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포스트, 1663 1 - 네 개의 우상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모 추리소설 클럽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TV 책을 말하다' 방청을 하러가서 이언 피어스의 '핑거 포스트 1663'과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을 얻어왔다. 지난 1993년 개역판 12쇄로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은 이래 대부분의 역사추리 소설들은 어딘가 모르게 2% 부족한 게 사실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 쪽 장르는 이제 좀 시시한 감이 없지 않다. '장미의 이름'에 버금가는 역사 미스터리라는 찬사는 다시 말하면 '장미의 이름'을 따라갈 만한 역사 미스터리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그 자체만으로는 아주 괜찮은 역사추리소설이다. 때는 17세기, 크롬웰의 유혈통치가 끝나고 찰스 2세가 복귀한 영국을 배경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4명의 인물이 나와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는다. 그리하여 2권에 이르면 범인찾기는 온데간데 없고 다음과 같은 질문만이 남는다. 과연 누가 거짓을 말하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그러나 그 팽팽한 극적 긴장감이 마지막 인물인 앤소니 우드까지 오기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게 유감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 다 콜라의 '영국인 놀려대기'는 사건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재미있고, 아버지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청년 잭 프레스콧의 동분서주도 젊은이다운 집착과 광기가 흥미로웠다. 그러나 세 번째 인물인 존 윌리스의 증언에 이르러선 흥미가 상당히 떨어져 그 수(手)가 훤히 보이는 작가와의 두뇌게임을 포기하고 마지막 장을 열어 범인을 확인했을 정도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는 범인이 안 나온다!)

그러니 네 명의 인물 중 가장 개성이 모자란(비겁하기까지 한) 앤소니 우드의 마지막 증언은 사족에 가까울 수 밖에. 말하자면 앞에 리쥬를 너무 많이 깔았다고 할까. 물론 나름대로 지금까지의 증언을 뒤엎고 이야기를 전복시키지만 그 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 어이없는 죽음의 전모라니! 마음 단단히 먹고 태풍의 눈을 기대했는데 소나기만 한차례 지나갔다고 해야하나. 마지막 부분에 밝혀지는 사랑, 살인, 예언, 종교, 부활까지, 일방적으로 퍼부어 대는 정보의 홍수가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는 걸 밝혀둔다.

오히려 내가 주목했던 건 정보를 가진 자 vs 정보를 가지지 못한 자로, 고급정보를 가진 자와 쓸데없는 정보를 가진 자의 비교였다. 알다시피 게임에서는 누가 좋은 패를 가지고 있는지가 아주 중요하다. 직통전화번호를 가진 자와 중간에 안내원을 거쳐야 하는 자는 미안하지만 출발부터 다른 것이다.

네 명의 목소리가 서로 다른 진실을 말하는 이 소설에서 고급정보(좋은패)를 가진 대표적인 인물은 크롬웰의 오른팔로 찰스 2세가 복귀한 후에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던 존 설로라는 은퇴한 거물이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은둔자의 삶을 살면서도 그 모든 상황을 한순간에 꿰뚫고 눈치채지 못 하게 조종하고 마지막엔 결론까지 내려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에 정보를 가지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로 잭 프레스콧이라는 젊은이가 있다. 그는 왜 아버지가 반역죄로 망명지에서 외롭게 죽어 극빈자의 무덤에 묻혔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 한다. 청년다운 혈기로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맨땅에 헤딩하며 정보를 가진 자를 하나하나 찾아다니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은 잘못된 진실 뿐이다.

그는 계속해서 안 좋은 패만 뽑았고 핵심정보에는 전혀 다가가지 못한 채 결국 주저앉고 만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자기가 믿고있는 진실이 권력자에 의해 조작된 진실인 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최후는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통절하기 짝이 없다. 모든 진실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있던 찰스 2세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의 제단 위에서 원하던대로 행복한 내세의 안식을 얻은 것과 달리 말이다.

일반 대중은 TV나 신문을 볼 때 자신이 진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진실은 PD나 기자에 의해 여과된 진실에 불과하다. 매스컴에서 연일 계속 'MBC 엑스파일'을 보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진실 그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한다. 발표당일 테잎과 법전, 변호사를 옆에 두고 법원의 판결에 따라 쓸 부분과 쓰지 않을 부분을 골라내느라 골머리를 썩은 보도국 국장도 가장 고급정보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최고의 정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핵심정보에 가까이 접근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힘이 얼마나 막강한 지 알 것이다. 권력이 부패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그 고급정보를 혼자만 간직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현대사회에서 정보는 힘이다.

그건 추리소설도 마찬가지로 이안 피어스의 역사추리소설 '핑거포스트 1663'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지도 모르는 편지의 암호를 둘러싸고 정보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가지려고 하는 자와 놓치지 않으려는 자의 파워게임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캐릭터 구축과 극적 긴장감 유지에서는 조금 아쉬웠다는 걸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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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7-3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계속 신문에 광고나오던데... 관심이 가더라구요.

히나 2005-07-31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재미있어요 끝으로 갈 수록 점점 더 지루한 게 흠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