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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흠,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이란 말이지, 그래 말이야 다 옳은 소리지 그렇고 말고. 하지만 이왕이면 대중에게도 인기 있는 존재가 되는 게 좋지 않겠어? 제 아무리 지성미로 커버한다고 해도 소크라테스처럼 못 생긴 남자라는 소리를 듣고싶지는 않겠지? 이렇게 나부터 21세기 우리 인류에게 최대 사회악이라는 '루키즘'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으니,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 그 첫 장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부터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미안하지만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대머리 씨.
그런데 잠깐,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읽던 어느 한 순간, 몽테뉴가 말하는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 외람된 말이지만 분명 나와 '같은 영혼을 가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한 외로운 철학자의 위안에 나는 그만 속수무책 빠져들고 말았다. 그건 인기가 없어 몇 년 째 연애도 못 한다고, 조만간 봉쇄 수녀원에나 들어가는 수 밖에 없겠다고 투덜거리는 나를 강도 4의 지진처럼 흔들어 놓았다.
이미 다른 분들이 친절한 리뷰를 잔뜩 올려놨으니 여기서는 내 맘대로 몽테뉴에 관한 이야기만 해도 될까. 우리가 '수상록'의 저자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는 철학자 몽테뉴. 그에게는 에티엔 드 라 보에티라는 친구가 있다.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은 불과 4년 남짓. 그러나 그 관계는 평생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단다. 나는 그들의 우정이 부러웠고 심지어 질투까지 났다.
'만약에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대해 크게 실망하지 않았더라면, 예컨대 몽테뉴의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많은 것을 숨길 필요가 없었더라면 우정이 그토록 소중하게 평가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몽테뉴가 라 보에티를 향해 품었던 애착의 깊이를 뒤집어본다면, 그가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 상대방의 의심이나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가공한 이미지를 보여주느라 얼마나 강박관념에 시달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몇 년 뒤, 몽테뉴는 라 보에티에 대한 자신의 애착의 근원을 분석했다. '그만이 나의 진정한 초상을 들여다볼 특권을 누렸다.' ---- 책 중에서
아, 나는 '진정한 초상을 들여다볼 특권'을 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 지 너무도 잘 알 거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라 보에티 같은 친구를, 혹은 연인을 만나기를 바래왔는 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 그 시도는 실패했다. 친구가 없을 때는 외로웠고 친구가 생겼을 때는 정작 내가 바라던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리고 어른이 된 다음 사랑이고 우정이고 뭐고 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진정한 인간관계라는 게 그토록 어려운 거라면 굳이 힘들게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냥 암 생각 없이 즐겁게 살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아닌 상냥한 타인의 가면을 쓰고 살았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이 넘의 한국사회에는 '부적절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의든 타의든 겉돌 바에는 인구밀도가 희박한 나라에 가서 외롭게 죽고싶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궁금하다. 과연 우정이란 존재하는 걸까? 만일 존재한다면 어떤 질량과 어떤 냄새를 가지고 있을까? 사춘기 소녀처럼 유치한 질문이지만 그런 감정이 존재한다면 우정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인간관계를 헌신짝 차버리듯이 내버리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이나 우정)없이는 못 산다고 돌려내라고 징징대는 걸까?
몽테뉴에 관한 장을 읽으면서 내내 질문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지만 그 부적절한 질문은 알랭 드 보통 선에서 적당하게 끝을 맺는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남자가 슬쩍 건드려 논 '철학의 위안'은 퍼도퍼도 샘솟는 바다가 아니라 조금만 퍼내면 바닥이 훤히 보이는 외딴 우물이다. 어쩌면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바다는 위안이 아니라 오히려 근심을 안겨주는 존재인지 모른다. 그리고 목 마른 자에게 우물만큼 반가운 존재도 어디 있는가!
말하자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몽테뉴에게 바라는 위안은 그가 가진 사상의 전부도 핵심도 아니라는 얘기다. 이 책은 부엌의 상비약처럼 얄미울 만큼 딱 그만큼의 위안만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나 태생부터 자본주의적 삶과 가부장적 사랑에 부적절한 존재로서 감히 바라건대, 몽테뉴와 라 보에티의 우정을 본받아 이 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진정한 초상을 들여다 볼 특권'을 누려보고 죽고 싶다. 그렇다면 그 추억만으로도 우리는 외로운 밤 불씨를 지피고 따뜻한 온기를 홀로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만일 철학적인 모든 것, 예를 들어 감동적인 책이나 오래 사귄 친구, 시대를 초월하는 음악 같은 '생은 저 너머에 있다'고 믿는 고상한 위안이라면 말이다.
언젠가 광고에서 크리넥스로도 닦을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철학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슬픔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휴지든 손등으로든 적어도 흐르는 눈물 정도는 닦을 수 있지 않은가.
현실이라는 땅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철학적인 위안은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젋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완고한 나를 미약하나마 흔들어 놓고 갔다. 더 이상 이 땅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도 않고 나는 강한 자도 아니며 위안을 바라는 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 책이 선사하는 달콤한 위안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이 소개하는 몽테뉴는 나에게 그런 위안을 안겨다 주고 갔다. 그 처방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