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의 숏컷
김지운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김지운 감독이 좋다. 이상한 얘기지만 처음부터, 얼굴도 전혀 모르는데도 좋았다. 그 때는 '조용한 가족' 이라는 단 한 편의 영화도 보지 않았을 때다. 그 대신 나는 이 남자가 백수로 10년을 살았고 교통사고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써서 감독으로 데뷔했다는 거짓말 같은 기사를 읽었는데, 그 당시 나는 서울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4년 가까이 백수로 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하도 친구가 없고 심심해서 워드 프로세서 자판이나 익혀보려고 글을 쓰다 소설가로 데뷔했다는 배수아의 거짓말 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로, 먼 훗날 나도 이 두 사람을 따라해 면접을 본 사람과 핸드폰 뒷번호 4자리가 똑같다는 이유로 밥벌이를 하게 된 일화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나저나 김감독은 바쁜 와중에 언제 글까지 썼을까 역시 대단해 어쩌구 감탄하면서 당일배송으로 주문서를 넣었는데 알고 보니 여기저기 잡지에 실었던 칼럼들을 적당히 묶어낸 모양이다. 에잇. 그러나 그 재미와 무게는 절대 만만히 볼 게 아니다. 웃다가 울다가 ‘요지경 극장 풍경’에서는 아예 뒤집어진다고 할까. 그렇다면 손바닥 뒤집듯 독자를 가지고 노는 이 내공의 정체는 무어라 말인가?


김지운을 인터뷰한 지승호는 그 정체를 ‘외로움’이라고 불렀고 감독 자신은 양아치 어조로 ‘10년 백수 내공’이라 불러주길 바라고 있지만 아아, 나는 말이 되든 안 되든 ‘사랑스러움’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어느 정도 사랑스럽냐고 하면 이 정도다.


가끔, 아주 가끔씩 레디~ 카메라 가 아니라 레이디~ 카라멜 이러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카메라 액션‘을 겨우 외치고는 속으로 ‘지금 내가 제대로 한 거지? 휴, 다행이야. 잘 참았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떻게 대한민국이라는 이 엄한 땅에서 마흔이 넘은 아저씨가 마초가 되지 않은 것만도 고마운데 이다지도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김지운의 거짓말을 믿어 본다면 이게 다 ‘10년 백수 내공’ 때문이란다. 그 말이 아니라도 나는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은 잠재된 백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다.


때로 사람에게는 보리수 나무 아래 부처가 아니라도 어떤 예감 같은 순간이 불현듯 찾아오는데 백수로 리듬을 타던 어느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나는 계속해서 백수로 살겠구나 하는... ‘감독이란 직업도 영화를 안 찍을 때는 도로 백수일 수 있어서 선택한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나도 내 직업이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도로 백수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달리 글을 늦게 쓰는 바람에 손과 발이 꽤 고생하고 있다. 글이 빨리 안 나와 이토록 고생할 줄 알았다면 백수 시절 좀 더 분발해 4년이 아닌 다 년간의 백수 내공이란 걸 쌓아놓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며칠 전 일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어떤 글을 쓰고 싶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심스럽지만 이럴 때는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수 밖에 없다. 2010년 프로젝트까지 미리 정해놓은 그 사람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저도 이런 제가 부끄러워요) 6년이나 일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그런 걸 모르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그 반대라면 모를까. ‘사람이 좋아서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래, 이 직업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사람도 있지 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옛날 옛적도 아니고 어느 먼 곳도 아닌 지금 이 곳에서 어떤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도 남자가 서른 네 살까지 백수로 살았다 한다. 그 것도 아주 쿨하게...


백수 시절, 집안에서 걱정을 많이 하긴 했지만 나는 걱정이고 뭐고 그냥 밀고 나가는 편이었다. 물론 부모님 하시는 말씀은 틀린 게 하나 없는데 늘 말보다는 그 말들의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그냥 쿨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서른이 넘었는데 다 큰 아들이 집에만 있으니 어머님이 "공무원 시험이나 봐라. 동회 같은 데서 일하면 얼마나 좋은 줄 아냐" 그러시면 "아...... 예" 하고 아무것도 안했다. 그러다가 시나리오가 당선되어서 "엄마, 나 시나리오 당선됐어" 하니까 슬픈 눈으로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시더니 "이제 거짓말까지 하냐" 그러셨다. 


물론 나도 서른 네 살이 됐을 때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나의 인생이 지금보다 업그레이드되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당장은 쓴 소주를 마시고 싶지 않은 것 처럼 고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영화 ‘차이나 타운’의 한 대사를 빌리자면 남자가 아닌 여자도 자신을 찾는데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문제다.


인생이라는 신은 짓궂어서 어떤 것들은 원하면 원할수록 더 멀어져 간다. 미안하지만 삶이란 어떤 글을 쓰고 싶다고 해서 쓰게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은 보험이 아니다. 10년 백수내공 김감독의 말을 믿는다면 ‘중요한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고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드는 법이다.’


그렇다면 서른 네 살이 되서 우연히 레이디~ 카라멜, 아니 레디~ 카메라를 외치게 된 사랑스러운 김지운처럼,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았나 6년 째 고민만 하고 있는, 어떤 글을 쓰고 싶다고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나 같은 게으른 사람에게도 터닝 포인트는 찾아오지 않을까?

 

요행히 잘못 들어선 길이 지름길을 만든다면 언젠가 나도 꽁꽁 얼어붙은 빙하를 깨고 평생 흡수만 하고 방출하지 못한 열정이란 놈을 꺼내 내 글 안에 쏟아부을 날도 오지 않을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믿고 싶을 뿐이다. 그 때까지 나의 미진한 글들아, 못난 작가를 용서하렴. 아니 뭐 나는 김지운이 아니지 않느냐고? 아아... 그렇지. 나는 김지운이 아니었지. 아아 분하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김지운의 숏컷 겉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말하자면 이 글은 책과는 아무 상관없는 나의 숏컷, 짧게 베인 상처이다.

 

하루키가 말했다. '숏컷'에는 세가지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나는 '짧게 베인 상처' 또 하나는 '지름길' 마지막 의미는 글자 그대로 '영화의 짧은 컷' 당신에게 '숏컷'은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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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12-27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 행복한 새해 맞이 하세욥.

토토랑 2006-12-2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롭님 너무 오랫만 이네요 ^^;; (괜히 아는척.. 반가와서 왔다갑니다.) 행복한 새해 맞이하세요

LAYLA 2006-12-27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리뷰 너무너무 좋아요^^

히나 2006-12-27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도 해피 뉴 이어. 잘 지내시죠? 토토랑님도 반가워요. 정말.

LAYLA님 리뷰라기보다 페이퍼같지만... 고맙습니다