심정에는 아랑곳없이 신성동맹 눈치를 살피느라 끊임없이 오경화의 길로 매진함으로써 제 지지기반을 허물어왔다. 그러다 사면초가다 싶으면 사소한 '껀수'를 잡아 온 나라가 들썩이도록 신성동맹과 각을 세우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방식의 조잡한 정치공학을 되풀이해왔다. -91쪽

노 정권의 핵심과 그 지지자들이 '조선일보'와는 비길 수 없을 만큼 자유민주주의에 친화적이라는 것은 안전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집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고서는 제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개혁세력'을 보는 일은 슬프다.-113쪽

줏대를 버린 뇌동은 그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크게 해롭다. 그러나 줏대를 지닌다는 것은 독선적이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다. 줏대를 지니되, 진리는 늘 여러 겹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라. 독립은 고립과 아주 다르다. 고립은 단절된 상태를 뜻하지만, 독립은 연대 속에서도 우뚝하다. 연대는 어느 쪽으로도 향할 수 있지만, 아비는 네 연대가 공동체의 소수자들, 혜택을 덜받은 사람들에게 건네지기를 바란다. -145쪽

김수영의 산문 한 대목이 생각난다.
"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 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거룩한 속물들)-329쪽

위에 인용한 김수영의 이죽거림을 내 식으로 고치면 이렇다. 젊어서 온힘을 다해 글을 쓰면, 그 글은 반드시 출판사 편집자에게 난도질당한다. 나이 들어 슬렁슬렁 쓰면, 그 글은 고스란히 활자화되기 마련이다. 무릇 글쟁이는, 제 글이 고스란히 활자화될 땐, 그 글이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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